原理原本 (金元弼先生筆写本: 1953)韓国語200ページ分
漢字が多いので雰囲気は摑めると思います。
* この内容は真のお父様が直接書かれた真本(1951.5.11-1952.5.10)を
正確に筆写した金元弼先生である。(1953. 9월月前後)
The manuscript was accurately transcribed by Mr. Kim Won-pil in about September 1953
*題目項目(編、章、節)及び体系(題目区分)は誰かが付けた
some explanation about Wolli Wonbon here:
제목차례
第 一 編 總論1
第一 章 하나에서부터 全存在로1
第二 章 生의 發源은 先有에서부터 5
第三 章 無形世界와 有形世界의 同和的 根本意義 10
第四 章 灵人世界와 實體人世界와의 相對性 創造原理12
第五 章 하나님의 理想 中心은 모시는 宗敎로15
第 二 編 創造原理와 墮落攝理17
第一 章 創造原理와 墮落原理는 사랑에서 始作17
第一 節 어떻게 지으셨나. 21
第二 節 그렇다면 墮落의 始作을 아라보자.24
第三 節 웨 墮落케 하였는가.28
第二 章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32
第三 章 原理로 찾으려니 聖經은 直接敎示치 못함43
第四 章 그러면 왜 모세부터 直接 뜻 工作못하였는가45
第五 章 生命樹에 對한 根本 뜻46
第 三 編 復歸攝理47
第一 章 하나님은 아담부터 찾는 工作못하고 아벨로부터 노아까지 사탄 對한 根本意義47
第二 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分擔 攝理期間은 노아부터 예수까지52
第一 節 노아부터 아부라함까지 攝理路程의 根本意義52
第二 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攝理하신 根本意義55
第三 節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役事의 路程이 왜 예수의 路程 全貌되는 理由65
第三 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 대한 根本意義78
第一 節 地上攝理 路程에 대한 根本意義78
第二 節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根本意義81
第三 節 洗禮요한 人間性 標準으로 예수를 對함.86
第四 節 復歸攝理 表示로 된 예수 祖上의 血統92
第五 節 예수 三年 共生涯의 路程은 뜻 成事의 터를 찾기 爲함96
第六 節 예수 十字架의 勝利的 根本意義와 勝利的 信仰者109
第七 節 나를 더 사랑하라는 根本意義111
第八 節 地獄가서 傳道하는 예수의 根本意義113
第四 章 예수 昇天 後도 攝理하는 責任的 根本意義114
第五 章 復活의 根本意義117
第六 章 天使長의 喇叭소리와 再臨과의 根本意義121
第七 章 審判에 對한 根本意義121
第八 章 四十日 復歸코저한 攝理路程의 根本意義151
第 四 編 攝理로 본 歷史的 辨證126
第一 章 人類歷史 발전과 하나님의 섭리로 본 辨證126
第二 章 歷史發展 限界를 復歸로 본 辨證130
第三 章 歷史로 본 惡이 善 對하여 勝利한 原理的 辨證136
第四 章 復歸歷史로 된 人類發展歷史139
第 五 編 理想攝理163
第一 章 創造性 復歸로 된 理想論163
第二 章 再臨主는 理想論 完成의 基本存在173
第三 章 歷史的 실두루머리 原理的 解決은 韓國에서 始作180
第一 節 歷史的 실두루마리의 原理的 解決은 韓國에서 始作 180
第二 節 韓國의 氣候는 世界文明의 標本될 象徵186
第三 節 韓國은 地理的으로도 世界의 中心地191
第四 節 韓國은 諸宗敎의 總結實地194
第二 編 第一章 第四 節 웨 타락케 하고 攝理하는가200
第 一 編 總論
第一 章 하나에서부터 全存在로
太初는 하나이시다. 이 하나가 卽 太初의 根本이다. 이 根本이 卽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의 存在야말로 無限小에서 無限大의 存在에 根本이다. 이 하나의 根本이 全體의 根本이요 또 全體의 中心의 根本이요 또 全作用의 外力에 對한 平衡의 基本持點이다. 우리가 現科學 時代에 處하는 生活過程에서 數學을 떠나서는 그 基本發展의 軌道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複雜多段한 現實社會의 構成의 基礎로 數의 單位인 하나를 中心하고 그 中心을 主로삼고 展開시켜 大數의 實體를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무슨 存在의 基本을 세우기 爲하여는 하나의 存在의 確定的 存立이 重大한 것이다. 이 存在가 決定되면은 다시금 하나로부터 增數의 重大要素를 加減組合하여서 나가는데 發展이 있는 바이며 發達이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모든 事物의 根本을 推測하려 할적에 하나되는 單位的 根本이 絶對 重要 要求要素이다. 이 要素의 決定은 우리가 重大 重大關係를 始作케하는 外部的 動作을 決定하는 基因이 되는 것이다. 이 根本이 卽 外部의 動作을 自由軌道로 옮겨주는 中心點이다. 이 中心點이 公式의 基本單位며 他事物體에 미처주는 第一存在다. 이 存在가 弟二存在까지 到達케하는 決定的 中心點으로 되는 바를 알 수 있다.
<以下、200ページまでがご覧頂け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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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第二存在의 中心要求는 무엇인가 하면 弟一存在의 決定的인 單位로부터 끊을 수 없는 關聯된 增數單位라 할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되어 基本的 單位數로부터 無限數까지에 到達하는 進級過程의 表示가 公式이라 한다. 그렇다면 現社會의 모든 存在의 自體는 單位를 떠나 또 公式原理를 떠나서는 存在의 決定的 存立을 保障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런고로 現實體社會의 諸事物은 單位를 中心한 公式發達이라고 規定할 수 있는 것이다. 卽 現世紀 文明도 單位를 中心한 公式發達이다. 그러나, 決定的 論理를 내린다면은 現科學世界도 單位를 土臺로 한 公式發展世界이다. 그런고로 사물의 존재를 認定할진대 根本 하나의 단위로부터 增數的 單位까지가 一平線 路程을 離脫할 수 없는 것은 事實이다.
이 一平線 路程이야말로 他아닌 各單位의 共通路程됨은 事實인 것이다. 그런고로 이 路程의 어느 部分에 서서 左右를 或은 上下를 잡아서 自己存在를 決定짓고자 할 때는 自己는 獨立的 存在와 같은 것이다. 實狀은 右가 있고 左가 있고 上이 있고 下가 있음을 누구나 否認 못한다.
그렇다면 左右의 존재와 또는 上下의 존재에 대하여서는 至今 自我의 決定的 解決을 짓고자 할 적에 左도 右도 上도 下도 모두다 決定的 解決의 間接으로 成立되는 것은 事實이다. 그러므로 至今 自我와 卽 하나를 중심하고 考察하려 할 적에 나아닌 他의 존재의 確定을 要케 되는 것도 事實이다. 이러고보니 큰 問題는 自己 하나를 公式의 根本되는 단위의 實格存在로 되어지는 것이 必然的 要求條件인데 이 條件을 우리 人生은 즉 나는 어디서부터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重大 課業이며 義務이다. 이 課業과 義務를 다하는 根本單位라는 實體를 알고나게 될 때 他에 대한 根本實體單位로 亦是 關聯的으로 解決됨이 사실이다. 그러니 萬有에 있는 存在物은 한 共通路程(創造基準)을 넘어 存在할 수 없는 事實은 明白하다.
이 共通路程은 즉 平衡的 路程인 동시에 決定的 어떤 存在에도 基本되는 安定點이다. 이 점에 到達하여서만이 單數 하나 즉 나로부터 大數 즉 타에 影響되는 根本原理가 解決되는 것이다. 이 해결을 完全히 받았다 할진대 그 自體는 無限한 他自體까지 直結되어 있는 自己 使命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萬若에 이 使命을 勘當치 못하였다고 하면은 自己는 他自體의 存在할 수 있는 必要的 要素를 破하는 存在이니 어찌 그 犯罪的 追窮을 받지 않으랴. 그러므로 우리 人生은 自我에 대하여서 天宙(實體世界宇宙+하날無形世界)와 如何한 關係的 立場에 있는가가 해결의 문제인 동시에 一大苦心되는 사실의 課業이다.
以上 例를 보면은 科學은 有形體를 公式으로 찾는 反面에 그 單位가 實體的인 有形이니 問題는 그리 難하지 않으나 우리 人生은 그 외에 無形의 活動作用을 無視하거나 抛棄하거나 할 수 없는 他力의 힘의 作用과 衝動을 부인 할 수 없는 純粹한 良心的 作用의 힘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自我를 中心하고 어떤 單位를 근본하고 公式的 原理로 나에게 追窮시켜주는 根本 單位體 되는 第一存在를 認識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認識을 보아 自我의 存在를 表徵케 될 때 자아라는 존재는 벌써 第二存在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人生은 良心이 있나니 이 良心이 自我에 存在한다는 것은 누구나 否定 못한다.
그렇다면 良心이 바라는 바는 自體 個性存在와 他性的 存在間에 絶對的인 單位가 平衡線 路程을 通하여 共同한 理想體를 向하여 어떤 使命的 責任感을 追窮시켜주는 큰 힘이 흐르는 것은 事實이다. 이 事實本體를 人間의 根本單位本體라고 할 수 있는 細密하고 高尙한 존재의 근본이라는 것을 論할 수 있다. 이 존재를 말하기를 良心 本體이라고 하거나 또는 絶對善이라고 하거나 또는 하나님이라고 하거나 名稱의 問題가 아니고 存在의 決定的 事實의 問題이다.
다시 말하면 내 良心이 어떤 最善의 目的을 達成하기 위하여 絶對的 共通單位와 같은 公式原理를 向하여 움직여지는 事實이 즉 絶對中心의 力이요 理想完成을 向하여 나아가는 過中에 서 있다는 事實을 알 수 있다. 이 絶對的 力을 第一存在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라 할 수 있다. 이 絶對的인 力은 理想本體까지 到達케하는 作用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第一存在로부터 第二存在 第三存在등을 통하여 共通되는 絶對單位體까지 즉 個性的 絶對單位가 完成할 때까지 力은 作用하는 바이다. 이 良心에 作用하는 힘을 중심하고 나아가는 無形實體로부터 有形實體에로 平衡相衡이 없는 路程을 要求하며 나아감은 우리는 感觸을 보아서라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렇게 實行하면은 自我를 完成하는 길인 同時에 左의 第一存在, 右의 第三存在를 完全存在시키는 使命的 責任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 前例로 잘 알 줄 안다.
이 關聯的 路程은 科學世界의 公式과 한가지 原理原則으로 秩序整然한 天宙體形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無形體인 第一存在(原理)로부터 自我와 第三存在등을 살펴보면 根本 하나의 하나님으로부터 單數로부터 複數에로까지 共通的 路程은 無形世界로부터 有形世界로까지 有形으로부터 無形으로한 回路의 通性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實體世界는 사람과 萬物의 展開를 말한다. 이 有形界는 無形世界의 表示的 影體로서 發展시키고자 하는 것이 즉 創造的 意義이다. 簡單히 表示하면은
神(하나님)=사람+萬物世界이라고 表示한다.
그렇다면 創造한 意義는 하나님 自體 하나이나 性에서는 兩性이었다. 이 하나님의 自體인 自我(하나님)를 複數體系로서 벌려 놓은 것이 創造的 根本意義이다. 實體世界+사람과 無形世界+하나님과는 相對로 되 全部를 共通하게 하나님의 本意軌道로서 無에서 有에로 完全 授受하는 路程에 完全對像存在의 目的을 達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創造란 것은 하나님의 性品 二性 즉 男性 女性 즉 陽性 陰性의 自體를 無限小에서 無限大까지 벌려 놓은 것이 天宙의 眞狀이다. 그런고로 무슨 事物體에서라도 이 性品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天理니 그것은 根本의 뜻에서부터 始作됨의 事實을 証明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에서 始作하여 複數로서 되었고 이 複數存在는 다시금 完全한 本性인 完全單數로 歸因케하여 第一單數로부터 單位複數로서 繁殖增大케 함이 根本 하나님의 理想으로 되었다. 그 理想의 中心點이 사람을 중심하고 天宙創造 하였음을 알게 될 때와 우리 사람과 하나님과의 關係가 큰 重大問題다. 그래야만이 우리 人間問題 根本 解決 問題策으로 結斷짓는 바이다.
하나님은 뿌리고 사람은 줄기와 가지고 萬物은 葉部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닮기 위하여 마음으로 살고 萬物들은 사람을 돕기 위하여 사람에 取게 되어 根本体 하나님의 뿌리를 돕기 위하여 사람한테 取케 될 때 하나의 關聯作用은 반복되어 根本完成을 돕는 것이 創造的 中心 意義다. 이런 創造原理로 되어진 個性眞理体 人間이 찾아 나아가는 眞理라는 것까지와 그 眞理와 하나님과의 이상까지에 대한 根本 攝理路程을 찾아서 대수가 總結된 단수로 歸結하는 全部를 알아 볼 수 있다. 즉 天宙도 合하면 同性體로 하나되고 헤치면 無數하게 된다. 이것에 加減함의 妙味가 天宙의 原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創造하신 天宙라고 하는 그 속에는 極小로부터 極大까지가 무단히 秩序整然한 創造的 相對性 原則과 對像原理 完成으로써 配列됨이 즉 하나님의 存在의 根本부터 萬物存在의 根本과 一實通知하여 加減하여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 事實이다. 이 事實을 찾아볼 때에 그 深大 深廣 深高한 妙理를 어느 方向으로 보든지 禁知無數이니 그러므로 天宙 전체는 神妙한 妙理로 전개되나 그 妙理에 대하여 내 자신이 單位로 되어 同形體로 설 수 있으며 對할수 있을적에 무한한 新眞理가 出現됨을 體驗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過今을 통하여 이런 新眞理가 다시금 要求되는 바이다.
그 眞理本體에 대한 眞狀에 대하여는 體証의 重大性을 要求하는 世界이니 즉 科學的이 要求됨으로 다시 말하면 公式的 要求가 추구된다. 그 眞理本體야말로 現實的 立場과 未來에 대한 現實과의 如一한 活味를 不斷히 體得케함이 充分하여야 하며 發展할 수 있는 珍味와 衝動이 現實的 自我生活을 통하여 生涯로 生存의 理想을 連知함이 없다 할진대 生存의 要素임을 刺戟못하나니 그러므로 이 眞理本體야말로 直接인 同時에 理想인 同時에 永遠할 수 있는 理想의 實我를 把握하는 公式됨의 중요한 요구의 本意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과학적인 原理를 통하여 보여지는 創造主의 攝理와 인간의 중심으로 되어 萬 天宙의 창조적
意義 等等에 대한 根本問題며 또 그에 대한 重要 解決이 되나니 그 중요함이 철학의 근본이면서 宗敎理念의 窮極의 점이면서 萬 인간이 찾고자하는 天宙의 根本이 되나니 이 근본이 大衆人間의 바라는 바의 理想인 터이며 또 生存의 근본이 됨이니 누가 피할수 없는 公理니 그 公理가 바로 우리 전부의 해결을 초래하여 주는 근본 問題點이다.
그러므로 나는 뭇 人生에게 대하여서 인간이 찾아야 할 重大要素를 세상에 전할려는 바이니 전함을 받은 자는 靈을 통하여서 알려지는 사실을 肉을 통하여 能知할 수 있는 유일한 眞理니 그야말로 누가 反駁할 수 없는 天理原則이다. 善과 良心을 사랑하는 사람일진대 본 중요문제를 解決하기 위하여 靈的으로 努力이 조금만 있으면 旣必코 指明함이 有함으로 누구든지(특히 信仰理想을 바라는 자는 빠름) 解決됨으로 決定的인 實體證據로서 天宙理想의 本路를 찾게 될 터이니 어찌 이 根本을 찾지 않으랴. 그러면 지금부터 根本眞理를 알고 찾는 데까지의 經路를 살펴보기로 하자.
第二 章 生의 發源은 先有에서부터
그렇다면 眞理로 되는 根本体라는 存在에 있어 우리와 第一 問題로 되는 生의 根本問題가 解決의 要點으로 展開됨을 피할 수 없다. 즉 우리가 生하여지는 原因과 生하고 있는 原理와 生할 수 있는 原因 等에 대한 萬相体의 根本原因에 歸因하여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이 3대 原因을 알고저 할 적에 現實的이 唯心論的 堅持와 唯物論的 堅持를 살펴서 視察치 않을 수 없는 事實로 되어 있나니 이 양 方向이 理想으로 바라는 終點이 하나로 되어야 할 것이 分枝되어지고 있나니 즉 唯心論으로는 神을 세우지 않을 수 없고 唯物論으로는 物質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어 生에 대한 根本問題에 相俑을 造成하고 있는 것이니 創造의 調和로 된 宇宙이냐 進化로 造成된 宇宙이냐가 問題로 되어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生하여지는 問題가 重大問題다. 天宙의 生物이 生하여지기 위하여서는 무엇이 必要한가. 거기에는 具備條件으로 太陽光線, 空氣, 水,體를 構成할 수 있는 物質이 要求된다. 그렇다면 進化的 立場에서 보면 한 생이 存在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다시 말하면 한 眞理構成體로서 存在하기 爲할려면 반드시 蘇生으로부터 長成까지 長成부터 完成까지에 대한 一貫한 過程을 通하여지는 時間的 移動性으로 보여지는 進化的 法則軌道를 보여준다. 즉 進化法則이 있을 바인데 어떤 目的物이 構成될 수 있는 外部的 條件 즉 進化 할 수 있는 方向으로
움직여주는 힘은 어디서부터 始作되는지? 기타 生을 保存 시킬 수 있는 諸條件과 要素 즉, 힘과 光, 空氣, 水, 土 等等의 存在할 수 있는 保障條件은 무엇때문에인가. 諸條件 等等의 여러 가지 要素를 살펴볼적에 進化的 法則은 移變體形을 취하는 자체 외에 外部的 諸要素存在까지 倉曹시켜 가면서 進化한다면은 모르거니와 그렇게는 되지 못함을 우리는 속히 觀測될 때 進化할 수 있는 外部的 旣存環境은 如何히 되었는가. 이것은 進化하기 위한 前提條件이니 누가 이를 否認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生物은 물론, 기타 諸事物이 存在하기 위하여 根本的으로 必要條件을 共通的으로 保有하게 하는 先有 存在物이 絶對로 要求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生하여 지는 原因을 造成하기 위하여서는 理想形으로 生하여 질 수 있는 外部力의 保障과 生하고 있는 必要要素의 보장과 생할 수 있는 將來의 불변의 條件의 確保 등등이 요구된다. 이 絶對的인 힘의 存在와 絶對的인 不變要素가 具備됨이 前提條件으로 되는 것을 볼적에 생의 共通的인 요소면서 必要的 요소로서 認定할 수 있는 동시에 目的完成을 위한 생의 要素的 存在를 確定시킬 수 있는 根本存在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볼적에 어떤 목적을 造成하기 위한 存在로써 生存하여 나아가는 데는 移變狀態를 볼 수 있나니 이 部分은 進化的 部分으로 보여지는 바이다. 한 部分的으로 蘇生에서 長成으로 完成되는 것임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그러므로 한 生物 또는 物體가 存在하기 위하여서는 絶對的인 共同單位의 力과 要素를 보여주는 그 自體가 즉 創造的 進化인 同時에 目的物 根本体라 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天宙 全部 즉 小에서 大까지를 網羅하여서 創造的 妙味를 無數히 발견하게 된다. 이 創造的 妙味야말로 原理 原則을 中心하고 絶對 理想型을 向하여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즉, 創造理想을 完成하기 위하여 온 天宙의 存在하여 나아가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神은 즉 絶對理想과 創造理想을 完成케하여 主管하는 그런 存在가 神이라고 하여 또 하나님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創造하심의 뜻은 實體萬相을 主管하여 無形理想인 本意世界에 대한 影相으로 짖고 合流, 合和, 合體를 이루어 主管을 理想目的하고 이 天宙를 創造케 된 理由의 原因이 있다. 卽 創造理想 目的은 하나님과 天宙와 同一體形으로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相對的이면서 聯關性을 中心케하여 하나의 根本的인 原理原狀으로 表現化 하려고 하신 것이 萬物創造이다.
하나님은 無形의 存在면서 有形의 存在인 生의 根本本體까지 되어있음에 모든 生物은 하나님 性像되로 지음받고 그 中 全生物과 萬物의 中心은 사람을 標証하여 創造하심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無形 하날이 右左하면 사람도 右左하고 사람이 右左하면 萬物全體가 右左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無形 하날 世界를 主管하는 同時에 有形實體世界까지 總結主管을 하여야 하는데는 實體世界 中心은 사람이니 사람만 主管하면은 萬物은 사람으로부터 主管하게 할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創造할때 하나님이 自己形像되로 創造하시어 實體世界 主管 完格者로 創造하심이 卽 代身 主管者 確立이었다.
이 確保이야 根本하나님의 同像 同性體으로 代辯格 實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은 格과 形像으로나 同體形으로 되어 있기에 主管格을 具備할 수 있는 것은 事實로 되어진다. 그리하여 萬物의 主人格 되는 사람은 萬物이 具備하고 있는 完成格 要素로도 充分한 具體的 形體로 지어졌다. 그러나 그 體의 物體的 存在에 있어서는 萬物의 體의 存在的 要素와는 다름 없었으니 生心의 存在가 萬物보담 나은 存在이었다. 사람도 肉身은 萬物要素와 별반 差異없었으나 그 良心的 構造에는 하나님인 性品이 分在할수 있는 存在 卽 生心이 特有点이다. 이 生心이 長成하여 靈形體를 이루고 靈形體는 또 다시금 生命體와 生靈體로서 完成되어 直接 神의 指示에 左右되게 되어 있음이 特有要點이다.
다른 生物은 肉身은 다 갖고 있으나 生心이 없다. 肉身에는 肉心과 肉體가 合하여 同一目的行動을 하게 되나니 이 作用部分은 動物性의 本能性이다. 이 本能性은 肉身的 活動으로 되어 生存의 知覺과 保護의 知覺과 繁殖의 知覺 等으로 區分되어서 生存體를 繼續하는 바이다. 사람은 內外에 靈的作用을 根本하는 永遠存在인 하나님의 部分性存在를 갖었기에 永遠 善으로 向하고저 함의 自然作用으로 되어있다. 그는 卽 同性 同質的 自體는 合하려는 陰陽 原因에서도 推測할 수 있는 事實이다.
그렇다면 萬物에 生이 注入된 根本은 하나님으로서지만 그 事實的 經路롤 찾어보자. 하나님은 生物의 中心生命의 本體이며 사람은 萬物의 中心의 表現體이니 그 要素에 있어서는 사람도 하나님의 性品, 永遠生命 要素도 갖고 能知할 수 있는
智性을 갖고 그 反面 物質的 部分에는 萬物의 要素를 兼有하여 있는 中間媒介作用을 勘當지었다. 사람을 지으실 때 土와 水를 組合하여 體를 造成하고 空氣와 太陽빛을 주어 實體 生의 體 肉身에다 靈體와 永遠存在할 수 있는 生을 注入시켜 心臟을 起動하는 作用을 일으켜 生의 基本을 세우셨다.
이 生이 起存하기 위하여는 有形體의 本質인 흙과 물을 對하여 無形인 無痛體인 光과 空氣로서 對하여 陰陽的 授受的 反復作用인 呼吸을 始作用하여 圓滿히 授受作用이 繼續하여 生의 維持를 보나니 이 生의 根本은 하나님으로부터 注入된 바이니라. 그리하여 呼吸은 生力의 要素를 돕고 즉 血液을 맑히고 萬物攝取 食物의 營養素는 體를 培養하여 肉體의 不均衡을 도와 並助 並動하여 肉身安全路線을 取케하는 呼吸으로 酸素와 營養素와 圓滿히 授受作用이 回復維持 할 때에 如前히 生의 保障을 이루는 바이다.
그 生의 自體인 肉身위에 無形體이며 根本體이신 하나님의 生心이 中心이 되어서 外部體 構造인 肉身의 動作과 差異없는 一平線上에서 生心의 要求되로 生存함의 目的을 向하여서 나아가여야만이 圓滿生存하는 것이 根本이며 人生의 創造하신바의 目的이다. 卽 生心이라고 하는 靈素의 部分은 하나님의 몸에 一部分에 繁殖을 肉身을 通하여 培養받게되어있는 것이므로 이 生心이 肉身內의에 어느 期間까지에 長成하여 完全한 靈人으로 第二世的과같은 存在의 靈人이 無形世界의 한 神格과 같은 資格으로 옮겨지게 하고저 하심이 生心을 肉身에 注入하신 根本目的이다.
그러므로 生心이 肉身에 있는 동안은 生心이 中心이 되어 肉身을 支配하는 바가 根本인데 肉身의 要求대로 나아간다면 生心은 拘束받음과 同時에 自由長成을 못하게 되있나니 이 自由長成을 못하게 되는 理由는 墮落以後에 始作되었다. 肉身生活을 中心한 生涯는 靈이 長成하는 한 期間의 터인데 靈의 要求대로 그 肉身이 그 目的을 向하여 나아가면 靈은 美形體와 自由形體를 造成케됨이 原則인데 肉身이 靈(生心)을 反하여서 지내면은 靈體는 흠이 많은 同時에 自由없는 靈體로서 되나니 그러므로 사람은 肉身生前에 充分히 靈體의 要素를 取하게하는 生涯의 目的이 生前의 重要目的이다. 이 目的을 造成하기 爲하여 墮落된 世界에는 道를 通하여 靈體의 自由長成을 培養하려는 것이 基本工作이다.
例를들면은 肉身은 菜蔬밭에 있는 靑蟲의 時代와 같은 것이다. 이靑
蟲의 時期에 充分히 營養要素를 取키에 努力하여 充分히 取하였다면 圓滿히 長成하여 完全한 나비로서 無限大空을 自由天地로서 香花甘蜜을 즐겨 活動할려면은 靑蟲의 時期에 營養을 充分히 取하지 못하였다면은 나비는 自體에 不具의 狀態를 주어 本目的을 成就못함과 같이 우리 肉身時는 靈心의 要求를 中心하고 나아가는 肉身은 靑蟲期에 營養을 잘 取한 나비와 한가지로 우리의 靈體가 美形體면서 自由形體를 具備하여 無限理想 境 舞臺를 活動하게 되는 것이 充實하다.
이와같은 模樣으로 肉身 時에 努力이 靈體의 要求대로 나아가는 바가 絶對的 義務로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靈이 肉身을 支配함의 根本된 原理로 되어 있음을 아니 우리 靈體의 要求에 肉身이 同一行動하여 差異없는 生活을 肉身生前에 하여야할 義務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우리 肉身을 靈體의 터로서 지어 自己의 理想繁殖을 始作케 하고자 함이 根本人間創造의 原因이다. 그러니 우리는 肉身生前에 靈心이 願하는 中心點에서 食生活을 하여 創造本體인 하나님의 人間을 지으신 本意를 完成하여서 天宙의 大理想을 充分히 完成시키는데 사람은 中心的 努力을 다하여야 한다.
사람은 天宙에 있어서 中心으로 되어있다. 卽 萬物의 生物은 사람을 基準삼고 지음받은 同時에 萬物보아서 사람은 幸福과 理想生活에 刺戟받고 살게끔 萬物은 慰勞物로 되어 있다. 사람의 生의 生活에 相互協助하는 作用을 갖추어서 圓滿히 生活하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植物은 우리의 肉身의 生을 돕는 酸素를 培養하고 사람과 動物은 植物의 長成要素인 炭素를 配給하여서 生의 要素를 授受하는 協助作用을 돕는 그 理致는 根本創造하심의 一體를 完成할려는 相對 될 수 있는 對像存在를 確定짖는 事實이다.
그 外 動物과 生物(星蟲)은 우리 사람이 生存할 수 있는 理想型의 한 表型을 보여주어 慰勞와 衝動과 刺戟을 받게끔 創造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 人間의 墮落이 없었으면은 萬物萬相은 自我生活에 큰 興味와 幸福됨을 切感하게끔 全宇宙 萬相은 表徵의 慰勞의 對像으로 되었다. 그런데 우리 人生이 墮落되고 보니 萬物萬相으로 하여금 傳하여주는 慰勞對像이 取하는 그의 要求의 目的을 直接 對할 수 없는 無感覺의 存在로 되어 있음을 自覺치 못하니 그 어찌 本創造理想의 慰勞的 對像 存在인 萬物萬相에 대하여 聯關性을 알지 못하게 되니 人間도 亦是 無意味로 보여 지며 同時에 萬物 自身에 대한 保護性과 價
値性을 몰라주니 萬物의 存在의 根本創造 意義도 破하는 作用이 始作되니 萬物의 存在의 根本目的은 아무런 使命的 役割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自己存在를 沒覺하는 생활은 卽 墮落生活을 하고나니 全宇宙는 사람을 爲하여서 和動하여서 協助理想을 完成하여 사람과 萬物로서 人間理想을 表徵시켜 하날의 理想을 對像的으로 對할 수 있는 第一理想作用을 破하게 되니 第一理想實念인 하날의 理想도 나와 和動의 作用을 合成化 할 수 있는 資格이 없게되니 이어찌 무서운 行動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사람하나 墮落되고보니 萬物의 目的이 無價値存在로 墮落體를 받게 되고 그러고 보니 하날과의 對像形 理想根本도 그 目的을 完全히 繼承 못하게 되니 사람은 하날에 對한 墮落을 招來한 中心體形으로 되었으니 人間墮落은 卽 萬物墮落 또 하날 墮落으로 間接的 行動으로부터 直接的 行動 部分까지 犯行한 事實을 누가 責任을 저야되는가! 이것이 人間의 中心 責任 課業이다. 그러기에 人間의 墮落으로 因하여 온 天宙는 歎息의 基因을 가져온바이다. 聖經에도(롬8:19-27) 萬物歎息, 聖徒 歎息 하날 歎息의 始作도 人間의 墮落으로 因하여 始作된바다. 그러므로 人間에게 墮落이 없었드라면 이야말로 天宙는 全部가 理想實形 生活로 安定된 永遠한 幸福生活을 肉身生前부터 始作될것이었겠는데 墮落됨이 우리 全體生活을 拘束生活로 引導함이 今 人間生活의 全顯的 表現이다. 그러니 墮落前 사람으로 復歸하는 것이 人間責任的 義務이다.
第三 章 無形世界와 有形世界의 同和的 根本意義
하나님의 創造目的은 無形의 自體가 有形의 性體로 展開시켜 놓은 것이며 그의 各個性體가 사람의 性品自體를 標本삼고 지었으며 그 사람은 다시금 生心을 中心하고 無形의 本形體에로 還存케 할려는 第一存在世界를 扶與 하심이 根本目的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中心하고 하나님 自身이 無形體에서 有形體로 還存 할 수 있는 原理로서 創造하심이 根本 中心 目的이다.
하나님=사람+萬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靈人+肉身이다.
靈人은 無形體이면서 永遠存在이다. 그는 하나님이 永遠이니 그도 永遠存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靈人을 完成하는데는 肉身을 터로 주어서 蘇生으로부터 長成케함이 目的이다. 肉體는 萬物의 生의 體의 要素를 取케 함이다. 肉身은 肉心과 肉體로 造成되어 있으니 肉體
인 有機體는 肉心으로 因하여 그 機體에 完全存在體形을 保障키 위하여 努力을 하고 그리하여 生心은 肉心이 理想形 體系로 나아갈길을 明示하여 그 理想體系를 脫線 못하게 하나니 그러므로 生心은 肉身培養上 卽 生心의 本路程線으로 이끌고저 함이고 肉身은 墮落性을 받고 있으며 本路上을 反하여 行動하고저 함이다. 사탄이 作用하는 것은 卽 肉身을 通하여 本能的 機關을 通하여 全面的으로 活動舞臺로 하고 있다.
모든 存在의 生物은 根本生力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生力은 完全히 繼續作用을 하여만이 生存이란 條件이 成立되는 바이다. 卽 肉身이 生할여면은 有機體로 食物을 無機體로 空氣와 太陽을 받아 呼吸起動으로부터 心臟起動으로 作用할 수 있는 外部的 力을 注入받아 生의 起動을 받음이다. 生이 繼續하려면은 사람에게는 肉身에서는 呼吸을 通하여 血을 맑히는 作用과 血을 供給하는 作用이 共同的 並助並行하여 授受作用을 繼續하여야 하는 同時에 生心에 있어도 또한 實體的 作用과 同一한 第二作用을 要하는 바로되여있다. 卽 生心에 있어도 肉身이 生하는 作用을 保障한 그우에다가 第二作用을 繼續하는 바이다. 그것은 肉身이 生心의 營養과 같은 것으로 作用한다.
그러므로 이 營養은 生心의 長成할 수 있는 必要素를 需給하여야만이 되는데 生心이 長成할수 있는 必要的 要素야만된다. 이 必要的 要素로 되기 爲하여는 生心에 反하는 要素를 許與치 않는다. 그러므로 良心的 立場에서 肉身 生의 保障이 要求된다. 그리하여 保障되는 肉身生力要素는 生心 要素의 血의 作用과 같은 作用으로 되어 生의 根本되는 無形世界의 生素를 呼吸하여 肉身으로 받은 生力要素와 合하여서 完全 授受作用의 保障이 根本的 要求됨을 아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 人間은 無形世界의 生의 理想要素를 받어야 하는 것이 根本이고 이를 協助 並助하여 無形世界와 有形世界와의 共生基準點으로 始作됨을 아러야만 된다.
사람은 有形 生에서 無形 生의 世界까지 呼吸하여 生의 根本要素를 받고 있음으로 이 두 作用을 우리는 我한 自體에서 認識할 수 있는 바이다. 卽 無形의 要素의 長成이 要求되는 充當은 圓滿한 良心 路上에서만이 始作되는 바의 原理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 作用은 我를 이기는 힘으로 現實體我에게 强力히 要求하는 바의 實感力이 良心의 活動認認이다. 사람의 價値는 이 根本體와 合할 수 있는 永遠生要素를 갖임이고 伹 萬物은 萬物生力이 作用할 수 있는 必要要素를 自然界를 通하여 授受하는 作用 生의 繼續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은 生하다가 死하면 自然界로 還因함이고 사람은 萬物보다 第二還元存在가 있으므로 死하면 後, 生이라는 것이 示定되는 바이다.
그래서 우리말에 죽난 것을 돌아갔다고 하는 格言은 이것을 良心直告하는 第二還因生을 證據함에 不過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永遠性 理想을 通함으로 그 良心 告白의 말은 現 世界에 事實的 實體를 豫証함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墮落된 世上에서도 된다 된다 하면 그것이 必然的으로 到達하는 것은 根本 生心 作用은 永遠 本體와 連絡하여 그의 計劃的 路程을 豫感하는 表示로써되는 豫告的 事實을 우리 生涯路程에서 많이 보는 事實이다. 이는 사람의 永遠存在할 수 있는 第一存在의 實體의 確定的 存在를 明白히 알려주는 間接的 證據의 表示다.
第四 章 灵人世界와 實體人世界와의 相對性 創造原理
하나님께서 사람은 創造하실때에 自己로부터 分立性으로 表現하심에 創造에는 男性, 女性 卽 陽性과 陰性 또는 授受作用性 等의 完全히 存立됨에만이 生이 創造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한 存在의 卽 相對性 男性이면 男性, 女性이면 女性 한 存在를 다시금 分析하여보면 그 한 存在 各自에 異性形인 性品을 알 수 있다. 한 存在가운데 그 本體인 形像인 影體構造를 찾아볼수 있는바이다. 各 部分에면 部分에서 相對的 有機點을 中心하고 作用의 始作 또는 作用傳達 始作 等이 基礎로 되어 있음을 우리 사람 하나를 中心하고도 그 自體 中에 하나님 本性을 알 수 있는 同時에 天宙의 創造原理를 區分 分別로서 全體構成이 表示發見 할 수 있는 創造化의 原理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如何한 關係로부터 이와 같이 創造하심인가. 本來 사람에는 全宇宙 中心이다. 表現化된 連結性이 表示되었다. 卽 사람은 實體生存을 維持하려면 내한 自體에서 三部分의 生의 機動作用이 要求되는 바이다. 卽 胃의 作用, 心臟의 作用, 呼吸作用 等이다. 그 外에 對像된 存在로서 神經系通이 있음을 알 수 있다. 胃를 中心하고 보면 外部로부터 食物을 받아 營養素를 供給하여 血을 돕고 卽 받았으니 주는 作用이며 또 心臟은 血을 받아 動脈으로부터 通하여 靜脈이 있음을 알수 있다. 또 肺를 通하여서 空氣를 받아드렸으니 내보내는 作用 等이다. 全部는 授受作用을 圓滿하게 하여서만이 生의 한 存在를 維持시킬수 있는 體를 가질 수 있다.
이 사람 實體存在와 靈人存在와는 한 作用法則과 같은 原理로서 表徵되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卽 肉身이 生하려면 胃部의 動的作用과 心臟의 動的作用과 肺의 動的作用이 同一하게 並動並助하는 路線에서만이 機關 動力 全部인 心臟을 起動함이 始作을 보게된다. 이 始作은 外部부터 完全 保有하여 주는 舞臺는 ①은 胃를 取하는 實體萬物存在 ②는 無形世界의 한 表示的 存在인 空中世界부터의 取하는 呼吸作用 또는 光線의 作用 等의 具備됨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環境的 具備体는 創造時부터 우리 靈人世界에서도 이 相對 될 수 있는 環境的 具備存在를 象徵시킨바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肉身이 生하여 生活體를 維持하기 爲하여서는 萬物의 恩擇과 空中의 恩擇을 받아 心臟의 動함과 同時에 神經系의 作用을 要케되어 한 存在를 維持한다.
但 心臟機關은 動力機關이며 神經系通은 感覺機關(器官)이다. 이것이 相互協助하여 한 目的으로 作用成事 完成 時에만이 한 우리 生의 感味를 取케 되나니 이 自體인 構造야말로 우리 靈人世界 構造를 表徵시켜주나니라.
그러므로 靈人의 存在하여 生할려고 할 때에 우리 肉身은 우리 肉體의 胃의 作用과 같은 血을 돕는 것과 같이 靈人이 生長할수 있는 營養要素를 授給하여야 한다. 그러면은 이 營養要素는 肉身生活 圓滿으로부터 始作됨이다. 卽 生心要求되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生心은 한 肺臟과 같은 作用으로 無形空中世界로부터 無形生心要素인 呼吸을 始作하여 靈人体를 構成코저 함이다. 이것이 構成되면 靈人体의 感覺性 本體인 하나님의 實體와 聯關을 이루어 靈人 神經線과 같은 無限 生의 動力을 感覺하여 그의 完全存在인 한 分體로서 長成코저함이 重大要求이다.
그리하여 내 自體 한 存在가 完全한 分體存在로서 長成되면은 無限大의 生의 理想要素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내한 自體에서 特히 하나님의 사랑의 充足함을 받아 喜悅과 幸福을 느끼는 同時에 한 完全한 相對性 存在인 異性体를 要求시키고저 함이 하나님이 사람을 分性하게 지었고 이 分性을 다시금 合成化하게 하고저함이 創造目的이다. 이 合成化를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路程이 한 理想路程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創造받은 萬物은 勿論이고 그 中 사람도 亦是 男性이면 이 存在가 完全 長成하면은 女性을 要求케되나니 이 要求하면서 찾아나아가는 것이 한 幸福의 路程으로 되어있다. 이 幸福된 路程에 醉함에 人間의 最大理想으로 하나님은 創造하였다.
그러면은 하나님의 創造理想은 사랑에 醉하며 繁殖케하여 創造主가 우리를 사랑하는 代身 사랑으로서 子를
사랑하면서 永遠히 살 수 있는 세계를 創造코저함이 目的 理想이다. 그러므로 男性 女性이 있고 相對性世界를 創造함이니 그 얼마나 고마운 創造들이랴. 그럼에도 사람은 그들 中에서 最高 理想 靈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中心하고 萬物을 對하여 完全사랑을 줄 수 있는 中心存在로 되어 있으니 어찌 사랑치 않으랴. 이 圓滿 사랑을 成事코저 함이 하나님의 根本 人間 對한 사랑의 原理이다. 그러므로 人間은 한 하나님의 神經存在와 같은 中心 作用인 對像格 存在다. 其 外 萬物은 人間의 神經作用 部分을 刺戟하여 주는 對像存在로 되어 서로 사랑을 通達시켜 한 中心을 理想 圓滿 사랑에 處케 하고저 함이 全宇宙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目的이다. 萬物은 사람이 理想 사랑을 하게끔 刺戟 衝動을 보여주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理想 사랑으로 發動시키는 存在로 되어야 한다.
하날은 우리를 爲하여 사랑을 주고저하나 그 사랑을 받아야 할 存在없고 보니 어찌 하날이 사람을 사랑하랴. 그러므로 사람이 사랑받지 못하니 萬物 亦是 그 사랑의 目的도 達成 못함이다. 이런 矛盾이 墮落부터 始作되었다. 그러나 사람이나 萬物이나 全部가 繁殖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始作된다. 男性은 愛, 女性은 美로서 사랑할 수 있는 存在로되는 美의 存在가 要求된다. 그 存在를 所有하여 사랑하는 性交는 卽 創造的 本性 愛인 한 瞬間이라도 共同하게 切感하여 사랑을 주고받는 곳에서는 生에 對한 基本土臺를 作成하나니라. 그 時에 男性이나 女性이나가 사랑에 對한 醉感이 있어서만이 또한 條件은 男性의 動脈的 動과 女性의 動脈的 動이 共一 授受하게 되어야만이 生의 出發이 始作된다. 卽 姙娠된다. 動脈鼓動은 第二存生의 存在의 生의 起動力이 되어 圓滿하게 授受滿足으로부터가 第二 生의 始作은 創造原理로 보아 아러야 한다.
우리 肉身 生命도 생겨나기 爲하여는 特別한 愛의 授受作用을 通하여만이 成立되거든 우리 靈人의 生을 받는 것도 亦是 하나님의 無限 사랑과 하나이되는 一體 理想 路程을 取하게 될 때에 生의 始作은 勿論이고 生의 長成이 있나니 그러므로 우리 사람 自體는 하날 對하여서는 完全 美의 存在로 나타나여야만이 된다. 完全 美만 所有하면은 完全 愛 卽 하날의 사랑은 우리를 向하여 流動作用의 始作과 같이 흘러들게 되나니 이 作用이 우리 사람에게 미치게 될 때에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게 되며 萬物까지도 사람을
尊敬하게 된다. 하나님은 完全 사랑을 사람에게 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個性体 對像体로 異性을 주어 하날 사랑의 한 高貴한 表示를 보고저 함이 目的이고, 이 사람이 男性으로부터 女性으로 同體의 愛를 주고받을 적에 하날에는 그의 사랑의 全性이 하나님의 創造理想形을 들어내게 됨으로 비로소 하날의 無限 사랑을 人間에게 扶與하여 주는 바가 目的이다.
그런데 創造世界가 墮落받고 난 後에는 宇宙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代身的으로 주고받는 한 存在도 없었으므로 하나님이 이 存在를 세워 찾고저 함이 目的이다. 이것을 찾아야 萬物과 宇宙가 다시금 蘇生하는 根本이 生起게 되나니 그런고로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시는 役事는 卽 攝理는 여기에 重要要點이 있음이다.
그러면 結論的으로 表示하면은 하나님 하나에서 사람 二性(男性+女性)으로 分立시켜서 長成케하여 사랑 理想을 주어 幸福케 하는 同時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들의 兩性이 一體가 되어서 사랑하는 그 自體들을 볼적에 얼마나 아름답고 貴하게 보는가를 사람에게 알게 하기 爲하여서 繁殖을 주어 사랑할 수 있는 存在들로 되게 함이 繁殖体 子息을 위한 父母들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理想 사랑하면은 이와같이 貴하게 보여지는 自體가 人間임을 아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人間은 肉身이 있고 靈人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에게 肉身의 父母와 靈의 父母가 딴 存在들과 다르게 所有함이 特有點이다. 이 點이 有함으로 永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은 永遠理想世界는 靈의 父母를 모시고 各自가 사랑 理想點을 每日 生에 醉한 生活이 우리 人生의 理想이며 創造主의 理想이며 靈의 아버지 어머니의 理想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肉身 父母가 있는 同時에 靈의 父母가 있는 것을 찾어 모시어여만이 우리 根本點을 찾아 사는 者가 된다.
그러므로 오날 世界에 이 根本原理를 밝히지 못한 것을 天命을 通하여 밝히고저 하는 바이다. 몬츰 宣言하는 바는 靈을 通하여 가르침을 받는 者는 이 原理와 本論에 대하여 事實의 根據点을 알기 위하여 問議하면 그 決定的 自體를 알려 주리라.
第五 章 하나님의 理想 中心은 모시는 宗敎로
하나님께서 世界를 主管한다면 그 主管은 必然的으로 自己를 높이는 中心構造를 中心하고 나타날 것은 우리가 想像的으로 推測하여 알 수 있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世界도 宗敎理想形態을 가진 國際構造가 必然的으로 나타나야만이 되어진다.
그렇다면 우리 理想은 卽 하나님의 理想이 世界的으로 實現될적에야 人生은 幸福으로 살 수 있으며 기리 기리 幸福이 始作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宗敎는 世界의 中心으로 움직임을 否認 못한다.
그러하면 現今世界를 볼적에 世界的 中心을 이루고 나아가는 하나님을 모시는 宗敎는 무슨 宗敎인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 宗敎는 基督敎를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 基督敎의 中心眞理와 하나님의 理想과는 同一하며 그 理想과 世界와는 同一한 路程을 떠나서 나아갈 수 없는 바이다. 이것이 없다면 宗敎로 모시는 神의 存在에 對하여서도 다시금 疑心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現世界는 하나님을 中心한 國家들이 聯合한 國際機構와 反對인, 神이 없다는 國家構造인 共産主義 國家體系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은 造物主의 뜻이 완성을 보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反對하여 나아가는 그 存在들은 惡神의 主管國家이다. 다시 말하면은 사람을 서로 所有하고저 하는 神的 싸움 卽 하나님과 惡神 사탄과의 사람을 찾고저 함의 하나님의 뜻을 反하여 사람을 빼앗기지 않고저 하는 사탄의 反峠이 卽 現代 潮流의 眞狀이다.
그러므로 眞理는 하나이니 하나님은 旣必코 天宙로 하여금 그 뜻을 成事함의 目的이 達成되는 데까지는 戰爭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善惡의 分岐가 몬츰 問題로 우리가 苦心하여도 解決할 수 없는 事實이며 어찌하여 至今 世界까지 하나님이 攝理하시는 根本問題 等等을 찾아보아서 누구나 全人類는 하나님의 根本뜻과 그 理想을 全力 다하여 協助하는 方向으로 나아가야 할 責任的 義務의 根本 等等을 밝히기로 하여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이 基督敎를 세워 人類를 對한 攝理路程과 基督敎의 至今까지 감추어진 眞理의 根本問題 等等이 明白히 나타나야만 된다 이 事實이 나타나면은 末世인 同時에 宇宙的 審判時期는 招來하는 事實의 根據 等等을 아러야 한다. 끝날이 되면은 聖經도 완성하여야만이 될터인데 聖經의 根本問題가 明白히 되지 않는다면 末世라고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再臨이라는 名詞조차 成事치 못한다. 再臨되기 前에 聖經中心 根本을 解決하여만 되는 것이 現基督敎 信者의 重大한 問題이면서 世界 神學界의 重大課業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全世界의 信者들에 對하여서 이 根本問題를 밝혀서 宣布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로 自己를 찾어 나오는 信仰生活路程에 反對된다고 反對하지말지어다. 먼츰 直接 하나님의 敎示를 받는 信者들은 밝힘을 받아 이를 支持하여 뜻 完成에 協助하여야할 重大義務를 아러야 한다. 누가 먼츰 本視的으로 알고 모시는 者는 저 나라에서 큰 榮光의 存在일 것이며 世上에서도 그 尊視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이 根本을 알고 나면은 우리는 如何하게 行動하여야하는가가 重大 責任感이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뜻 實現하는데 協助할 根本意義도 잘알면서 急速한 時日로 實現을 避하면 하나님 앞에 犯行이라 아니할수 없다. 모르면 容恕받지만 알면 責任使命에 대하여 各自는 全部를 奉獻하여 기쁨으로 나아가야만 된다. 그러야만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故로 信仰生活이라고 하는 것은 그 目的은 우리 人生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데서 完成된다.(5.22 己?年 記念日 記)(51. 10. 1 淨書 紹子)
第 二 編 創造原理와 墮落攝理
第一 章 創造原理와 墮落原理는 사랑에서 始作
하나님은 사람을 創造하심도 自己自身이 至極한 사랑의 理想을 實現코저함이었다. 卽 하나님은 中和性으로 계시는 本形像를 分性化 하신 것이 사람 創造며 萬物創造의 表徵이다. 하나님은 分性을 보게 될 때에 至極한 사랑을 現實化 시키고저 함이었다. 그러므로 萬物全部는 하나님의 理想을 더욱 美和하기 위하여서 萬物을 지으셨다. 萬物体에서 사랑性을 볼수 있게 되니 그 本性인 사랑 理想을 表徵시켜 內部로는 外部부터 表徵 體系로 傳하여주는 刺戟을 加하여 內部刺戟을 助長시켜서 內部的으로 더 높은 사랑 卽 어떤 萬物에서도 볼 수 없는 最高의 사랑을 할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다시말하면 사람의 사랑은 어느 萬物性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랑성을 갖고 있게 지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 사랑性을 圓滿히 가져야할 目的이었는데 그 目的의 圓滿化를 이루지 못한 것이 墮落性의 出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 나타나고 사람의 사랑을 萬物에게 表徵되어 美的世界를 이루어 온 天宙는 和動하여 一体的 喜樂을 보이고저 함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天宙 理想의 極局의 中心이며 또 喜樂과 幸福과 滿足과 主侖과 根本이니 그 사랑을 사람과 萬物과 하날 天使들이 즐겨 思慕하면서 더욱 많이 받고저 함이 直接的 要求였었다.
그러면 人間世界에는 善惡이 없어야 할 것이었는데 善惡의 始作도 사랑을 中心하고 되었었다. 卽 線은 하나님의 사랑 圈內며, 惡은 하나님의 사랑 圈外다. 本來 善의 世界뿐이만이 目的이었는데 惡의 世界의 出現이 卽 墮落이 拒來한 膳物이다. 그러므로 天堂 地獄이 있는 것이 아니고 天堂은 善의 世界 즉 하나님의 사랑 圈內요, 地獄은 惡의 世界 하나님의 사랑 圈外의 世界니 卽 死亡世界라고도 한다. 그것은 생명의 根本 하나님 사랑을 떠난 世界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면 人間의 墮落根本과 惡의 起源點은 聖經을 비추어 또는 惡에 대한 하나님의 態度 等을 밝히기로 하자. 하나님이 天地萬物을 創造하실때에 善을 中心하고 지으셨다. 善은 하나님이 居할 수 있는 存
在요 善에는 하나님이 永遠하심과 같이 永遠性이 있는 同時에 사랑 理想性을 完成한 根本存在다.
創世記를 살펴 볼적에 모세가 記錄할 때 알려주신 創造說을 그 本意대로 發表키 위한 것이 아니고 卽 文字 그대로가 아니고 靈的으로 未來에 對한 秘密을 두고 敎示한 바이었다. 그 當時에는 根本을 밝혀서 發表할 수 없었든 것은 그 當時 人間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事實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創世記 創造說 가운데에서 보여주는 墮落 根本自體인 善惡果를 根本 存在케함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었다. 그로 因하여 墮落이 始作된다는 論理는 너무나 다 잘아는 事實이다. 그 外에 蛇의 存在와 해와의 誘引이 그 根本 中心들이다.
그러면 이 事實의 事實은 事實이나 그 根本意義에 있어서는 큰 問題로 되어 人間世上의 重大한 難關의 話題거리였다. 사람은 묻기를 하나님은 能力이시며 아지못함이 없으시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는데 왜 墮落되게 하며 또 墮落的 要素를 配置케 하였는가? 等等을 살펴 볼적에 하나님은 사랑이니 무엇이니 한들 根本的으로 惡이 始作을 하게끔 지어 놓고는 무엇이 善하라 善하라 하고 人間 對하여 한다고 누구나 問題의 焦點으로 말하고 있다. 惡의 主人公은 사탄인 同時에 逆賊된 天使이며 그 存在에 있어서는 누시엘 天使長의 一名의 始作이 있음을 다들 아는 事實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根本 逆賊될 수 있게 하나님이 지으셨는가. 그 天使長은 왜 主管못하였는가 重大問題이다. 創世記 三章을 잘 보면 一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野獸 中에 蛇이 가장 奸巧한지라, 배암이 女人에게 닐러 가라대 하나님이 동산의 果實을 따 먹지말라고 하시드냐”고 무른 것이 배암이 墮落케 하는 始作이었는데, 잘 보면은 배암에게 이 사탄이 들어가서 云云한 句節이 없나니, 그래서 배암이자 卽 사탄임을 알수 있다. 사탄의 存在가 卽 배암으로 表示됨을 알아야 한다. 卽 배암은 사탄이며
사탄은 卽 누시엘이다. 배암이라는 名詞를 비어서 誘引 對象의 表示格에 恰似함으로 이런 表示的으로 使用한 名詞인 것이지 그 自體가 蛇가 아니다.
現 信者들은 其 自體가 배암으로부터 誘引받게 된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벌서 人間에게는 墮落시킬 權限없는 존재로서 사탄은 誘引 路程을 成事코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벌서부터 萬物에 對한 主管을 附與받고 지었기 때문에 사탄도 이것을 알터인데 主管받을 배암가지고 誘引工作을 하리라고는 生覺되지도 않는 事實이다. 설마 誘引할려면은 더 高貴한 格의 存在로만이 必要함을 우리는 常識的 判斷으로도 明白한 事實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根本眞理路程을 밝히지 아니 하였기에 至今까지 確實한 根據를 잡기 못하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至今은 때가 다 되었으니 世上에서 成事하여야 할 時期도 왔으니 必然코 歷史的으로 未分明한 此 創造根本과 墮落根本의 出發點을 밝혀야만 하나님의 뜻이 成事될 時期를 알려주는 것이니 반드시 根本을 表示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至今까지 世上을 찾고저하는 하나님은 사람의 根本으로부터 攝理의 根本問題의 뿌리(根)가 되는 것이므로, 至今 世上에는 뿌리를 要하는 末世期라고도 부르는 時期에 當到하였기 때문에 이 事實을 새로 온 天宙에 發表하는 바이다.
本來 하나님은 無形世界에 계셔서 天使 等을 지으시고 다시금 有形萬物實體世界를 하날 無形世界의 그림자 模樣으로 지으시기 始作하였다. 萬物有形實體世界를 지으시기 前에 天使를 지으심은, 하나님의 有形實體理想 世界 創造함을 돕게하는 同時에 여러 가지로 問議와 議論의 相對로 하여 왔든 것이었다. 天使 等 中에는 天使長이 있었다. 그 天使長이 卽 逆賊 軌道를 밟게 된 누시엘이었다. 天使 等을 지으심은 有形實體世界를 지어 하나님의 理想 展開할 世界를 도와주면서 協助的 存在로 지으셨고 그리하여 이 實體
世界와의 理想의 始作을 보게 될 때에 亦是 天使世界도 理想을 扶與받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創造하심의 根本意義는 天使도 알지 못하였든것이었다.
萬物實體世界가 實現되면 하나님은 勿論이고 天使들까지도 기쁨이 되어 온 天宙는 하나님의 理想 기쁨에 充滿하여 그야말로 理想世界를 造成코저 함이 目的이었는데 目的이 未到達時에 墮落이라는 非公式的 存在가 生起게 되었다. 이는 卽 누시엘의 行動으로부터 始作됨이다. 이 行動이야말로 人間에게 있어서 無限의 苦痛의 根本이 되어 始作하였다. 이것이 卽 地獄分岐의 始作點이다. 卽 罪의 始作이다. 하나님이 本來 萬物을 지으실 때에 그 本意는 하나님의 本形展開면서 本性展開와 모든 各萬物自體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根本을 象徵하는 個性眞理体로 되어 根本眞理体되는 하나님의 本性品의 表示가 充分히 要求됨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唯一이며 永遠이며 不變의 存在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眞理의 根本이며 眞理의 重大三要素란 唯一性, 永遠性, 不變性을 지음 받은 萬物로 具備하여 理想的 生活形態를 保障될수있어야만 된다. 그러므로 萬物에로 하나님의 性品이 表示될수 있는 個性眞理形態를 갖추어 지으셨다. 그러므로 이 個性眞理体로 지으시기 爲하여는 蘇生으로부터 長成으로 長成으로부터 完成으로 되는 階級을 두어서 造成하였다.
한 存在가 完成存在로 될려면 蘇生이 始作을 보아 長成으로 長成을 다하여 完成으로서 萬物을 軌道內를 通하여서 創造받게 되었다. 다시 表示하면 ①眞理에는 蘇生이 있고 長成이 있고 完成이 있다. 이와 같은 時期的 過程을 經過하여야만이 한 眞理体가 完成된다. ② 眞理에는 唯一性, 永遠性,不變性이 있어서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善에 屬하여 理想存在物로서 取扱하게 되어있다.
第一 節 어떻게 지으셨나
말삼(言)으로 萬物을 創造하시었다고 하시었지만 그 言이란 名詞 그대로가 아니라 말삼이라는 名詞 가운데는 하나님의 理想의 한 表示体의 證據로 되어 理想을 그대로 딴 存在物로 實現시키고저 함에 말삼(言)의 重要目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2절에 言이란 太初에 하나님과 같이 계셔서 言으로 萬物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물건이 言이 없이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없나니라.
이 言이란 意義는 하나님의 理想인 第一存在의 마음的 計劃을 말삼을 通하여 第二存在의 確立을 要한 中媒的 分擔過程 期間이 말삼이 占有한 部分이기 때문에 말삼이라고 表示한다.
例를 들면 사람이 말하는 바는 마음의 實狀이 第二實體實狀을 完成코져 하난것이 中心目的이다. 말삼으로 지으셨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根本理想型을 그대로 萬物實體型으로 展開시켰기에 말삼으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삼이 實現되는 곳에 理想이 展開되는 것이 根本말삼의 目的임으로 이런 名詞를 代用하신바를 알수 있는 바이며 또 事實的 意義로 되어있다.
말삼으로 萬物을 지으셨다고 하는 것은 벌써 하나님이 直接自己의 体로 되어있는 第二存在性을 알려주는 것을 아러야 한다. 다시말하면 말삼으로 지으섰다는것은 하나님의 根本形態와 性狀을 그대루 벌러 놓았다는 意義가 있단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삼으로 지으섰다는 것은 相對性을 말하면서 陰陽性을 말하는 바를 알려주는 事實이다.
이말삼이라는 意義는 여기에 始作되는 바이다. 이 말삼에 對한 意義가 只今까지는 解得이 難한 問題이었지만 創造原理를 살펴볼적에 아므런 難한 問題가 아니고 事實的 實體로서 取扱되는 바이다. 이러한 意義를 두고 萬物을 지으섰기에 말삼으로 지으섰다고 宣言하심이다. 創世記 1장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무엇이 있으라 하시면 그대로 된지라 그대로 되안 存在에 대해서 善하신지라 저녁이 되며 아츰이 되니 몇잿날이러라 하신 句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저녁이 되며 아츰이 되니 몇잿날이러라 하난 말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저녁부터 아츰까지를 하루로 잡고 있는데 그것을 世上的으로 살펴보면은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으면 날수는 이틀인데 왜 한날로 하였나 하면은 여기에 큰 意義가 있는 것이다.
이 其間은 한 個體의 存在가 創造될 때에 蘇生으로부터 長成으로 長成으로부터 完成까지에 도달한 個體存在가 하나님의 뜻에 合致될때에 善하신지라고 命名하시었다. 그러기에 그 期間은 是完할 수 없는 것이다. 저녁이라 하신바는 한 個體物이 創造하심을 필하시든 때를 두고 말함이다. 즉 한 被造物体를 中心하고 말함이다. 아침이라 하는 것은 한 밤 시기를 지나서만이 오는 바인데 이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 이 物體가 完成되어 새출발하는 것을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存在物이라도 저녁서부터 밤 기간을 통과치 않으면 안되었었다. 이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通過하여서만이 하나님께서 善하신지라 하시었다. 그러면 이 밤 기간이란 무엇일까 하면은 被造物은 한 眞理体로서 永遠하면서 不變하며 不變하면서도 또 理想型을 表示할 수 있는 存在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한 試驗期間이 즉 밤 期間이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한 試驗期間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結果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存在로 보게 되어서 만이 善하신지라고 命名하심이다. 이 善이라고 하는 말삼중에는 하나님의 지으신 物件은 永遠할 수 있어하는 完全 對象存在임을 말하심이다. 이렇게 萬物을 五日間 지은 物件은 무엇이나 저희가 밤과 아침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알맞게 通過치 않으면 善하다고 命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善하신지라고 命名받은 바가 創造하심을 받은
萬物의 한 共通的 路程이었다. 그런데 第六日째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形像대로 사람을 創造하시대 一男一女를 創造하시고』라고 創世記 1장 27절에 있는 것을 보아도 전에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 속에는 女性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음받은 人間은 萬物을 主管할 수 있는 存在임으로 創造함을 받은 모든 物件이 通過한 共通的 創造過程을 다 圓滿하게 通過하여만이 主管格 主人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니 사람 역시 이 저녁기간되는 지음받음을 必하고는 밤기간과 같은 試驗期間이 있고 그 試驗期間을 通過한 후 아침 기간부터 萬物 主管理想의 根本出發코저 함이 根本目的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萬物主管을 하라는 豫約을 받고 난 후 實際主管으로 한 밤기간인 試驗期間이 必要하게 되었다. 卽 아침期間에서부터 理想期間이었는데 이 밤 期間에 사람은 墮落的 誘引을 받게 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 밤 期間은 어떤 期間이었는가 하면 少年時期로부터 長成하여 成熟時까지 인지라. 成熟時부터 理想사랑을 할 수 있는 格을 完成할 때까지가 그 밤 期間이 要求하는 期間이었다.
創世記 一장 三一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甚히 善하신지라 한 것은 萬物統合하여서 말삼하신 바이지 特히 사람만을 中心하고 甚히 善한지라 함이 아니다. 卽 사람에게 있어서는 밤 時期를 通過치 않었을때에 甚히 선하섰다고 하였기에 그 善이란 것은 豫約的 선이지 實格的 선이란 命名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萬物을 主管하라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은 萬物의 全部를 主管할 수 있는 實格付與를 이루고저 함이 밤 期間이 要求하는 期間이었다.
萬物을 주관하려함의 根本目的은 하나님의 理想을 實現化하는 目的이었다. 그 主管할 수 있는 存在 아담 해와는 萬物의 全部를 主管할 수 있는 權限과 그의 資格格位는 어디서 받을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目的이었는데 이 目的은 즉 하나님으로부터이었다. 그런고로 萬物主管完成者는 하나
님이었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萬物의 主管主人格으로 주신바의 根本意義는 누구를 象徵시키냐 하면 하나님을 象徵시키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根本 사람을 創造하신 意義는 實體萬物 主管者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가 實體를 가지신 하나님의 몸들이었다. 그리하여 天宙를 친히 하나님 自身이 主管코저 함이 目的으로 創造함을 받았다. 萬物의 主人公 되는 實體를 쓴 하나님의 存在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墮落되고 보니 그에게 달린 萬物은 根本主人을 잃어버린 存在로 되었다.
第二 節 그렇다면 墮落의 始作을 아라보자
아담, 해와를 創造하시기 前에는 無形世界의 天使들은 天使長을 中心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받았다. 그때 天使長 누시엘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로 議論相對로 되었고 전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生命의 根本이면서도 모든 행복과 要素이었다.
하나님이 無形世界를 지어놓고 天使들로 協助하게 하면서 實體萬物世界를 創造하기 始作하였다. 하나님이 有形實體世界를 지으심은 無形實體의 自己의 存在를 有形實體世界를 통하여 繁殖의 터로 하시고저 하심이 目的이었는데 그 中心理想은 하나님만이 알고 天使長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有形實體世界를 創造하시매 自己 理想의 展開와 함께 기뻐하며 동시에 天使長도 기뻐하였다.
그런데 萬物의 主人公格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 對하여도 사랑을 하시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서 天使長에 대하여는 대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멀리 함이 아니었는데 天使長 누시엘은 아담 해와가 存在하지 않으실 때보다 自己 自體에 있어서는 더욱 滿足感을 느껴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담, 해와가 받으니 自己에게 대한 사랑의 減少되는 感을 느껴서 다시금 이런 感도 느끼지 않는 同時에 사람에게까지 가는 사랑을 자기가 所有하려는 마음으로 工作함이 始作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해와를 지극히 사랑하시니 그 해와 自體를 자기 所有로하고저 하여서 天使長 누시엘은 아직 成熟치 않
은 해와를 대해서 誘引키 始作하였다.
創世記 二章 九節에『生命樹와 善惡果樹가 있더라 하시니 무엇인가 하니 生命樹는 (陽)아담을 中心삼고 하나님을 表示함이고 善惡果樹는 (陰)해와를 表示함이다.』천사장이 해와를 보니 아름다우매 과연 하나님이 사랑할만한 존재이었다.
이 해와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매 그 사랑을 빼앗기 위하여 해와의 사랑의 실체인 貞操를 所有할 工作을 始作하니 天使長 누시엘은 하나님이 許諾치 않는 行動을 始作하매 그 자체의 마음에는 恐怖心과 原理的 가책이 있었다. 恐怖心을 가지고 해와의 사랑을 所有하려 하기 위하여서 해와의 貞操를 蹂躪하고 보니 누시엘의 마음에 있는 恐怖心과 同時에 天使長의 智慧가 해와와 사랑의 一體를 이루고 나니 해와는 天使長의 智慧 所有者가 되는 同時에 恐怖의 마음을 刺戟받았다.
그리고 보니 해와는 未成熟期에 있었지만 自體의 智慧가 밝아짐을 通하여보니 해와의 자기의 男便은 아담이라 하난 것을 明白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지 못하는 아담이 自己의 男便이므로 다시금 男便대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와는 아담한테 사랑을 强要하게된다. 그 强要하는 해와의 知覺을 避치 못하고 그의 要求에 應하니 벌써 해와의 恐怖心 아담에게도 生起게 되어 하나님의 法理脫線함을 알게 되니 아담 해와는 나무 아래에 숨게 되는 行動이 始作되여 無花果나무 잎으로 犯行한 部分을 가리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과 直接 사랑의 一體를 이루어야 할 目的이 根本이었는데 非原理 存在인 天使長 누시엘과 사랑의 一體를 받어 非原理的 墮落 始作을 보게 됨이다. 그러나 墮落이란 根本 始作에 있어서는 하나님한테 더 사랑 받고저 하여 行한 行動의 結果가 되었다. 누시엘은 사람에게 가는 사랑까지 所有코저 함이고, 해와는 根本 아담의 사랑을 찾아 세우고저 하는 行動에서 아담을 主管하고 나니 非原理 出發이 始作됨이다. 이 해와의 行動으로 因하야 하나님의 根本目的을 破하는 行動이 始作되었기에 지금까지 人間 世上에는 女人들이 破滅과 壓制와 無視에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立場에 있게되어 女子들이 人類 歷史上 不自由 한 拘束에서 나온바도 根本 女人 代表 해와의 失手로 因한 報應이었다.
지금 와서야 男女 平等 權限이 生起는 것은 歷史發展 始作과 同時에 始作을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와같이 進行 됨은 墮落이 招來한 膳物이었다. 그런고로 男女 平等 權限이 始作됨은 人間이 墮落前 軌道에 설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 對하여 사랑 받을 수 있는 한 해와의 完全 存在가 始作을 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보여준느 동시에 人類歷史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復歸歷史라는 것을 이 한 事實을 보아도 明白한 事實이다.
이러한 根本이 墮落의 起源点인데 萬一 사람이 善惡果를 손으로 따먹었으면 그 部分을 가리울터인데 이 部分을 가리우심은 이 部分으로 犯罪한 自體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自體이었다. 본래 지음받은 몸에 있어서는 善으로 지음받었는데 어데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아니었는데 이런 부끄러운 부분의 區別은 墮落 本體部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해와의 사랑을 中心삼고 墮落이라는 出發이 始作되어 惡의 基本이 되었다. 善惡果라고 하심은 萬若 하나님의 뜻대로 成熟하여 理想格 愛를 주고 받을 存在로 된 後에 하나님의 神이 아담 마음에 臨在하여서 사랑 成事하였으면 하나님의 智慧를 받아 萬物 主人公으로 完備되는 同時에 이것이 理想이련만, 그와 反對의 行動이야 嘆息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해와의 사랑 自體는 하나님의 사랑 卽 아담 사랑 받았으면 至極히 善한 根本을 始作하는 果의 行動이 始作하여 永遠生이 될것이었는데 그 反對의 行動으로 말미암아 惡의 根本의 果의 行動이 해와의 사랑에 달려서 始作한 自體이니 善惡果로 表示한 바이다.
果(열매)라는 말은 씨라는 뜻이다. 善의 씨도 해와와 사랑 一體로부터인데 惡의 씨로 되고 보니 해와의 行動을 누가 嘆息치 않으랴. 그런고로 女人이 至今까지 拘束받고 있는 事實은 그 原因으로 始作된다. 이 拘束이 解放되어 平等時期가 오면 再臨時가 가까워온 줄도 알 수 있는 原因이다.
그런고로 基督敎에서 “三位一體”라고 하는 名詞가 무엇이냐하면 卽 하나님 아담 해와가 完全하게 一體가 되어야 할 中心意義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사람과는 夫子之關係로 되어있다. 하날 中心한 三位一體가 惡 中心하고 三位一體가 되고 마니 惡世界인 사탄 世界에도 三位一體가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사탄은 우리 사람의 父格으로 代入받아 不順, 不信, 不侍의 한 本體로 役事한 셈이다.
新約에 보면은 예수도 不順, 不信, 不侍者를 對하여 요한복음 8장44절에 責望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너희들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의 慾心을 行하고저 하나니라” 하시었다. 이 말씀은 墮落根本의 主人格의 本體는 사탄이라하난 것을 밝히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배암이란 사탄이를 表示한바를 발기는 것이며 또 해와를 對하여 貞操를 빼앗어 거짓 아버지 格으로 되었다는 것을 밝히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怨讐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알고 다시금 本 아버지를 찾아 모시게 하려는 路程이 구원노정이다.
아담 해와가 犯罪하고 보니 本來 아담 해와에게 注入하여준 하나님의 根本自體인 터 卽 生心을 중심하고 長成하여 하나님이 臨在할 수 있는 터, 自體 卽 아담의 靈人体는 惡을 犯한 自體의 몸에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거두심이었다. 그런고로 犯罪하기 前에 靈人体 自體가 하나님 右便에 계시었다가 第二 아담 格으로 모내심을 받은 그 분이 卽 獨生子 예수였다. 獨生子라는 名詞도 여기에 明白하게 되는 바이다.
罪를 짓기 前 아담의 靈이 예수의 靈에 注入받아 오심이 根本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罪를 짓기 前 아담의 完全 成熟한 存在로 나타나서 福音을 始作하심은 무슨 目的이냐하면 잃어버린 子女들을 다시금 찾아서 墮落前 하나님의 자녀로 찾아 옮겨 놓고자 함이 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오날 人間은 원수의 몸에서 拘束받고 참父母를 잃어버리고 사니 그 良心的 苦痛은 이 事實을 알려주는 間接的 刺戟
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의 품으로 옮겨 놓아 하나님을 根本아버지로 直系血統關係를 맺지 않으면 안될 重大 責任이 남아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成事를 完成치 못하였기에 再臨의 要求가 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惡의 血을 받았으니 養子의 關係로서 根本血을 받아서 蘇生되어 創造理想인 父母를 復歸함이 우리 人間의 全目的이다. 嘆息할바는 養子와 같은 存在로된 우리들이 生覺하면 苦痛之事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惡으로 因하여 始作되니 이런 名詞가 生起였구나. 우리 根本 아버지는 永遠의 아버지이며 사랑하여 찾아주신 아버지시다. 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모시며 또 어머님을 모시는 그 時期 卽 地上의 再創造理想이 始作되는 時期이다. 이 時期를 알아서 아버지 어머니를 다시 찾는 그 기쁨이 온 天宙를 찾고자 함의 根本目的이다. 이 目的은 再臨時부터 始作된다.
第三 節 웨 墮落케 하였는가
하나님이 本來 사람을 지으심은 個性實體가 完成하여서 永遠할 수 있는 한 理想存在를 保存할 수 있도록 지으셨는데 그 時期까지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成熟時期까지가 標準長成하여 永遠하신 存在의 터를 確保함으로써 하나님의 實體 사랑을 주고저 함이 目的이다. 그 期間까지 長成을 通하여 完成까지 到達케 하심은 直接 하나님이 主管으로 하심이 아니고 그저 被創造物原理를 通하여서 完成 成熟段階까지 到達케 하시도록 지으시었기에 하나님은 原理 主管格으로 계시어 그 結果를 보아가면서 하나님은 기뻐하시었으며 빨리 理想 減筆함을 至極히 要求하였다. 그리하고 하나님의 사람 對한 理想은 卽 하나님의 理想은 自由理想을 標準하시고자함을 지으셨으며 그 理想에는 조금도 損失이 없도록 지으셨다.
그러므로 그 自由理想을 찾어 成事할 수 있는 標準軌道는 善을 中心하고 하나님의 뜻을 成事할 수 있는 존재의 터, 生心이 사람 自身에게 있어서 賦與받은 根本体 터로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完成期까지에 到達할 때까지도 하나님이 이러구 저러구(여러 모양으로) 自由理想完成을 간섭하지 않아도 뜻이 合當할 수 있도록 良心과 生心
은 그 中心 뜻(善)을 直向하여 나아가도록 志向하여 가게끔 原理지으셨기에 간섭 主管하지 않었다. 그것은 第一存在의 完成을 無視하는 것인 同時에 原理를 어기는 것이 됨으로 原理完成하여 뜻 成事코저함이 根本으로 됨이었다.
만일 하나님이 그 自體를 直接 主管하여 사랑하지 않었든가 하면은 하나님은 原理를 未完成하여 個性自體를 未完成한 것을 사랑하여 一體的 理想을 成事하였으면 未完成体의 不完全的 事實이 됨으로 그 根本 原理基準까지를 기대리심이 中心의 意義이었다. 만일 未完成時에 사랑 받으면 사랑 받는 그 자체는 사랑만을 要求하여 根本個性原理完成을 할 수 없는 事實이다. 또 原理規定을 反하는 것이므로 그 自體나 사랑하는 自體가 즉 理想 사랑을 成事할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을 至極한 사랑 理想形體를 完成코저 함이었든 것이다.
사람이 完全한 하나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存在로 成熟하였으면 原理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完全 美로서 보여질 수 있는 同時에 그 自體들의 思慕함이 直接 하나님의 自體에로서 通할 수 있는 作用의 始作을 볼 수 있게 지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셔서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이 완성되면은 自然的 原理로 사랑할 수 있는 刺戟을 아러서 사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卽 하날 사랑은 陽이면서, 完全陰的 사랑 對象本體요 사람이 思慕하는 사랑 心의 起動의 目的은 基 相對存在이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하나님은 原理主管格으로 계시었다. 그 時期에 사람들의 墮落이 始作되었다. 사람도 自由軌道로 天使長도 自由理想軌道 世界의 原理로 活動하면서 살 수 있는 自由存在들이었다. 그 自由 理想 中心한 自由成事世界를 造成하여서 基 創造 全自由理想을 完成하기 爲하여서 個性完成과 自由体 理想世界 存在들이 하나님의 根本 理想이었다. 그러면 自由理想을 完成하여야만이 目的이 된다.
그러므로 自由理想을 基臺로 하고 基 우에다 사랑 理想 原理 創造体들이 永遠存在하여 하나님의 根本사랑 理想을 表現化하고저 함이 目的이었다. 그렇기에 人間世界에서 自由찾기 위하여 야단하는 그 原因은 墮落한 緣故이다.
이 自由를 찾으면은 理想自由를, 自由理想 갖고 찾으면은 사랑으로써 理想사랑으로 歷史는 必然的 軌道를 밟게 될 것이다. 그것은 原理를 보아서도 理論的이 가져다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自由와 사랑 理想이 한 基臺로 하여 個性完成을 要하는 곳으로 人類歷史가 흘러 나가는 것의 始作을 보는 이것은 復歸로 되는 事實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웨 墮落시켰는가 하고 말한다. 사람들이 自由舞臺의 世界에서 自由生活하면서 完成點 到達時까지는 原理主管이니, 그 自體들의 行動을 直接 간섭치 않고 良心과 生心을 通하여 本路線確保를 要하게 하였기에 사람으로서도 하나님을 直接 부를 수 없는 原理的 距離를 갖고 있었다. 그런고로 부를 수 있는 程度는 完成 사랑을 成事하여야만이 生覺하여도 하나님을 알게 되며 應하게 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直接的으로 알리려는 사람 自體行動이 나타나지 않고 그 行動의 結果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사탄의 行動에 動하는 基時에는 사람이 良心的으로나 生心的으로나 合하여 行動하여서 하나님이 直接 刺戟할 수 있는 行動으로는 아직까지 未到達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行動結果를 보아 基 墮落된 事實을 아시게 되신 것이었다. 이렇게 지으심은 完全한 사랑을 하기 爲하여 間接的 距離性을 두신 것은 極에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도 有形體의 軸의 存在로 서 있어 서로 合體할 수 있는 電氣原理와 한가지로 지극히 큰 사랑을 始作코저 함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라고 한다면 사람 사랑 (-)는 直接 對할 수 있는 것으로 存在 完成이 未完成한 期이니 墮落行動들은 (-)에 작용함이었다하여도, 直接的 感應되지 못한 것과 같이 지으신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自體로서는 極에서 軸의 固內를 通하는 사랑을 하시고저 하여서 지었기에 萬物自體들의 사랑까지 人間을 通하여야만이 連結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어야 한다.
이 사랑의 未成事가 墮落이면서 善에 存在 外의 存在인
非原理存在가 法理舞臺로 出現하여지게 되니 善과 惡의 分岐點을 成事하고 말았다. 그러나 原理的으로 사람이 中心이니 이 사람의 繁殖發展과 함께 歷史는 始作되었다. 그러나 發展하는 世界의 歷史의 軌道는 自然界의 原理的 움직임 우에 그냥 始作되었다. 그러므로 世界는 惡에 屬하는 主管本意 아닌 非公式 主管軌道로 無目的 世界로 달리는 例로 시작되니 그 世界의 生存한 사람은 어찌 安樂과 平安이 있으랴? 이렇게 됨바는 사탄의 工作이라고 至今 알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를 他目的處로서 끌어온 基 中心을 아지 못하였기 때문에 人生은 無限 苦痛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은 創造本意 아니매 하나님은 本意대로 다시금 찾어 創造本意 理想体하로 恢歸고저 함이 역사를 通하여 하나님의 攝理의 한 路程이다.
그런고로 사람 中心하고 善神과 惡神이 對立을 始作한 結果는 歷史 發展史를 支配하게 되었다. 卽 사탄은 怨讐 父母格으로 사람을 主管코저 함이고 하나님은 根本 子女를 찾고저 함이 目的이다. 이것을 안 우리는 어찌 아버지 어머니 앞에 悔改치 않으랴. 이것이 이 基督敎의 悔改의 根本意義다.
그러므로 根本悔改하지 않을 내(우리) 存在가 至今 悔改하는 것은 참 父母를 몰라보고 박대함의 心中으로 痛憤한 事實을 알게하는 結合의 情境이다. 이 時間의 기쁨이야 무엇으로 살수 있을 건가. 그러구보니 根本萬事는 平安으로 原理로 始作되며 良心的 解放의 시작이요, 참 기쁨의 始作이다. 새 福音 中心이다. 이같이 세상은 惡이 먼츰 始作하였기에 그 뒤를 이어 善完成을 이루고저 함이 目的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또 하지 않으면 아니될 義務이니 旣必코 成事 時까지 하날은 勝利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世上은 至今 惡이 主管하는 時期이니 惡者勝 世界에는 善者들이 많이 밟히고 있다. 세상에는 거짓것이 먼츰 왔다가는 것이 世上이 보여주는 至今 現社會의 實狀이다. 그 후로 善이 始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原理로 지음받은 온 天宙는 이 뜻 成事에 努力하고 있는 것을 現基督人이 알지 못하는 것이 痛憤之事이다.
惡이 始作하였으니 그도 原理路程을 밟아 結實하여야만 된다. 그런고로 惡의 完成時期가 卽 基督敎의 末世時期인 再臨時이다. 世上이 절대로 없어지는 바가 아니고 世上에서 地上天國을 完成하여만이 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오시는 主도 完成主로 사람 몸을 쓰시고 오신다. 그것은 原理보아도 알 수 있는 바이다. 卽 肉身完成을 못하였기에 根本을 찾아 맞추는 時期가 末世며 審判時期이다. 卽 根本 사람, 아담 해와를 찾어야 되며 善을 찾어 터로 세우여야 되는 時期가 末世다. 그러니 惡은 自己本體의 路程으로 向하기 始作하는 時가 卽 末世다. 以上의 原理를 살펴 볼적에 하나님은 原理를 통하여 萬事를 成事코저 함이 根本意義이다.
그러므로 사탄까지 强制屈服을 要하는 것이 아니고 自然屈服을 要하며 六千年 歷史를 나오심은 全原理創造世界를 完全히 찾고저 함이니 그러야만이 原理創造世界 創造 理想体를 始作할 수 있으니 사탄까지 自由行動케 하심을 잘아러야 한다.
聖經歷史를 通하여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 것이든가 참소함이든가 예수의 시험이라든가 等等을 보아도 그 自由許諾 理想舞臺를 根本意義로 하였기에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또 바로를 강팍케 하심도 完全屈服과 自由屈服을 要하신 까닭이다. 또 이스라엘 百姓을 그 結果的 行動 如何를 갖고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신 事實은 人間이 根本 自由行動 結果를 主管함을 알려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全宇宙理想과 天宙理想을 完成코저 하여서 至今까지 苦心하시는 그 自體를 우리는 어떻게 對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心情을 아는 우리들에 있어서는 極心을 다하야 根本 創造理想을 完成하여야 할 責任을 各自가 다하여야 할 것이다.
第二 章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根本에 對하여 까지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果然 其 自體가 明白하여서 天宙의 全部를 圓滿하게 理解코저 함에서 始作이라고는 할 수 있는 事實은 自明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始作하였으며 萬物도 亦是 하나님부터라고 是定할 수 있지만 根本되는 하나님은 如何하게
始作하였으며 그 前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存在의 根本보다도 實際問題는 第一 가까운데 있는 自己가 問題이다.
現實 自己의 存在의 根本을 안 後에야 다음 問題 하나님으로 옮겨지여야 할 事實인데 自己의 存在의 根本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存在의 如何를 말한댓자 其 自體는 例를 들면 公式의 根本單位로 될 自體를 아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單位數로 있는 自體의 問題를 確定하여야만이 其 公式의 第一步 應用의 始作을 繼續하여 廣大한 基本公式과 連結도 지을 수 있으면서 其 自體의 公式도 勿論 明白하여지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먼츰 한 單位體의 公式 根本과 같은 立場에 서 있는 自我의 한 存在만 確定하면은 其他의 存在決定은 如實한 結果로서도 推測하여 그로 미처주는 根本自體를 把握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自己들이 有나 無나 하는 것을 먼츰 疑心하여야 할 事實이 根本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自己가 있다면 무엇 보아서 알 수 있는가. 良心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感覺을 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體型을 보아서인가 하는 데에서 問題는 始作되는데 良心과 感覺과 體型이 有라고 하면은 무엇을 標準잡고 말하는가를 다시금 吟味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有라고 하는 것과 無라고 하는 것은 最初의 分岐點을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가 生覺할 重要問題이다. 有하다면 相對인 無하다는 것을 聯想시키는 事實인데 사람들이 有하다는 그 自體는 무엇을 標準하고 始作케 되며 그 始作은 어느 限度까지 擴大하고저 하는가. 또 그와 反面에 無하다는 것도 어느 限度의 無를 規定하고저 하는가가 問題이다. 無하다면 實體 無한 存在는 始作點을 잡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고로 사람 自體들이 無하거니 有하거니 하는 것은 어느 한 存在를 벌써 有에 處케하든가. 無에 處케 하든가의 實在 存在를 規定지은 위에서 말하난 바를 아러야 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無한 實體에 對하여서 成立되는 名詞이다.
그렇다면 無는 어디에 한 可否存在의 根本決定을 지어주는 한 中心存在는 무엇인가가 要求되는 바인데 이 存在는 自己를 前提條件으로 規定한 基盤위에
서 始作하였기에 有無의 決定的 判決을 내리는 行例가 只今 사람들이 말하는 凡例의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事實은 自己를 中心하고 있는 事實을 生覺치 않고 他 自體에로부터의 始作點을 보고서 하는데에서 여러 가지 存在의 確定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自己가 한 無限有와 無限無와의 中間存在이며 한 公式單位體型이라는 事實을 明白히 하는 것이 今日 사람들이 질머진 課業이다.
그러므로 有하고 하는 것은 自體가 良心으로나 感覺으로나 體型上으로나 實定할 수 있는 事實들을 否定 못함으로 有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有自體인 自我는 至今 無의 始作을 결정짓는 基本行動으로 始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無를 決定한다면 그 決定한 自體가 無의 最大値를 可決하였는가 無에 대한 程度는 如有인가가 疑問되니 그 無라고 하는 그 點은 有와는 어떤 距離를 갖고 있는지 大端한 重要問題다. 卽 無라고 하는데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程度인지 또 感覺할 수 없는 程度인지 體型을 構成할 수 없는 程度인지 그 立場이 明白한 點은 如何한가 하면은 勿論 이 實在 感覺內에 屬하는 데서만이 有無의 出發點을 잡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有라든가 하는 것은 實體로서만이 問題하지말고 無하다고 하는데에 있어서 그 無는 우리가 無라고 하는 最大値가 아니고 有와 聯關을 가질 수 있는 存在의 繼續体로서 우리 感覺內로 感觸할 수 없는 範圍 外에 있는 存在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無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無에로 나 갈 수 있는 中間存在임을 알려준다. 나를 有로하는 自體를 數로 表示하면은 ① 이라고 할 수 있다면 無하다는 것은 零(0)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 ① 數字를 보아서 零이 있다고 至今 數學世界에서는 보고 있지만 이 零이라는 存在가 數字上으로는 表示되나 實際에 있어서는 零이 無가 아니고 無를 象徵하기 위한 抽象적 存在와 같은 것이라고 至今은 말할 수 있다. 卽 無에는 無限無를 限定 못하니 그 無의 中心이야 零가지고는 表示도 못한다. 그런고로 零을 잡아보면 零이라는 것은 數字上 理論上 存在라고는 認定할 수 있으나 數字上으로는 零이라고 하는 零點이 있는 位置에서 一般的으로
알려지고 있는 零과는 判異한 自體이다. 그런고로 零이라고 現社會에서 쓰고 있는 것은 有의 小形体의 것이며 더 小로써 無限大하여지는 存在의 中間自體임을 否定 못한다. 有와 無의 限界線은 즉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無限有의 始作이면서 無限無의 始作의 基礎를 알어야 할 重大한 問題가 生起는 바이다. 하나와 零이 同一點이라고 보니 無限有와 無限無의 存在의 第一 中心 據點이 卽 하나와 零線의 境界點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는 無限有의 始作의 存在며 極小有의 存在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無限無의 最大 存在라는 其 立場을 取하고 있는 自體가 卽 ① 하나인 것이라는 존재다.
하나와 零은 境界를 定치 못함.
數字上으로는 零과 ①하나와의 相異 位置를 갖고 있지만 實際에 있어서는 同一點을 離脫 못하는 共通 路線上의 存在다. 그러므로 實際上으로는 1=零이라고 할 수 있는 存在들이다.
1= 零
1= 絶大値數의 基本數이며 有의 基本存在다.
零= 無限無의 絶大値數면서 有의 無限小數의 中間存在다.
그런고로 問題되는 바는 나 한 自體가 重大 問題인데 나는 至今 어디서부터 始作하여 잡은 存在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各自의 自由로 맡기기로 하자. 卽 ①에서 始作하였으면은 그 하나가 갖고 있는 存在의 價値價를 全部 認識하여만이 되지 않겠는가가 先決問題다. 卽 無限大와 無限小의 問題보다도 其 中間自體인 하나의 存在의 規定이 큰 難關逢着이라 아니할 수 없는바다.
이 하나되는 自我를 알면 無限大에 對한 位置부터 無限小의 위치가 갖고있는 中間存在에 對한 全部를 알어야만이 自己에 대한 確實한 規定을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存在를 全部 밝혀서만이 其보다 더 큰 存在에 대한 根據를 解決할 資格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自己가 있다고 하여 놓고 無한 事實이니 無하다느니 하는바는 卽 數世界에 있어서 零이라하여 絶對無의 存在를 決定한 듯이 하고 있는 바와 同一한 生覺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가지라. 없다할진댄 無限小에 까지 倒着한 其 世界가 自己의
決定 範圍 內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無에 對한 結論은 價할것인데 그것 조차 生覺도 못하고서 그저 無라면 自己가 無라고 하는 바가 그냥 無로서 萬事를 解決하여주는 中心 存在로 되는가. 그것은 至極히 어리석은 行動이다. 有라할진대 其 存在의 價値는 絶對有까지 繼續 存在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有로 하는 自己와 無의 中心 立場의 自己에 대하여서 알려고 할적에 第一 큰 問題의 中心點이다. 卽 有로 내가 있어야 되며, 無로 내가 있어야 된다. 問題의 決定的 存在는 卽 自己이다. 이 自己가 至今 解決의 수수께기가 되는 根本問題다. 그런고로 먼츰 天宙의 基本單位라고도 할 수 있는 自己를 解得하여라. 그렇게 하므로써 딴 存在가 問題로 되는 바이다. 自己를 明白하게 解決하면은 其 以上에 대한 聯關的 事實에 對하여서는 認識할 수 있는 事實이다. 問題는 自己 하나 알고보면 하나님의 存在 有無에 대한 問題는 크게 논할 問題도 아니다. 그런고로 알어야 한다는 하나님에 對한 根據의 如何는 먼츰 被造体인 自己의 根據에 대한 實感性을 먼츰 알고 나아가면서 探究하면은 第一存在의 確實性은 自然的 意識存在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의 明白한 體驗을 實行하여 찾아보면은 其 自體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은 하나님은 絶對有에서 絶對無의 基本存在이므로 어느 面에서도 單位的 路線에서만 서서 存在를 찾으면 그 存在는 自然的으로 體感된다. 그 體感으로써 하나님의 存在에 對하여 確實한 根本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通한 共通路線으로 흐르는 無限大에서 無限小의 힘을 보아 이 힘은 公式과 같은 原理를 通하여 連結되고 있으며 其 어떤 中間立場에서라도 自己만이 그 힘과 感應할 수 있는 聯体로 平衡線上에 서게 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흐르는 그 感智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無限大에서부터 無限小에까지 聯關하는 中心 動力体이다. 그러면서 永遠을 標準하고 始作하며 나아간다. 그런고로 사람은 其 中間存在다. 이 中心存在가 完成하여야만이 天宙的 基本原理는 圓滿化를 가져오게 된다. 卽 하나님은 無에서 有에로
作用하고 사람은 有에서 無에로 授受作用 圓滿化를 取하여만이 圓滿存在으로 되는 것이 天理이며 創造原理다.
+ (無限有實體世界) +
사람
① ①
사람
ⓞ ⓞ
하나님
- (無限無 無形世界) -
이 表示圖를 보면 사람은 單位的 位置에 居한다. 사람을 通하여만이 宇宙와 天宙理想이 完成하게끔 지으셨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몸으로 지은 特有의 存在로 되어있다. 有(+) 無(-)라고 表示하면 사람은 (+)(-)의 中和体로 되었다. (-)는 靈으로 (+)는 肉體로서 合體되어 있다. 사람은 靈과 肉의 境界線을 定치 못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靈과 肉身이 合하여야만이 完全한 사람이다. 우리는 靈을 長成시켜서 靈人体를 完全 造成하면은 無의 世界까지 通할 수 있는 中間存在体다. 그런고로 本來 사람은 靈人体를 完成하여야 한다. 그러면 靈人体라면은 어떠한 構造로 되어 있는가 하면은 靈體, 生命體, 生靈體로 되어있다. 肉身에는 肉體와 肉心으로 되어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靈人体에는 生心을 中心하고 靈體를 附殖할 수 있는 基本 터를 이루며 長成하여서 生命體로 나아가 그 生命體가 되어만이 하날에 한 長成體를 가진 自體로서 生活할 수 있는 것이다. 其 生命體에다 生靈體를 이루어야 本創造理想인 靈人体로 된다.
그런데 至今까지 墮落되니 人間들은 靈體의 根本되는 生心까지 保有하는 存在가 없다하리만큼 墮落되었다. 이 人間들에게 靈體를 構成시켜서 長成하여 生命體까지로 目的하고 歷史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信, 信仰生活을 培養하는 目的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오셔서 生靈體까지 完成코저 하였으나 不信하고보니 未完成하여 生命體級까지 全人間을 長成시켜야 할 責任使命 部境이다. 그 후 生靈體는 完成體인데 再臨時부터 始作코저 함이 目的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墮落치 아니하였으면 肉身의 完成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 中心하고 生心은 그 本路程으로 靈人体 構成을 同一時에 聯合하여 完成에로 나아갈 人間들이 墮落으로 因하여 全人間에게(하날人도) 區分하여 長成시켜서 完成의 模樣으로
되었다. 第二次 예수는 長成 生命體까지 第三次 再臨하여서 完成體 生靈體를 注入시켜서 理想 靈人体를 造成하고자 함이 根本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其 始作 할터를 닦도저 하니 舊約役事가 있고 新約은 그 터위에 長成하여 全世界에 터를 닦고 드 위에다 다시금 完成의 理想 生靈體를 땅과 함께 하날까지 聯殖시켜 理想天宙 完成 目的으로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舊約時期부터 絶對 뜻을 中心하고 人間들이 侍奉하였으면 直接 뜻을 中心하고 터를 세우면서 理想 展開코저 함이었으나 不信으로 因하여 그 目的 未達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要求와 其 救援要求가 남아지는 뜻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救援攝理는 사람을 찾아서 原理想 靈人体를 恢歸하여 本 創造理想을 成事코저 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絶對有의 存在이며 絶對無의 主人公이 卽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人間은 어느 方面으로든지 極을 찾어 가면은 갈수록 하나님에 對한 各要性을 切實하게 感覺되게 하는 것이 現天宙 萬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全部가 天宙의 公路를 正當하게 설수 있는 自我를 찾으면 全體에 對한 中心問題까지 解決을 가져오는 事實은 創造하신 萬相을 共同한 中心에 屬하여 있기에 어느 곳으로 通하든지 其 中心은 其 結局의 終點을 찾으면 同一한 其 根本原理를 通하여서 作用이 始作되어 있기에 自我 自身의 根本原理로 설 수 있는 基本을 찾으면은 全部의 中心인 하나님에 對한 問題는 自然的으로 알게된다. 또한 하나님이 根本存在 하심은 實感的으로 自覺할수 있게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自己가 없다고 하면은 自己 自體로서 自己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自己 自體에 對하여 有라하면 自然的 有하신 그 根本存在 有를 豫定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하면은 自己가 有하기 前에 父母의 有가 찾아지며 父母가 有하면은 先祖의 數 十, 數百代에 繼續하여서 至今 自我가 存在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有에서만이 有가 시작된다. 無에서 無이지 有할 수 없는 것이 天理다. 現科學은 이 天理를 떠너서는 始作과 發展을 못한다. 그리고 自我 이후에는 有할 수 있는 後孫에 대한 有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至今 보이지 않는 後孫 無라고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다면 其 自體는 原理의 合格體로 完成格의 存在 못됨을 말하는 것이다. 原理的으로 보면 其 後孫은 있게끔 有에서부터 모두 萬相이 지어지였기 때문에 後孫은 必要적 한 公理路程으로 有함을 알 것이다. 보지 못하였다고 其 있어야 할 其 存在들을 否定하면은 其 自體의 否定함에 根本原理的 解決을 주는 否定이 되는가? 그렇지 않음은 누구나 다 잘안다.
그런데 無라고 否定한다면 그 存在는 天理根本을 反逆하는 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고로 天宙萬物은 全部가 原理的 有에서 始作함으로 有라고 하는 基本點에서만이 萬原理와 理致의 符合을 볼 수 있으나 無라고 하면은 其 根本을 有에서 展開키 難한 原理的 結論으로 된다. 그런고로 至今 自我라는 自體는 有無의 한 中心의 存在면서 그의 作用的 目的으로 有를 全的으로 相對物로 하기 위한 行動으로 生活하는 바는 잘 體得하는바의 事實이다.
그러므로 나 自身이 有라는 原理的 存在라는 것은 根本的으로 是定하는 바이다. 無라고 하는 存在는 事實體 有의 世界에서는 自我로부터 表示로 되어 있다. 그 自我가 卽 有無의 根據點으로 하고야 有無라는 말을 할 수 있는바이다. 그런고로 나는 有에 屬하는 同時에 無에도 찾어가는 中間存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中間存在로서 되어 있는 나에게 有無의 根本되는 하나님의 存在에 對하여 疑心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無의 根本의 位置이니 卽 創造的 原理로 보아 하나님과 直接 同一點線에 有하난 存在임을 體得하여야 된다. 自我는 有無의 中和体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中心하고 계실 神性은 나와 中和性的 關係로써 有에서 無의 世界에 展開의 路程을 通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萬一 無하다고 하는 곳에 處하여 있어서 認識한다면 나에게 有에 對한 認識은 勿論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認識할 수 있는 環境과 그 位置를 갖고 있다는 그것 스스로가 벌써 인식시켜주는 有에서부터만이 始作되는 바는 至今, 누구나 잘 알 것이다. 卽 至今 科學世界에 있어서 모든 原理와 公式을 利用하여 應用 有에로 展開케 하는 것도 즉 根本 有가 있는 原理가 存在함이 有하다는 原則위에서 만이 始作하여 目的達成으로 進級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科學이 發展할 수 있는바도 前 有的 그 原理的 保有가 基本되어 그 基本
上에서만이 그 目的 表示的인 發達된 存在를 볼 수 있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無에서 有라는 原理는 本來부터 우리가 세울 서 없다. 無라면 無이지 有가 되겠는가? 그러니 唯物論的 原理도 自然 그 末路는 未解決로 되는 것이 原理다. 無가 되는 까닭이다. 卽 始作이 無니 末도 無로 結果한다. 無하고하는 存在를 세우기 위하여는 前有 存在를 세워 놓고야인데 이 先有存在는 卽 主觀的으로 보면은 自己, 或 客觀的으로 보면은 他物이나가 벌써 先有한 事實을 決定지어 놓고 말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根本은 有에서 始作하였다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根本有라는 存在부터며 萬物의 有도 亦是 同一한 바이다. 어떤 作用의 始作은 有의 始作으로만이 始作된다. 認識할 수 있는 모든 關係的 感覺性도 存在하여 나에게 미치고 있다. 作用은 根本的 有의 作用이 延長化된 存在임을 알 수 있다. 無라는 占有位置는 視覺또는 感覺性 外의 存在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 自我인 有가 感覺하는 그 感覺的 作用은 卽 有에서부터 波及이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視覺으로 볼수 있는 圈外의 有의 存在하는 그 自體와 卽, 하나님과 우리는 聯關的 한 位에 속하여 있는 良心의 旣存有의 存在로부터 우리에게 作用되는 感覺을 알 수있는바이다.
그런고로 사람 한 나는 有無의 中和物로 되어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즉, 無我라는 位置를 찾아 들어가면은 中和体에서 陰陽分도 같은 作用을 이르키는 것과 한가지로 無認識에로 나가면 相對的 絶對有에 比例되는 絶對有의 힘과 作用의 相逢을 본다하는 것도 아러야 한다. 사람이 無我에게 찾아들어 가면은( 즉 感覺無와 認識無에로) 相距的 無의 位置에 對比되는 有의 感覺과 認識의 境地는 타나난다. 이것은 修養探中에서도 많이 體驗하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고요하다는 그곳을 찾으면 本心의 作用舞臺를 딴 無境에로 存在하는 絶對有의 感覺을 體驗하여 새로운 神奇한 認識權을 찾는 것이 自然的으로 表示되는 듯이 되나 그 原理는 내 自身들의 理想覺性을 取할 수 있으며 그 滿足感을 取할 수 있는 根本理想이 有할 수 있는 根本에 屬하여 있는
存在이기 때문에 새로운 快感이 나와 기쁨의 表示로 展開시킨 것 밖에 지나지 않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런 것을 볼 적에 우리는 有에서 處하여 있으니 有의 對한 感性이 各面에 感化되어 있는 것과 같은 理由로 되어 있기에 對 有에서부터 接하여 주는 減力에 대하여 振動感을 느낄 수 없고 또 外力 減力에 對하여 銳敏하게 使用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修養이니 祈禱니 하는 것이 미처주는 外力 減力에 대비하여 振動할 수 있는 對 減力의 存在의 位置를 取코저 하는바가 原理로 되어있다. 그러기에 無의 境, 고요한 곳을 要求한다. 그런고로 누구나 하나님이 有하다면은 無我의 境地에 찾아 들어가면 超自然 減力 絶對有의 境地가 있다는 것을 体證한다. 그것은 卽 하나님이 有하다는 것을 아는 同時에 그 根本 有의 作用과 合致한 點에 내가 서면은 내 自體에는 超自然 作用의 減力과 實感이 내 現自我와 連結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佛敎의 無我境이라고 하여 찾는 一理도 여기에 있는 바이다. 例를들면 科學世界에도 公理나 公式같은 것도 間接的으로 그 自體를 接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바로 되는 것을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이와같이 된 것은 墮落性 받은 人間임으로 이것이 要求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良心과 生心의 基本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은 萬物의 絶對單位의 根本이면서 原理의 中心이며 根本이며 모든 萬相의 單位體 中心이니 이 中心點인 하나님과 直接 通하게 되면은 絶對單位力에서 支配받고 存在함으로 生心의 長成体인 靈體를 가지면 其 單位를 直接 所有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單位야 絶對單位 하나님의 單位에 한 部分的 基本으로 있기 때문에 萬物의 모든 根本을 알 수 있는 곳으로 展開시킬 수 있는 存在가 즉 사람이다. 그런고로 道通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根本사람의 創造本境을 體得할때에 느끼는 體驗이다. 이 創造本境을 體得하는 同時에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시는 未來의 모든 事實도 알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墮落으로 因하여 未知의 存在로 處하게 되었으나 그 根本 本性心은 墮落性을 받은 肉身을 넘어서 創造本境을 隋時로 體得하려함이 根本 要求로 되어있다. 사람이 이 目的을 可能하게 못된 墮落의 存在임으로 肉身의 活動의 減力이 停止狀態에 處하는 때를 타서 本性心은 無限大의 創造本境을 찾아 活動하려고 한다. 이 事實에의 表現이 사람에게 夢示로
나타나 未來의 事實을 豫告하는 것이 卽 夢示라 한다. 그러기에 本來, 사람은 自己들이 生함의 目的과 해야 할 目的과 살어야 할 目的을 알어야 할 것이었는데 未知에 處하여 있기에 本性心은 이 어느 部分을 夢示를 通하여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墮落이 없었드라면 우리 人間은 根本的으로 알고 살수 있는 存在들이었다. 그 肉身減力이 활동할 때에는 例를 들면 흙물을 그릇에 담았는데 그것을 휘저어 놓을 때와 한가지 理由다. 그러기에 肉身活動의 減力이 寢中에는 흙물이 까라앉어 맑은 물이 위로 떠 오르는 것과 같이 우리의 本性心도 肉身減力을 넘어서 本性路程에 活動이 始作됨으로 夢示가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本心은 創造本境 世界를 通하고저 하는 것이 本 創造性品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實體 有의 世界에서 無形의 世界로 連結을 가져야만이 되게 지음받았다. 그러기에 나를 有로하면은 有의 끝은 하나님이며 無의 끝도 하나님이다. 다시말하면 無의 끝은 有요, 有의 끝은 無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中心삼고 지음받은 天宙는 한 同路를 갖고 있다. 例를들면 우리 血管을 보면 動脈이 心臟에서부터 漸漸 작아져 細管까지 屬한다. 끝은 없어지는 程度를 向하여 世紛되어진다. 그러면 細管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끝은 딴 同路인 反對作用 路程으로 通하여 根本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한 作用体를 構成하여 한 回路를 造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亦是, 이 表示와 같은 것이다. 血管이 작아진다고 하여서 無하여진다고 結論하는 것과 같은 行動의 사람들이 有無의 結論을 말하는 것과 同一하다. 그런고로 끝 部分 그 自體는 中和의 點이다. 血管도 毛細管에서 돌아오는 靜脈部分이 有하여서만이 圓滿하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動脈을 有라 하는 것과 靜脈을 無라하는 結論的 事實을 體得할 수 있다. 그런고로 有無는 하나의 有에서 始作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有無의 根本体이다. 靈은 有에서 無에로 通할 수 있는 自體다. 그런고로 靈은 有라고 하는 感覺範圍 內 存在에 屬하지 않고 感覺 外 範圍에 屬하여 有의 權位까지 自由로 通할 수 있는 特有存在다. 이 性品이 卽, 하나님이 賦與하여 준 一體가 될 수 있는 特有性品이다. 卽 하나님의 性品이다. 그러니 우리 理想世界는 참 自由世界이다. 卽 距離支配를 받지 않는 世界며 空間의 支配도 받지 않으며 時間의 支配도 받지 않는 世界이다. 그저 生覺과 同時에 結果가 現立되는 自由理想世界다. 이 世界가 하나님을 中心한 世界다.
第三 章 原理로 찾으려니 聖經은 直接敎示치 못함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創世記를 敎示할 때에 웨 根本意義를 全部 밝혀서 敎示치 안이하였는가 하면은 여기에는 敎示할 수 없는 中心意義가 있음이다. 本來 사람의 祖上인 아담 해와도 하나님의 根本意義를 아지 못하고 있는 途中에 처한 存在로써 墮落을 始作하고 보니 根本 하나님의 本意의 뜻을 알지 못하고 中途에서 墮落한 셈이다. 모세를 세워서 役事하는 그 뜻은 墮落없는 그 世界에서 理想의 恢歸을 보고저 함이었다. 그 때 모세 自體로서는 사람 祖上 아담 해와가 未完成하고만 部分은 祖上自身 亦是 아지 못하는 事實이었다.
그것은 모세와는 아주 距離가 먼 位置에 處한 뜻이므로 그 뜻은 人間 祖上될 수 있는 그 自體들이 問題로 解決할 問題였기에 모세에는 根本 뜻되는 墮落原理에 對하여 全部에 關聯되어 있는 것을 밝힐 수 없었다. 아담 해와가 더 하나님 앞에서 完成하여야만이 될 分擔 責任部分이다. 그런고로 墮落함으로 그 分擔 責任은 未及의 事實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고 사람 祖上도 사탄도 確實히 아지 못하는 事實인 同時에 未完成에 處하는 사람을 對한 하나님이 한 뜻의 課業이었다. 이 뜻의 成事를 보려면 사람 自體들이 이까지(墮落前) 처할 수 있는 한 世界가 恢歸되어만이 이 뜻은 實際로 하나님 自身을 통하여 實踐될 根本問題였기에 하나님이 이 뜻 成事할 수 있는 無墮落時代에 아담 해와보담 하날的 完成存在가 나타나서만이 始作할 部分의 뜻이니 그 自體를 모세에게 直接的으로 敎訓하지 않았다. 原理的으로 볼 적에 根本 人間祖上 되어야 할 存在들이 未知로써 되었는 事實을 모세로서 아는 것은 原理的 順序로 許與되지 않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原理的 存在될 수 있는 한 自體를 세워야 되는 것은 墮落됨으로 始作되었다. 그래 지금 聖經중에 우리 사람을 사랑하기 爲한 하나님은 未分明한 聖經으로 우리를 救援코자 하는가. 至今 그 原理되는 根本自體 卽 善에 屬하는 人間祖上이 나타날 때까지는 根本을 밝히지 않고 至今까지 나온 바를 아러야한다. 여기에 하나님은 原理根本으로 사람을 찾고저 하는 原理的 順序를 세움에서이다. 그러야만이 創造理想을 完成하게 되는 바이다. 예수 當時에도 譬喩로 敎示한 바도 亦是 原理 成事的 時期를 찾지 못하였기에 많이 譬喩로 말하였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는 譬喩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를 밝히 가르켜 말하리라.(요16장25절) 하심은 根本 이러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至今은 때가 아니었기에 世上이 勘當치 못하여 말하지 못하는 未敎示部分을 발표하게 하는 意義가 있는 바이다.
또 요한복음 16장 12-14절에 “내가 아직도 많은 것으로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 있으나 너희들이 勘當치 못하리라. 그러나 眞理의 聖神이 이르면 모든 眞理 中으로 너희들을 引導하리니 그 마음에로 할 것이 아니라 듣는것으로 말할 것이요, 또 將來일로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聖神께서 나를 榮華롭게 하셨으니 나의 것을 가지고 너희들에게 나타나리라” 하심은 譬喩로도 말할 수 없는 未來에 남아 있는 뜻이 있다 하는 것을 밝혀서 하는 말하는 바이다.
그러나 聖神이 이르러 將次 예수가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혀준다고 하신 바는 時期的 經過를 두고 成事할 뜻의 部分이었기에 밝혀 말하지 못한 바이다. 이 部分은 예수에게 있어서 時期를 두고 더 이루어야 할 部分이었기에 이렇게 말한 바다. 이런 部分을 間接的으로 敎示하기 위하여서 많이 譬喩로 말하는 理由다. 이 밝히지 못한 未分明의 事實이 때가 이르면 聖神을 通하여 가르쳐 준다는 約束이 成事를 보았기에 끝날에는 聖經上에 밝히지 못한 것 즉 너희들이 勘當치 못하리라 한 부분이 밝히어시어야 뜻 成事할 바이니 聖經 外 部分이 聖神敎示 받는 者로 하여금 發表를 보아야 할 바이므로 普通信者로다 하는 자는 勘當치 못할 部分으로 되나 聖神敎示 받는 자만이 勘當할 수 있는 部分이 나타난다는 바를 지적하여 말한 바이다.
예수 當時에 弟子들까지 勘當치 못한 部分이 예수의 뜻 路程에는 있다 함을 밝힌 말씀이었다. 그런고로 가르킴 받는 자만이 예수의 참 新婦 될 수 있는 뜻 侍奉者가 되는 것을 끝날 믿는다 하난 者들이 알아야 할 바다.
第四 章 그러면 왜 모세부터 直接 뜻 工作못하였는가
아담 해와의 墮落으로 인하여 惡의 血을 받고 나니 子孫들에게 惡의 血가 흘러 들게 되었다. 이 더럽힌 血를 받지 않을 사람이 더러운 血를 받아 사탄의 子孫으로 사람들은 順從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즉 사탄 하나부터 繁殖되어진 사람을 다시금 하나님이 取하여 뜻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더럽힌 바의 血를 맑혀야 할 것이었다. 이것을 맑히기 爲할려니 하나님을 絶對로 順從하는 사람을 세워서 사탄으로 받은바 피를 맑히기 위한 攝理를 세우셨다. 그런고로 사탄은 뜻을 反對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저 하는 사람들을 反하여 對立的 怨讐로 되어 나왔다. 歷史的으로 始作되는 惡의 血로 世上은 더럽히었으니 善의 血로서 맑히고저 해야 善이 惡에 反對하게하시는 工作을 攝理 하시었다. 더럽힌 血를 世上에서 끊으려니 前人間이 하나님께 屬하여지는 바가 問題였는데 이 工作을 돕고 나오는 絶對 順從하는 사람이 稀貴하였다. 그런고로 善한 피를 흘리게 하여서라도 善의 한 基本的 中心 土臺를 잡고저 하여 하나님은 努力하였다. 그 努力의 成果를 보아서 全世界에 惡의 血가 다 善의 血로 인하여 맑힘 받고 난 후에야 하나님은 뜻을 始作할 수 있는 것이 原理이었다.
그래서 昔日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惡한 者에게 죽게 하신것은 그들로 인하여 世上의 惡의 血를 맑히기 위하여 蕩減的 立場으로 죽게 하신것이었다. 그런고로 모세를 세워서 直接 役事하신 것은 다시금 뜻을 成事할 수 있는 基礎를 닦고저 하는 것이 아버지 뜻이었다. 이 터가 成立되고 난 후에만이 하나님의 뜻을 始作할 수 있는 바이었다. 그래 모세는 하날 成事를 準備한 立場에 처한 存在므로 하나님은 根本 뜻 工作을 밝혀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 떠러지고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살면은 惡의 血를 除하여 義로 세워 하날에 屬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工作을 사람들이 絶對로 받들지 못하여 하나님은 至今까지 뜻 成事를 보지 못하고 至今까지 世上을 대하여 攝理하시는 바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한테 따르면 떠러지는 것은 根本原理에 서니 사탄 亦是 할 수 없이 떠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사탄도 原理에는 屈服한다.
第五 章 生命樹에 對한 根本 뜻
아담 해와를 中心한 에덴 동산은 自由 理想世界인 同時에 希望의 世界이었다. 自由根本과 사랑 根本을 잃고 보니 사람에게 있어서는 墮落의 苦痛이라는 것이 全部分에서 始作되었다. 聖經에 사람은 永遠할 수 있는 生命樹를먹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 뜻 中心하고 따 먹어야 할 生命果는 먹지 못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墮落 知覺을 받고나니 다시금 理想世界인 하날 世界까지가 우리와는 直接 關係는 끊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즉 (창세기 3장24절) 그룹들이 돌며 빛나는 화염검을 두어 生命果의 道를 지키게 하심이었다. 이 生命樹라는 것은 하나님께 直接 屬할 수 있는 자체를 막아버리게 되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날을 대하여 한 間隔이었었다. 이 間隔을 열려면 原理的 存在가 나타나야만이 始作된다. 그 存在는 즉 제2 아담인 예수와 해와 聖神이 出現되어야 한다. 그런고로 예수가 땅에 와서 自己 根本 使命的 役割을 택하고 昇天하고 난 후에 聖神降臨에서 부터가 다시금 (사도행전2장 1~4절) 화염검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事實的 原理이므로 聖神은 오순절에 불(火)같은 설(舌)을 가르면서 各人에게 임하심은 이 生命樹인 길을 하날적으로부터 열리기였기에 우리는 다시금 永生할 수 있는 生命樹의 道를 찾게 되어 生命果까지 取하여 永遠理想 永生을 取하여야 할 路程이 許與되었다.
그런고로 生命樹는 예수님이고 生命果는 예수가 완전 新婦格 成事 하여만이 우리에게 許與받을 수 있는 永生要素다.
第 三 編 復歸攝理
第一 章 하나님은 아담부터 찾는 工作못하고 아벨로부터 노아까지 사탄 對한根本意義
하나님이 사람을 創造할때에 하나인 自己를 中心하고 아담, 해와를 通하여 子女繁殖을 하기 爲하여 創造하시였다. 그런고로 사람의 子孫은 하나님의 子孫으로 될 것이였는데 사탄 誘引받고나니 아담 해와는 中心에서 脫線하는 行動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탄은 非公式的으로 사람을 對하여 나타난 存在로 되었다. 本來 사람은 하나님 한분을 相對하여야 할 存在였든 것이 根本인데 至今 非公式存在 사탄이가 한 存在로서 生起게 되어 하나님을 對立하여 나타났다. 여기에 하나님은 根本 自己에게 屬하여야 하게끔 原理를 세워 創造하였는데 다른 存在 사탄이 生起게 되니 사람하나 中心하고 그 相對存在가 있게되니 根本原理와는 背馳되는 事實이다. 그래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所有할려고 하나 벌써 사탄이는 먼츰 原理存在로 對하여야 할 하나님의 存在모양으로 사람을 所有하고 말게되니 하나님은 사람 對하여 두 主人을 工作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 아담, 해와를 다시금 自己所有로 하여 볼내니 여기에 原理順序를 背馳되는 두 主人格을 成立시키는 行動이니 하나님은 다시금 이 失敗性을 取消시키는 工作을 할려고 할 때에 卽 原理대로 사람을 찾으려 할 때에 아담, 해와의 그 自體에는 벌써 失敗하였으니 그 自體에는 非公式的 사탄 所有인 同時에 또 創造原理的으로는 墮落이 없었으면 勿論 하나님의 所有者는 定한바이나 墮落되어서 그 原理的 立場은 벌써 하나님便에 屬하지 않는 根本原理 樣으로 사탄이는 사람을 取함이다.
그래 하나님에게로 自己 몸으로 지은 사람을 抛棄 할 수 없는 原理的 結託이 있으니 하나님 亦是 아담, 해와를 포기 할 수 없는 原理的 責任이 있는바였다. 이런 責任的 根本을 가진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中心하고는 直接 對하여 찾으려고 工作할려고 하려니 먼츰 非原理的 存在의 主人公이 所有함이니 하나님은 다시금 아담,해와를 두고 그의 子孫中을 通하여 이 두 主人格으로 分立시켜서 아담, 해와의 失敗를 찾고저 함이었다. 그래 아담,해와의 子孫中에는 두 性品的 結果의 子孫繁殖이라는 墮落世界의 存在를 보게 되었다. 卽 非公式的 主人性品에 屬한 子孫의 分立을 要하게 되었다.
아담, 해와는 失敗함으로 二性品格의 母體의 主人公으로 出發하니 創造原理的이 아닌 結果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래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對하여서 直接찾는 工作은 始作못하고서 그 子를 두고 復歸工作을 始作하니 卽 아담, 해와의 子인 “가인”, “아벨”에 對한 攝理의 路程을 시작하였다. 그런고로 아담, 해와 사탄
血를 받고 난 맏 가인이니 첫 生産者는 사탄에게 屬하는 非原理的 存在의 立場이다. 그 다음 存在는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立場에 屬하는 存在로 되었다. 그것은 사탄의 血를 받은 사람을 찾으려 할 때에 첫번 해와는 사탄한테 屬하였지만, 다음은 아담한테 屬하는 樣으로 해와는 行動하였으니 비록 墮落된 自體들이었지만 아담的 사랑은 나중이나 그 子孫에는 두 性品的으로 흐름이 있는바는 事實的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墮落된 自體들의 立場으로 보아도 사탄이에게서는 첫것 사랑이었으니 첫것보다 나중사랑 즉 아담사랑이 非原理 立場에는 屬한 사랑이었으나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미움이 아닌 事實이다.
또 이런 原因으로 보아도 첫 子孫은 보다 미움의 子孫이며 미움의 對象이었다. 그런고로 아담 子孫中心하고 이런 理由에 對比되는 입장은 사람 對하여 取케 되었다. 그래 사탄도 亦是 하나님 對하여서 非原理나마 自己가 所有할수 있는 한 相對의 血蹟의 子孫이 사람한테 所有되어 지는 것을 自然的으로 바라게 되어 사람을 中心하고 하나님과 사탄은 對立되어 自己 所有物 確立을 보게 됨이 事實이다. 그래 사탄도 亦是 처음에 非原理라고는 알고 있으므로 積極的으로 사람이 自己所有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自己便에 順從 할 수 있는 條件이 成立되어야만이 自己것으로 取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아담 子孫 가인과 아벨에 對하여서는 非公式存在와 公式存在와의 對立헤서 보여지게 되었다. 그래 사람은 本來 하나님의 것으로 되었기에 하나님이 먼츰 取할 수 있는 原理的 權利는 有한바다. 그러나 사탄이 사람을 誘引하였으니 間接的 態度로 나아가는 立場에 處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은 여기서 復歸工作 始作을 볼려니 不順從으로 墮落한 人間이니 順從으로서야만이 하나님의 便에 서서 原理를 찾을 수 있는 바이고 不順從이면 不順從의 主人公이 사탄 所有라는 두갈랫길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사람 子孫 가인과 아벨이 드리는 祭物은 根本的으로 順從이나 不順從에 의하여 取고저하는 二性品的으로 所有物, 決定的 表定物이었다. 두 兄弟가 各己 祭物을 드렸으나 왜 아벨의 祭物은 祝福하고 가인 祭物른 不祝福이었든가 하는 것은 첫 子孫 가인은 사탄의 血를 繼承할 수 있는 表示로 된 者요, 다음 子孫 아벨은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者이니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은 原理的으로 가인보담 아벨이니 아벨의 祭物을 받고싶음이었다. 그 外 가인 祭物은 받지
않은바이었다. 그래 이때에 가인 제물은 받지 않었지만 하나님편에 서기 爲하여 살려고 自己의 自體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을 사랑하면서 자기의 사랑받지 못하는 自體에 對하여 後悔하면서 하나님이 다시금 사랑받을 걸을 찾었으면은 卽 하나님이 하시는데 기뻐 感謝하는 態度었다면 가인 亦是 하나님便으로 取케되는 原理的인 사탄 所有하는 不順從圈內에서 순종권내에로 옮겨지면 하나님은 順從하는 子孫을 취하는 곳에 對比니 가인도 亦是 하나님이 取하게 될것이었다.
여기에 가인은 그와 反對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 對하여 怨望視하는 行動, 卽 사탄 不順從의 根本되는 사탄의 行動과 같은 方向으로 나아가 아벨을 죽이고 나니 하나님이 뜻하였든 첫 復歸原理는 가인 行動으로 全人間에 死亡의 터를 자아내게 되었다. 卽 사탄은 그때까지 가인을 自己所有로 할 수 없고, 自己所有物되기를 苦待하는 立場으로 하나님 對하여 서게 되었다. 聖經(창세기 4/7)에 하나님이 가인보고 말하기를 罪가 門에 伏야 틈을 엿보나니 彼를 防備하려는 것은 사탄이 가인 너를 삼키고저 한다는 이 根本意義를 밝히는 바의 말삼이다. 이런 가인의 行動이 있었으니 不順從 사탄은 自己便 가인 所有를 갖고 아벨을 죽이는 바는 여기에 하날을 對하여 反逆 始作의 豫告를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 行動은 卽 全人類의 祖上級에서 되어지는 이런 行動들은 全人類를 左右하는 間接的 行動의 始作이라 할 수 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사탄은 내 所有만 만들겠다는 惡意의 發露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代身 셋을 준 것(창 4/25)은 아벨의 繼承 뜻을 세워서 다시금 하나님便的 存在로 세우셨다. 不順從하는 가인, 卽 사탄은 셋을 對하여서 工作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은 本來 어두움의 不順從 血를 받고 났으니 先血的 關係로써 하나님을 따르는 것보다도 사탄을 따르는 方向으로 흘러나려 오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根本目的을 達成하기 爲할려니 原理的 順從者를 찾아서 工作繼承하여 왔든 바인데 사람들은 즉 셋 子孫까지 가인의 子孫들이 좋아하는 生活體로 드러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全人類는 하나님의 뜻을 세운 者는 漸漸 적어지고 사탄 뜻세워 따르게 되는 樣으로 墮落性 根本體인 淫行은 膨脹되었고 사탄 對하여 섬기는 것은 全部가 즐겨하는 行動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이 참을 수 없이 全 人類를 처서 없애고 이 뜻에 맞는 者의 子孫으로 뜻 工作을 計劃하시기 爲하여 노아를 세우심이었다. 卽 노아는 不順從을 反하여 하나님의 뜻을 順從하는 代表者이었다. 그런고로 노아를 두고 하나님이 根本復歸 繼承
하여서 뜻 成事를 볼려고 하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第一은 사탄 崇拜하는 것이고 第二는 淫行 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墮落의 씨가 되었으며 이것으로 通하여 사탄의 뜻 繁殖함과 같은 協助行動이니 하나님께서는 至極히 눈꼴사나운 相對 이었기에 第一 미워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人間世上에서는 男女가 사랑하는 것과 男女의 陰陽部가 부끄러운 實體며, 죄의 實體며 惡의 實體며, 또한 쌍것이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世上에서는 男女의 第一 貴한 사랑이 實體들을 쌍것으로 認定하는 바는 이 根本 墮落性 根據이므로 말도 이와 같이 하는 바는 사람이 墮落한바들 良心直告하는 바의 事實을 證據하는 바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쌍소리가 왜 쌍것인가 쌍것이면 왜 좋아하는까? 世上의 第一 貴한 것이 사랑인데 사랑에 屬하는 實體 卽 第一 貴한데 屬하는 實體가 왜 쌍것인가. 이 根本만 찾으면 人生問題는 解決이다. 이 事實은 쌍것아닌 第一 좋은 것이 쌍것으로 되었으니 卽 非原理的 出發을 가져오는 根本이 되었다. 卽 死亡이 始作되는 것의 始作의 根本이 되었으니 이런 告白으로 表示됨이라. 그런고로 世上은 非原理中에서 있다는 事實的 良心 告白의 말이 많이 쓰여지고 있다.
例를 들면은 陰陽, 左右라는말, 黑白, 至今 많이 쓰는 赤白 等等은 全部가 先后가 反對로서 쓰는바는 人類歷史 始作이 反對로 되었다는 바를 證據하는 事實이다. 卽 左니 陰이니 黑이니 赤이니 하는 말은 非原理世界 始作이 먼츰 되었다는 것을 想證시켜 주는바이다. 卽 直告대로 右左, 陽 陰, 白黑으로 白赤으로 되는 世上이 와야 만이 우리 原理 찾은 世上이요 理想 世界의 要素이다.
이렇게 사탄의 昌盛을 보니 善에 對하여 積極的으로 對 怨讐로 나아가니 昔日부터 義人들의 慘死가 많은 바는 原理로 보아 應當하다. 이와 같이 노아의 時代까지도 全部가 不順의 子息들로 全世界가 되고보니 하나님은 全滅시켜서 다시금 뜻을 工作하는 結果로 노아 審判이 되게 되었다. 그 때에 노아는 順從者를 찾었으나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전부가 死亡으로 들어갔다.
심판하고 나니 하나님은 痛憤!
根本에서 始作되었으면 自己의 子孫들이 였는데 사람의 行動이 全人間을 死亡으로 몰아넣는 結果를 가져와서 審判은 하였으나, 痛憤한 事實이다. 왜냐하면 사탄 때문이지 사람에게 무슨 罪가 있는가 하는 生覺은 하나님 亦是 生覺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런고로 다시는 이와 같은 審判은 하지 않을 것을 세웠다.
審判한 根本意義는
① 사탄을 사람한데 떼기 爲한 것
② 順從者로 되니 사탄을 怨讐視하게하기 爲하여
③ 이것을 보아 不順從者의 한 死亡의 表를 삼아 順從케 하여 不順從의 始作 없게 하기 爲하여
④하나님만이 사람 對하기 爲하여
⑤ 뜻 成事의 터를 잃지 않기 爲하여
以上과 같은 뜻을 中心하고 審判은 하였으나 根本的으로 生覺하면 하나님께 있어서 自己의 責任性을 느껴짐을 自覺치 않을 수 없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사람을 墮落하게 한 것은 結果는 自己自身이 지었었기에다 그런고로 最終局 責任은 自身에 結果點을 두고 있고, 그 다음 아담, 해와 이러니,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 찾기 爲하여 自己와 아담, 해와의 責任이니 이 工作을 始作繼承하여야 할 代身的 役割이 남어지게 하였다. 그런고로 처음으로는 하나님이 責任지고 사람을 救援할 수 있는 基礎를 닦아주어야 할 責任이었다. 그래 하나님이 이 基礎 工作 始作할려니 舊約 役事에로 들어간다.
그 터가 되면은 無 墮落 아담, 해와의 分擔使命的으로 始作되었다. 그래야만이 創造原理의 成立을 볼 수 있는 바이다. 本來 사탄이는 하나님한테 順從하여서 屈服함이 없다면 原理人(無惡人) 사람한테도 사탄은 屈服치 못함이 事實이니 하나님은 모세 時代까지 自己가 活動할 基礎工作을 하여만이 되게 되었다. 이 基礎가 되어야만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보내서 工作할 수 있겠으니 그 工作하여야 하는 責任이 노아 以後 工作이다. 하나님 앞에 順從屈服이 없다면 예수와 聖神한데도 사탄은 굴복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뜻과 攝理의 最高 目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탄을 屈服케하여 사람 祖上으로부터 사람全部에게 사탄을 屈服시키고저 하는 것이다.
(1) 第一은 하나님한테 順從屈服
(2) 第二 아담, 해와 (예수, 聖神) 順從屈服,
(3) 第三 全사람한테 順從屈服
以上의 目的을 完成하여 나중에는 사탄의 所有가 한 사람도 없게하여 사탄까지 終局 自然屈服으로 하여야 原理로 되는 바다. 그런고로 사탄은 이 뜻을 反하여 役事하는 것이 卽 아담부터 舊約時代로
舊約時代로부터 新約時代 新約時代로부터 再臨時代까지로 展開를 보게 되는 路程으로 하나님의 攝理의 役事는 歷史를 通하여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끝까지 사람을 對하여 사랑하여 나오신 바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的 責任分擔歷史가 舊約歷史고 아담, 해와 (예수, 聖神) 全人類 責任分擔歷史가 新約歷史다. 그러야만이 本 墮落前 基本点을 볼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이 再臨成事時代 卽 成約時代면서 理想時代가 이런 路程으로 復歸 始作이 하나님이 뜻하고 사람 對하여 사랑하는 中心意義다. 그런고로 사탄과 하나님은 사람 中心하고 하나님 뜻 成事로서, 사탄은 뜻 破讓가 歷史上의 戰爭으로 展開되어진 것이 事實이다.
第二 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分擔 攝理期間은 노아부터 예수까지
第一 節 노아부터 아부라함까지 攝理路程의 根本意義
審判을 通하여서 노아의 八食口는 第二次로에도 繁殖하여지는 同時에 하나님의 뜻 攝理完成으로 始作과 同時에 結果로 나아가야 할 使命的 責任의 分擔은 卽 하나님의 뜻을 믿고 順從하는 것이 노아 後孫에 맡겨진 重大課業이었다. 그런데 全人類를 審判하고나니 사탄은 自己를 崇拜하며 섬기는 全人類를 잃고나니 사탄은 뜻 부칠 곳 없이 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떠러질수 없는 關係的 因緣이 있는 以上 하나님 뜻 外에 部分 存在가 있으면 自己의 所有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다시금 하나님 한테 自由 屈服치 않고 노아의 八食口에 對하여 未練的 立場으로 自己의 뜻 所有가 될 수 있는 存在가 있는가 또는 自己가 取할 수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이나 없는가가 사탄에게 있어서는 要求하는 重大 注目点이있다. 이 어마 어마한 立場에선 者들이 卽 노아 8食口였다. 이 食口들은 하나님과 사탄사이에 있어 自己들의 根本 責任을 勘當하는 方向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卽 하나님便으로 갈려면 사탄이 따르고 사탄이 따르면 하나님이 滅하는 이런 立場에 서 있다는 바를 그때 原理的으로 안다면 모르지만 이 原理를 알지 못하는 八食口는 그저 하나님에 對한 積極性을 體得하여야 할 存在들이었는데 그런 方向으로는 如何한 結果를 가져오는가는 人間에게 特有性 自由行動結果가 左右하는 問題이었다. 노아 食口는 全하날의 期待인 所望存在요 또 사탄이 빼앗고저 하는 所望의 期待의 存在이었다. 그런 立場에 있는 存在들 卽 하나님 보시기에 義로 여기는 存在들이다.
이와같은 人間價値를 알고보니 이 사람이 그다지도 하나님을 받들지 못하였는가 하는 嘆息이
自然 나을 것이었다. 至今 우리는 이 原理로 보아 緊張한 立場들인 줄을 알 수 있는 福된 時期를 만남이 無限한 幸福스러운 것이었으나 이 時代에는 이 根本問題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한 수수께기의 問題였기에 그다지도 自己들 存在價値와 하나님에 對함과 사탄 對함에 對하여서는 그저 根本을 알지 못하고 그 結果만 보아서 하나님과 사탄의 關係가 反對性으로서 서 있다는 것만을 歷史를 通하여 알 뿐이었다.
그 時에 노아는 天地의 主人公格이면서 第二次 人間의 祖上이 되는 存在의 行動 如何부터가 하나님과 사탄이 行動의 如何를 始作하는 基礎이었다. 그때 노아의 八食口 中에 罪라는 生覺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存在들이고 하나님의 義만이 始作되어야 할 存在로써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양이나 흉내가 보여지는 行動이 없어야 할 立場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노아는 農夫가 되어 葡萄農事를 하였다. 葡萄酒를 먹고 취하여서 帳幕 內에 裸體로 누어서 잠자고 있을 때에 노아의 아들 함이 父가 벌고 벗고 지는고로 부끄럽게 여기면서 自己兄弟들까지에게 가서 부끄러운 行動의 한 表示를 하니 셈과 야벳은 衣을 取하여 아버지 벗은 것도 보지 아니하고 뒷걸음으로 드러가서 아버지의 裸體를 더푼지라.
이것이 聖經을 보면은 왜 이런 行動이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인가하는 根本意義는 오날 未解決 問題이나 그 根本原理로 볼 적에 그 事實은 明白하여지는 바이다. 이 行動은 무엇을 象徵하여주는 事實이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 至極한 미움의 行動이며 사탄 對이하여는 한便 될수 있는 아담, 해와의 벗음의 수치를 다시금 증거하며 墮落性 繼承을 表示하는 行動이며 사탄이에게는 하나님 앞에 自己의 立場을 세울 수 있는 根據的 問題였다.
卽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은 墮落된 부끄러움의 自體임을 아직 잊지 못하는 存在의 씨라는 事實을 表露하는 行動이면서 또 全人類를 審判하심도 그것의 始作으로 因한하여 結果에 到達하여 지는 바에서 나온 바를 生覺하니 하나님은 痛憤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을 보여줌인 同時에 사탄의 性品 卽 犯罪한 直後에 行動의 繼承을 證據하는 事實이니 또 亦是 하나님의 뜻하는 根本目的의 未完成要素가 繁殖함을 알게됨이 또 다시금 사탄의 起着点을 보여주는 行動이였다.
그런고로 다시금 사탄은 그 行動 開始를 보게 할 根據를 삼고 나서니 그 要求의 터를 막을 수 없이 사탄의 繁殖을 始作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行動을 直接 開始하게 한 그 存在가 사탄 便의 者이니 함을 對하여
가나안의 祖上이 되어 하나님의 怨讐가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하나님과 사탄은 對立을 보게 되어 子孫을 繁殖하니 또 다시 그 子孫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으로 흘러나가게 되었고, 노아 前과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의 뜻 繁殖에 協力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뜻 中에 품으려하는 者들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사탄한테 屬하지 않게 하기 위한 對案이 要求되는 바이다.
때 마침,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곳으로 흘러나가는 行動뿐이었다. 그것은 사탄이 즐거워하는 行動結果이니 이것을 그냥 두어 둘 수 없는 事實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言語가 하나이니, 全部가 意思가 通하여 한 곳으로 動作하는데, 全體的으로 움직이게 되니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날 便의 뜻 成事하기 위하여 도움되는 言語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바벨塔을 쌓아 사탄 뜻 協力하는 行動의 基因을 가져오니 하나님은 言語를 相反되게 함은 뜻을 反하여 行動 協助物이 言語로써 한 方向으로 全人類가 흘러 드러 나갔으니 言語를 混雜케 하여서 그 사탄 뜻 돕는 길을 막고저 함이 人間 言語를 混雜시킨 根本意義었다. 그런고로 萬若 뜻 中에서 人間이 이런 塔을 쌓았으면, 또 이 뜻 成事로 나갔으면, 言語를 混雜케 할 리 만무한 일이다.
그런고로 世上에 뜻 成事時期가 오면은 言語는 하나의 目的으로 하날적으로 始作되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 뜻을 成事 協助하야서 統一된 言語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 始作은 中心存在 卽 再臨主가 오면은 그로부터는 하나님의 言語와 創造的 主管 許諾이어든 世界主管世界는 根本的으로 復歸되어야 한다.
사탄 뜻 돕는 바벨은 分岐하는 工作이었으나, 하날 對하는 뜻의 塔은 合體하여 하나되게 하는 工作이다. 하날 뜻 中心하고 復歸된 사람들이 뜻의 塔을 높이 쌓는 것을 보고저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또 , 우리 理想의 터다.
이렇게도 하나님은 사탄 對하여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言語 混雜케 하신 것이야. 人間에게 福된 일이 아니냐! 이와 같이 안타깝게 한 사람의 罪를 누가 勘當하랴! 이렇게 하였으나, 사람은 如前하게 뜻을 멀리하여 뜻을 세워서 받들면서 거기에 誠心다하는 者들, 보기가 甚히도 드물었다. 그래 하나님은 뜻에 품으려든 노아의 子孫들을 또 다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이것을
다시금 빼앗는 役事를 始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사랑하는 相對者 偶像 商하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다시금 사탄품으로부터 빼앗아서 自己 뜻의 子孫을 빼앗긴 것을 다시 갚는 양으로 卽, 反對路線으로 찾아 세우기 위하여서, 사탄 團體 쪽인 偶像장사 데라의 아들 아부라함을 擇하신 根本意義가 있다. 그 理由는 사탄이 第一 싫어하는 바인 동시에 痛憤한 存在이었고 하나님 便에 있어서는 지극히 貴히 보는 存在이었다. 왜냐하면, 사탄품에 있다가 빠져나온 代表者요, 뭇사람의 本이 될 行動이면서, 다시는 사탄한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왔으니 들어갈 수 없는 立場을 取게하기 위하여, 아부라함을 擇하여 하나님이 뜻하시려는 딴 地域으로 引導함이 즉, 아부라함에게 要求한 것이 故鄕山川인 갈대아우르를 떠나라는 根本目的이었다.
그 때 아부라함이 하나님의 命令을 따르니 하날 대해서는 기쁨의 存在며, 사탄 對해서는 슬픔의 存在로서, 한 分岐路線을 세울 수 있는 中心存在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선 아부라함 뒤에는 怨讐 사탄이 未練을 갖고 따라들게 되었다.
第二 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攝理하신 根本意義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自己 故鄕山川과 情든 鄕土와 情든 父母에 對한 情理라든가 親戚에 對한 情理라든가 아브라함에는 큰 苦痛의 相對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路程은 이 모든 것이 問題있는 곳에는 始作할 수 없는 事實이다. 이와 같은 情은 하날 情을 成事하고저 하는데는 反對되어 直接行動 如何를 00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것을 問題로하지 않고 갈대아우르를 出發하는 그 行動은 果然, 人間으로써 讚揚하여야 할 問題인 同時에 사탄에게 대한 復讐的인 하나님 뜻을 成事하는 터의 行動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自己의 基本 뜻을 아브라함으로부터 本格的 出發을 보고저 함이었다. 사탄은 아브라함을 빼앗기고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恢歸 工作을 始作하는 同時에 하나님의 뜻 成事를 破壞하고저 함이었다.
그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祝福하려할 때 아브라함 自體에 대한 祝福보담도 뜻 中心하고 祝福하는 것이 하나님의 根本意義이다. 아브라함의 福의 機關될 祝福을 하여주며, 그로 하여금 大族屬을 이루리라고 祝福하여 주마하신 뜻을 받들어서 故鄕山川을 出發하는 아브라함 自體에는 하날의 工作始作을 받게되는 하나님 代身 뜻 成事의 基本行動의 始作은 完成되었다.
아브라함을 빼앗아낸 하나님은 自己가 하고저하는 全目的을 두고 祝福과 約束에 對한 새로운 決定的 言約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卽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決定的 言約을 세우게 된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族屬에게 잡혀간 롯을 다시금 찾아와 勝利한 後에 始作이었다.
이와같이 한바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民族과 대립케 함은 하나님 자신이 뜻을 세울 수 있는 確固한 基礎를 세우는 同時에 벌써 하나님이 미워하는 나라와 怨讐的 立場에서 하나님 便 쪽에 섰기에 決定的 言約 成事를 始作함이 있었다. 이 言約이란 아브라함의 子孫으로부터 始作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民族建設의 始作이며 이를 擴大시켜서 國家建設에로 그리하여 世界復歸의 根本意義를 두고하신 言約의 全部의 始作이 卽, 아브라함의 全 言約중에 包含되어진 根本 事實을 알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非夢似夢間에 말삼하시기를 懼하지 말라, 나는 너의 盾이다. 네가 받을 報償이 크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無子하오니 나의 相續者가 없다하니,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삼이 너의 親子息으로 因하여 後嗣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데리고 外로 나아가 갈아대, 天을 仰로 보라 하시며 衆星을 計數할 수 없는 바와 같이 너의 子孫이 이와같이 되리라 하시매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義로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슴이 이 目的을 完成키 위하여 갈대아우르에서 引導하였다 하시면서 이 땅을 너에게 주어 基業이 되게하리라 하시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삼하시기를 제가 이땅을 얻어 基業삼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있가 하니 네가 나를 爲하여 三年된 牝牛 一와 三年된 山羊 一와 三年된 牡羊 一와 산비둘기 一와 집비둘기一를 獻라 하니,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取하여 그에 쪼개어 右,左에 놓고 그 비둘기는 쪼개지 아니하여 祭壇우에다 놓고 祭祀를 드리니 그 祭物위에는 독수라가 날라서 앉게 되었다. 그런고로 여호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너의 丁寧히 알라. 너의 子孫이 客이 되어 四百年 동안 苦役하리라 하신 怒함을 보게 되었다.
이 祭物은 무슨 祭物이었는가 하면 그 後孫에 대한 全部의 祭物의 表示物이었다. 卽 其祭物이 全 하나님의 뜻이 되는 百姓을 찾고저 하는 目的이며 全人類를 찾어야 할 하나님의 根本目的을 表示한 代身的 祭物이었다. 이 祭物위에 독수리가 내렸다 하는 바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은 벌써 사탄의 侵入을 證據하는 事實이다. 卽, 아브라함 하나를 中心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할 때에 사탄은 뜻을 破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한 自身의 結果的 行動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言約祭物을 卽,
全 하나님의 目的을 두고 豫約的 祭物임에 틀림없다. 이 祭物 失敗하면은 다시금 사탄한테 侵入路程을 讓步하는 行動인데 아브라함이 全 뜻을 合意있게 獻祭치 못함은 하나님의 計劃의 뜻은 벌써 未成事 한 것을 表示하는 重大한 것이 이 祭物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 自身은 이 重大한 祭物을 드리는 自身으로서 祭物을 全部 쪼개지 못 함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그 祭物을 쪼개는 것은 사탄편 사람과 하늘편 사람이 있다는 全人類의 表示였다. 그런데 비둘기를 쪼개지 않는 바는 하나님의 所有된 子孫과 사탄 所有된 사람과를 갈라서 攝理코저하는 것이 하나님의 全意義였는데 쪼개지 않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 子孫될 約束과 言約의 成立을 보는 祭物에 完成한 成立을 보지 못하고 마는 事實이니, 다시금 그 子孫까지 사탄이 侵入할 수 있는 터를 지은 것이 始作을 보이게 되어 사탄은 自己便쪽 表示로 갈려지지 않는 祭物 비둘기를 取하려하여 祭壇 위에 내린 바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뜻한 全 目的은 사탄이가 다시금 차지하는 뜻으로서 祭物獻祭는 失敗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三大 祭物은 무슨 表示냐하면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는 眞理 目的 中心은 蘇生에서 長成으로, 長成에서 完成으로써 한 祭物을 通하여 表示한 바이었다. 卽, 비둘기를 드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 蘇生을 表示함이고, 羊을 드리라하심은 長成을 表示함이고, 牛를 드리라고 하심은 完成을 表示하는 重大祭物이었다. 萬一 이 祭物이 뜻에 合意하게 獻祭하였으면은 애급 四百年 苦役이라는 것의 生活은 이스라엘 民族에게 없었을 것이었는데 四百年 苦役이라는 것은 이 獻祭物의 重大한 失敗를 告하는 바의 事實이다. (四百年 年代意義는 나중에 論하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豫約 祭物에 失敗를 보니 그것은 子孫을 사탄한테 빼앗기는 表示로 되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子孫 中에도 사탄이 侵入할 수 있게 되었으니 根本目的은 다시금 未成事的 原因으로 基因되니 하나님은 다시금 아브라함 子孫에게 사탄 侵入의 길을 막으려니 代身 祭物은 사탄한테 빼앗기었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탄의 뜻 成事를 본 것과 같은 結果를 가져왔는데 卽, 사탄한테 祭物드린 것과 같이 되어버렸다. 卽 아브라함도 자기 所有의 根據點이 되어 全 目的 未成事를 가져오게 되니, 다시금 하나님은 約束祭物은 빼앗겼지만 아직 實體 子孫되는 것은 빼앗기지 않으려니 하나님은 不得己 한 立場을 取하여 아브라함을 따르려는 子孫에 대한 사탄의 侵入을 막으려하매 하나님은 그
子孫의 始作인 한 自體가 사탄과 하나님과의 直接問題 要求物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取하여야 하겠고 사탄은 벌써 이삭에 대하여서 取할 수 있는 豫約祭物, 代身祭物을 自己가 所有하였는 것이기에 사탄 亦是, 祭物 代身되는 實體인 이삭도 要求物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다시금 順從을 세워 하나님 便으로 全子孫을 돌리려니 아브라함에 對하여 實體 子息 이삭을 祭物로 드리라는 問題를 提起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卽 아브라함으로 모리야 山上에서 이삭을 드리라는 根本意義는 여기 있는 바이다. 그때 뜻 中心하고 順從하면 사탄은 떠러지고 하나님 便으로 屬하는 것이었다. 그래 아브라함은 順從하여 代身祭物 잃어버린 것을 實體로서 찾는 樣으로 獻祭의 命令에 順從하게 되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런 原理的 問題는 아지 못하였다.
이와같은 立場에 아브라함의 順從은 容易한 問題가 아니었으나 豫約祭物 獻祭時 失敗가 全子孫에게 四百年 동안의 苦役의 뜻을 알고나니 이번 失敗면은 말할 수 없이 큰 難한 問題가 生起리라는 것을 아는 아브라함은 全的으로 하나님의 命令을 順從하게 되어 뜻대로 燔祭로서 子息을 드리는 確固한 立場에서 사탄은 目的 相對인 이삭에게서 물러가게 되는 바의 始作을 볼 수 있었다.
그런고로 이 事實의 根本 뜻을 現下 信者들은 아지 못하는 것이나 聖經에 아브라함의 失敗한 句節을 알게하는 句節이 있다. 卽 창세기 22章 12節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에 그 아이에게 手를 대어 害하지 말라. 네가 네 獨子를 나에게 獻기를 惜지 아니하니 이제야 네가 너 하나님을 두려워 하난줄 知노라 하심이다. 이 聖經句節 中에 이제야 하는 그 句節이 卽 前番 失敗를 警告하는 同時에 뜻 繼承成事를 告함이었다. 이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뜻 路程을 찾아나가는 그 途中에는 豫約時代祭物로 失手한 허물로 받은 아브라함 子孫에게는 四百年동안 원수 앞에 苦役하여만이 本路程에 들러설것이었다.
그래 이스라엘 民族 애급 四百年 苦役은 必然的 過程이었다. 眞理를 찾으려니 眞理에는 蘇生이 있고 長成이 있고 完成이 있는 바이니 하나님도 이 찾고저 하는 뜻을 한 眞理路程이니 이와같은 意味에서 三大祭物이 要求되었다. 이 祭物的 使命의 蘇生部分은 卽 舊約時代의 表徵이니 蘇生하면은 長成 完成으로 할려하든 것이 인간이 絶對 順從치 못함으로 分立을 자아내는 것으로 展開할 것이 表徵되어 있다. 한 祭壇위에 三祭物은 한번에 뜻 成事하여야 할것이 根本뜻이었다.
여기에 蘇生役事는 하나님 責任分擔 始作 基礎를 잡는 것이고 長成은 예수 오셔서 根本復歸의 復讐의 例로 해와를 찾아야만 되는 것이고 完成은 예수를 中心하고 全人類와 合하여 또 하나님과 合하여서 全根本創造目的 達成을 보고저 함이 表示로된 祭物에 意義다. 祭物중에 비둘기는 蘇生을 表示함이니 舊約時期를 말함이고 羊은 長成이니 新約時期를 表示함이고 牛는 완성이니 再臨을 말함이다. 장성과 完成과는 함께 하려는 뜻은 사람들이 不順從과 不信으로 因하여 예수를 죽이니 再臨이라는 問題가 生起게 되었다. 牛는 完成의 表示었는데 왜 牝牛이었든가. 즉 完成할려면 해와 한 存在가 問題되는 中心點이니 牝牛는 해와를 表示하는 뜻이다.
이 해와가 卽 完成할 수 있는 目的相對이었다. 簡單한 祭物內容을 紹介하였지만 다시금 本論으로 들어가면은 사탄은 이삭의 實體에서 뜻을 세우지 못하고 다시금 其 子孫에 대하여 對立的 態度는 勿論이며 實體子孫에 侵入의 길을 찾으려고 試圖하였다. 이삭의 한 存在가 豫約代身祭物에 侵入을 보였기에 그 이삭에게도 不順從의 터는 벌써 始作할 수 있는 可能性이 잘못하면은 생길 것을 사탄이는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祭物을 自己것으로 하였든 사실이 있음으로 사탄은 如前하게 그 後孫에게 對하여 對立性을 갖고 대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삭에게 子息을 낳으니 雙胎인지라 卽 에서와 야곱이었다. 이 雙胎는 무엇을 意味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失敗로 因하여 祭物에 願치 않는 存在의 侵入이 있었든 것이므로 이 實體子息 이삭이 問題되어 또다시 찾았으나 이삭의 子息한테 대하여는 사탄 亦是 찾고저하는 한 터를 양보하였든 失手가 있었으니 그 子息되는 雙胎는 怨讐的 表示의 所有者와 하나님적 表示의 所有者가 한 胎中에 있음을 表示함이었다. 그래 에서와 야곱은 腹中에서부터 싸우심은 이와같은 根本的으로 背馳되는 存在이니 腹中부터 싸운 것이다. 子息낳으니 에서와 야곱이러라. 에서는 원수 사탄의 代表요, 야곱은 하나님 便的 代表이었다. 卽 에서는 아브라함의 먼츰 祭物의 失敗의 씨요, 다음 야곱은 잃어버린 이삭을 實體로써 찾아서 祭物까지 찾아 세우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第二次的 存在인 야곱을 通하여서 뜻을 세우고저 함은 根本이 그와같이 되었기에 빼앗아서 成事하는 양이니 하나님은 에서의 祝福을 야곱에게로 돌리는 根本意義는 여기에 有함이다.
그때에 祭物 失敗
있으면 이삭 子息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에서와 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할 존재가 生起게 된 것은 다시금 사탄을 分立하여야 하날 便과 사탄편을 完全分立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이 다시는 아브라함의 子孫한테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目的이므로 이와같이 表示的 事實로서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職分을 빼앗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피를 받은 全人類를 빼앗아 넘길 것을 豫告하는 事實이니 그런고로 이 한 事實이 根本을 밝혀주는 것인 同時에 뜻 成事의 한 表徵으로 가는 바가 되어야 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言約은 全目的의 表示인 約束이었기에 이런 意味의 한 分岐 存在가 이삭이므로 其 子孫 에서와 야곱이 사이에 되어진 事實이었다. 이러한 結果의 影響을 받고 났기에 맛 子息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지 못한 事實의 原因이나 창세기 全面에서 보여주는 事實이다.
例를 찾으면 이삭, 야곱, 요셉 에브라엘, 아벨 等等의 事實은 이와 같은 사탄 피를 받고 났기에 맛 子息은 미움의 相對이었다. 여기서 뜻 成事의 出發의 후손은 야곱을 中心하고 택한 百姓 十二 兄弟는 十二支派으로 시작의 출발은 야곱부터 시작케한 것은 根本意義로 보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삭은 하나님과 사탄이 바라는 存在立場이 아담과 같은 두 相對立場이었기에 根本出發 못했다. 卽 이삭부터 애급 出發이 아니고 야곱부터 되는 바는 以上 解說 中 原理로서 明白한 事實이다. 이리하여 擇한 하날 百姓이 되어야 할 그 根本은 애級으로 옮겨지게 되는 바는 뜻 成事의 첫 出發이다. 지금부터 하나님과 사탄과의 分立되어 復歸의 出發은 始作된다. 이것이 즉, 하나님的 分擔責任成事의 出發의 始作이라는 것을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이것이 根本이 되어 卽 標本이 되어서 長成과 完成的 使命分擔 責任者의 本이 되어야 하는 第一次 하날的으로 하나님 直接 使命코저하는 基礎는 始作함인 同時에 祭物表示蘇生過程의 發露이었다. 그런고로 애급에서부터 가나안 復歸까지는 예수 오셔서 할 基本表示工作과 같은 模樣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한 目的을 한 完成으로 볼 수 있는 한 터의 工作이니 애급서부터 솔로몬 王까지 第二次 完成하여야 할 存在가 나타나서 成事할 한 豫告的 表示로 되어있다. 卽 예수 오셔서 애급서부터 가나안 福地로가는 樣으로 우리 人間理想 復歸地로 찾어들어가는 한 使命的 基礎表示로 展開시키고저 함의 意義
를 알어야 한다.
애급서부터 가나안 復歸路程은 예수의 路程을 表示한바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根本 뜻이다. 그리하여 墮落시킨 人間 對하여 하나님이 自己自身 責任分擔 對하여 始作하는 것이 즉 모세의 세우심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代身하고 바로는 사탄을 代身하고 나오게 되었다. 모세가 擇함을 받은 原因은 원수가 이스라엘 百姓을 極度로 虐待하는 同時에 强制로라도 全滅시키고저 하는 行動으로 나가게 되어 苦役 中 원수의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죽이는 모세는 本來 애급 宮中에서 長成하였으나 애급 사람을 怨讐示하는 바는 이스라엘 子孫이라는 表示하지 않는 志操는 果然 하나님이 擇하시는 貴여운 行使이었다. 애급 宮中에서 자라 났으나 애급 사람이 아니고 하날의 百姓의 變함없는 그 자체이었다. 이 自體는 애급 원수의 모든 第一 미워하는 自體인 同時에 사랑받고 자라는 存在이었다. 이 自體가 애급 宮中에서 나왔으니 애급과는 다시 結託 안하는 存在라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그 위에 애급 사람 對하여 憎惡心을 갖고 있는 確固한 存在이니 하나님이 擇한바가 原因이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여서 애급 王 바로를 對하여 工作을 하게 하기 爲한 시작을 命令하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命令을 받게 되는 모세는 自己自身이 애급 百姓앞에 信게 할 수 있는 證據를 要求하니 杖으로 蛇이 되게 하는 첫 異蹟을 보게 하신지라. 그리하여 祖上에 現된 하나님을 알게 하여 뜻 順從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함이었다.
그 다음에는 手를 품에 넣으라 하심에 手을 품에 넣으니 癩病이 된지라. 그 다음에 다시금 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매 낳은지라. 그 다음에는 듣지 않거든 江水를 가저다가 부으라 그리하면 피가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삼하시었다.
그 다음에는 모세는 言을 要求하였다. 이와같은 射殺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려 할적에 이런 異蹟을 보여주었나하면은 하나님이 將來하시고저 하는 事實의 터가 되는 行使이니 그 表示되는 모든 뜻은 全部 예수 오셔서 할 目的成事의 한 象徵이라는 것을 表示하는 것이 되어야 할 原理的 目的이 있는 바이다. 또 杖라는 것은 代身 依支者를 表示함이었다. 卽 나를 代身保護할 것을 말함이고 全 앞길을 잡아준다는 뜻이며 또 合當치 않은 것을 치어 뜻대로 成事하게 하는 뜻이 있는 바이었다. 이것은 卽 예수가 우리의 全生命에 對하여 保護가 될 것을 말함이었다. 蛇를 보여 주심은 배암으로 誘引한 表示的 存在로 해와 役事한 것을 보여 주었으니 예수와서 배암과 같은 役事로 사탄 중에서 빼앗을 役事하여야 할 하날 蛇的 表示를 豫告하기 爲하여서 着手할 것을 意味하심이었다. 사탄이 네가 蛇갖고 했으니 나도 蛇갖고 예수로 役事한다는 것이 根本杖도 蛇되게 한 意味가 있는 바이다. 모세 蛇 예수는 사탄 뱀을 잡아먹어 勝利할 것이 豫告的 表示였다.
모세 手을 품에 넣은 것은 첫 번은 사탄의 誘引받아 사탄 품에 안긴 해와의 行動은 人間을 죽이는 役事였으니 다시금
手를 품에 넣으심은 예수 오셔서 해와를 품는 事實은 癩病과 같은 死中에서 蘇生하여 산다는 表示로 手의 病이 낳은 것을 보여줌이었다. 卽 第一次 품은 것은 死亡이나 第二次 품으심은 生命이라는 永生의 始作을 豫證한다.
江水로 피된다는 바는 水은 世上을 表示함인데 예수와서 死亡中에 處한 存在들이 예수 오셔서 피로되는 生命 注入을 始作한다는 것을 表示한 바이었다. 言의 要求는 相對 目的 成事할 수 있는 重要 責任個性体니 言을 要求하심은 創造物 全部를 말삼으로 지은 것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와서 言 相對의 理想的 實體를 다시금 成事한다는 뜻을 表示한 바이었다. 卽 言은 創造目的 物實体를 말하심이다.
아담 해와를 찾는다는 것과 全人類와 萬物을 찾는다는 意味가 있음이다. 그 때 모세가 要求하는 全部를 許諾하시고 애級으로 가라하심에 모세는 自己의 妻子를 데리고 하나님의 杖을 들고 애級으로 들어가 바로에게 請하기를 이스레엘은 나의 長子라하라.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하라. 그래도 바로 보내지 않으면 長子를 죽이라 하라하는 命令을 받고 들어가는 途中 한 宿所에서 여호와 모세에게 顯하야 모세를 죽이고저 할 때에 모세의 妻는 아들 陽皮를 벗겨던져서 死를 免케하면서 妻가 曰 당신은 피흘리는 男便이로다 한지라 그것은 割禮를 한 緣故여라. 여기에 야곱 母가 야곱과 合하여서 살리는 行例를 成事한 것이었다. 그 根本意義는 무슨 뜻인가하면은 모세는 卽 割禮를 成事못하면 死는 것이고 成事하면 生한다는 重大意味가 있는 바이다.
예수 오시면 무슨 目的이나 하면은 割禮 根本目的完成하는 實體인데 그것은 그 母親과 合하여서 만이 成立되는 根本意義있다는 것을 보여줌이었는데 妻子가 合하는 일이 없으면은 뜻 成事 못하고 예수는 死는 十字架의 死있다는 豫告的 事實을 表示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長子로 成事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問題가 모세가 生하여만이 될 것이었는데 모세 한 生命은 全이스라엘의 代身生命이고 전 이스라엘의 代身 存在라고 할 수 있는 存在이었다. 이 모세에게 있어서 割禮 없으면은 모세는 勿論이고 全이스라엘 百姓도 全部 死亡하는 表示的 行例이었다.
그런고로 모세 妻子가 割禮가 있었기에 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生死의 重要問題를 右左하는 根本問題成事의 責任을 표시한 바다. 이 立場에서 모세 妻子 合함의 큰 勝利的 條件의 成立을 봄이었다. 이 뜻을 세우지 못하였으면 모두 失敗할 수 있는 難한 問題이었다. 그런고로 이 한 모세의 妻子의 한 割禮가 全 擇한 百姓에게 對한
長子의 名分을 完成하게 하는 根本自體가 卽 割禮이었다. 이와같이 예수님도 오셔서 母親과 合力하여 割禮成事의 뜻을 成事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예수 이 뜻을 못 成事한 失敗的 根本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母親 뜻 받들지 못하였기에 예수는 母親에게 對하여 갈릴리 가나에서 異蹟을 볼적에 女人이여하신 말삼의 根本意義가 있음이라. 그에 母親 對하여서 女人이여 너와 나와 무슨 相關이 있는가 한 말삼 等等의 始作은 예수는 뜻 成事의 第一 始作의 失敗를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十字架 上 死의 始作의 聯關性을 가지게 되었다. 卽 모세가 하나님 앞에 뜻 成事할 수 없는 自己 生을 가지지 못한것과 한가지 事實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路程의 숨어 있는 原理目的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여기에 割禮에 對하여 말하기로 하다.
本來 聖經에 割禮라는 名詞가 生起게 된 것은 墮落되었기에 基因되는 事實인데 本來 해와가 사탄 피를 받고 아담까지 墮落되었기 때문에 割禮의 中心問題가 要求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아담이 主管하여야 할 해와를 主管하였다면은 墮落조차 防止하였을 터인데 해와한테 主管받고나니 墮落됨이었다. 즉 아담 陽部를 通하여 全墮落을 成事되었으니 貴任은 아담 男子에게 있는 것이었다. 이 男子되는 아담이 主管받고나니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存在로 되며 墮落의 始作의 成立을 보게한 實體는 즉 男子의 陽部이었다.
그런고로 어두움의 被를 받아들인 그 自體이니 어두움의 피를 다시름 빼는 事實을 表徵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子孫은 割禮하여만이 즉 어두움의 피를 먼츰 받아서 死케되었으니 그 自體로서 살려면 그 自體로서 死亡의 피를 빼여만이 하나님께 屬할 수 있는 始作을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割禮는 아브라함의 永遠한 規禮로 세움이었다. 그리고 割禮있으므로 主觀性을 다시금 復歸하는 男子의 資格을 賦與함이다.
割禮에는 미움의 割禮가 있고(신10/16) 肉身割禮가 있고(창17/10) 萬物割禮가 있다(레19/23). 이것은 사탐의 墮落으로 인하여 온 天宙가 더렵혀 짐을 말한다.
割禮는 (1) 死亡의 피를 빼는 表
(2) 主管性을 다시 찾는 表
(3) 根本 뜻의 子女의 길을 찾는 約束의 表
以上과 같은 重大意味를 갖는 것이 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命令하시는 根本의미하는 것을 人間은 至今까지 未知의 것이다. 또 몰라야 하는 것이 한 原理였었다. 그런고로 모세의 이 行例는 全이스라엘에게 질머진 全目的成事를 表示함을 다시금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모세 行動如
何는 예수 오셔서 할 使命的行路의 前形 表示로 그의 모든 일은 表徵된 바라는 것이 原理로 보아 알 수 있는 事實이다. 卽 하나님의 使命分擔責任의 過程은 예수의 基礎되겠으니 같은 뜻의 目標表示으로 萬事는 드러내여 나아가는 것이 根本意義였다.
모세에게 아론을 주어서 이스라엘의 贖罪的 行例의 代表者로 세우심은 모세를 協助하여 한 目的 뜻을 成事코저하는 侍從이었다. 卽 百姓의 代身贖罪責任 役割을 하심은 해와 自體로 될 聖神과 함께 예수늬 뜻을 侍從하여 人間 對하여 直接 贖罪貴任을 할 것을 表徵함이었다. 모세에게 한 代身 協助者없다하여서 아론을 준바는 아니지만 말삼의 代身을 要求하게 될 때에 아론을 세우심은 아론은 말삼 代身자임을 表示하니 말삼의 最高 問題者는 해와의 한 存在이었다. 卽 말삼 成事는 해와를 完全하게 찾는 目的으로 基因되니 즉 아론을 세워 代身贖罪하심은 예수, 해와가 合하여서 人間 贖罪의 直接 問題를 하여야 할 自己 自身의 使命分擔役割이었다. 즉 해와는 罪를 지었으니 해와로서 代身 씻는 役割을 해야 할 責任分擔이 되었으니 아론은 모세의 한 相對格者로서 百姓을 대하여 모세의 뜻 卽 하나님의 뜻을 成事하게 協助한 바는 예수 오셔서 말삼 相對찾어 뜻 成事를 잡을 것을 表徵하는 意義이다. 모세의 以上과 같은 諸條件의 成立을 보니 바로를 대하여 直接對面을 取하여 나서게 되었다. 그때 바로는 모세의 要求에 對하여서 順從치 않는 反面에 도리어 모세에 屬한 이스라엘 百姓에게 더 憎惡心을 갖게 끔 하나님은 바로를 剛爆케 할 것을 말하면서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百姓을 놓아주어 曠野에 나아가 三日쯤 여호와께 祭祀하기를 請하라 하시었다.
여기 三日路程 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前生命이 놓으느냐 안 놓으느냐 하는 問題는 三日路程이라는 問題를 걸어 놓고 始作하게 되는 基本要求條件이었다. 이 三日間이 許與 안되면은 이스라엘 全部的 目的은 始作할 수 없는 問題를 말하는 바이었다. 이 三日路程이라는 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成事하게하는 工作의 基本되는 要求條件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오셔서 사탄 對하여 三日期間에 對한 過程에 妻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이 過程을 成事할려면은 모세에게 屬한 具備條件 같은 諸條件具備를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 具備條件은 曠野試驗 通하여 그러는 사탄에게 勝利함으로 成立되었으나 그의 代身役者 아론과 같은 해와의 存在의 具備成事를 보지 못하여서 三日路程 始作 路程을 自由롭게 넘어서지 못한 原因으로 十字架 三日間의 基本的 根本은 始作이었다. 이때 예수 앞에 어머님과 合하여 뜻 成事를 중심하고 해와 한 存在와 人間들이 하날 便쪽으로 順從하였으면은 예수의
十字架 路程은 다른 方向으로 效果的 路程을 보아 사탄 對하여 積極對象의 成立을 始作하였을 것인데 그 對象을 어떻게 해서라도 成事할 責任이 예수의 責任이니 죽어서 三日 期間을 터치는 使命的 責任分擔을 完成하야 할 意味가 있음이었다.
第三 節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役事의 路程이 왜 예수의 路程 全貌되 는 理由
위에서도 簡單히 表示하였지만 하나님이 本來 지은 것이 있기에 根本 責任存在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墮落한 後에 사람 지으심을 恨歎하시었다(창세기 6장6절) 하심은 여기에 基因되는 바이다. 其 外에도 聖經에는 하나님이 後悔하시었다는 말삼도 있는 적을 볼적에(사2/18) 하나님도 後悔와 恨歎하는 原因은 自己의 몸으로 되는 人間이기 때문이다. 卽 사람 잃어버린 것은 自己 몸을 잃은 것과 한가지었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第一次 審判으로 因하야 全滅 當한 後 하나님은 다시금 恨歎하시어서 다시는 審判하지 않을 것을 宣布하심과 同時에 審判받게 된 最終局點은 自己가 지었든 人間이었는데 墮落되었음으로 審判이 生起였으나 墮落하게 한 사탄도 本來 하나님 自身이 지으신 存在로부터 始作基因이나 全部의 責任은 하나님 自身이니 사람을 다시금 찾아서 根本을 다시금 成事코저 한 目的을 두고 審判한 것이지만 다시금 찾으려 할 때에 하나님 自身이 直接 이 目的의 길을 닦기 爲하여서 노아 以後 아브라함을 通하여 모세를 通하여서 役事를 始作하였다. 卽 사람의 墮落의 第一間接的 原因은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는 아담이고 그 다음에는 해와이라는 本來 墮落시킨 直接的 原因과는 反對로 하나님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찾는 役事의 第一責任者는 하나님이 本이 되며 中心이 되어서 아담 해와가 찾을 수 있는 길을 닦고자 함이었다. 그래서만이 아댐 해와가 나아갈 直接 本으로 表示를 定하는 同時에 사탄 對한 勝利路程이 되어야 되니 이 本대로 하여서 아담 해와의 勝利할 수 있다는 길을 定하는 것과 같은 基礎를 세워 놓으려 하는 것이 卽 모세를 通하여 하나님이 役事시키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아담 代身 오는 예수는 하나님이 敎示하여 준 勝利의 本路程樣으로 사탄 對하여 第一次 勝利의 路程을 본삼아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義務가 있음이있다. 그래 예수는 하나님이 먼츰 하신 事을 本삼고 하신다는 말삼을 요한복음 5장 19절-20절에 其內容的 事實을 發表하였었다. 卽 子이 父의 行하신 事을 見外에는 其事로 自爲할 수 없나니 父께서 行하시는 것을 아들도 또 그와 같이 行하시나니라. 父께서 子를
사랑하사 그 하시난 것을 啓示하시고 또 그 보다더 큰 일을 示하시 爾等로 기히히 여기게 하심이라 하시였다.
이와같이 예수는 하나님을 本받아 第二次 勝利의 路程의 始作을 第一次 勝利路程과 같은 路程을 取하여야 할 根本意義가 있음을 알어야 한다. 예수와서는 全使命役割은 하나님 責任分擔 路程에서 보여진 사탄한테 더럽힌 바를 다 成事하여야만이 始作의 出發을 보는 바를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責任分擔을 모세를 세워 원수 품에서 뽑아내는 것과 같이 예수 와서 全人類를 찾어 사탄한테 빼어야 할 使命的 基臺를 象徵사킨 事實의 根本原理를 알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하신 길을 따라서 하야한다. 그러야 같은 目的하나를 合하게 할 수 있는 바이다. 이와같이 分擔하여 責任成事는 非公式路程을 아는 人間 우리는 切痛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예수와 聖神分擔役事도 사람 때문이었다. 이 모든 原理的 根本을 아는 우리는 全 精力을 무엇아끼랴. 이와같은 基本原理를 아지 못한 墮落人 世界에 處하였든 自我들을 알게 될 때에 그 原理의 全部가 사탄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人間이 되었으니 사탄 對하여 總攻擊하여 急速한 時日을 두고 復歸하여야 할 것을 알았도다. 이제야 참살길의 始作을 알았고 人生의 뿌리를 알았고 또 하나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報答을 하랴. 問題가 이제 나타난 뜻 侍奉이 最高問題로 되는 바는 두말할 바 없는 事實이다. 잃어버렸든 아바지는 六千年前이고 잃어버린 子息찾는 것도 六千年間에 쉬지 못하고 나를 찾으려시든 그의 存在 누구였는가. 卽 아버지 어머님의 存在이다. 이 기쁘고 고마운 消息을 널리 傳할 者 世上에 어데있는가. 찾으시는 그 모습을 아는 者 몇 名이었는가. 지금까지 아바지 對하여 춤배았고 아들로서되 子息이 아바지를 모른다는 언통함을 기리 참으신 그 앞의 心情을 누가 同情할 孝子가 世界에 어데 있는가. 이 길을 닦기 爲하여 世上에 孝子之道와 忠臣之道와 師弟之道를 미리 傳播하여 그 基盤삼고저 함이었는데 至今 그 自體들이 없는 恨歎之事를 또 몰라주는 人間이 되어지려는가 아는 者는 直接 對하여서 孝子로 멀리 對하여만이 뜻을 세울 수 있는 事實이다. 이스라엘 百姓은 하나님 對하여서 以上과 같이 三綱이라는 儒敎的 中心體로서 하나님을 侍하였든가. 그 原理를 아지 못하므로 그리함이었다. 그와 같은 關係를 敎示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으랴. 그것은 創造原理를 全部 完全히 찾어 첫
理想을 成事할려니 숨은 原理的 間隔을 두고 墮落하였기에 敎示못함은 前番 말한바와 같다. 이와 같이 알어야 할 百姓이 아지 못하고 王으로 알어야 할 主人公을 아지 못하며 師이라면 以上없는 者로 侍奉할바로 아지 못하는 원수편 對立하여 섰든 그 自體를 對하여서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운 心情이었으랴. 無知한 百姓을 찾아서 子女삼으려니 모세를 세워서 바로를 直接 對立하심이었다. 至今부터 모세는 그 使命의 첫 出發을 원사 사탄의 代辯人 바로 한테로 발을 옮기게됨이 크나큰 歷史의 希望의 焦點이었다. 모세가 바로 앞에 나타나서 거듭나는 異蹟으로 바로를 屈服하게하는 役事를 始作하였다. 바로에 對하여 十餘次에 對한 異蹟을 通하여서 바로 自身이 하나님 앞에 犯罪하였다는 告白과 함께 完全屈服을 標準하고 役事하심이었다. 하나님이 바로를 屈服케 하심은 무슨 目的이었는가 하며는
(1) 바로(사탄)가 다시는 擇한 百姓에게 生覺조차 못하게 하고저 하심이고
(2) 바로(사탄)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의 要求대로 自服하는 同時에 順從하여야 할 것을 自覺케 하기 爲하여
(3) 원수의 모든 것을 善하게 하기 爲하여
(4) 하나님을 反하는 者는 망한다는 것을 自覺케 하기 爲하여
(5) 長子의 根本 血받은 者를 쳐서 원수의 血을 滅하기 爲하여
以上과 같은 것이 원수 바로(사탄)는 自覺하여 自然屈服을 標準함이고 이스라엘 百姓에게는 무엇을 찾게 하기 위하여 바로를 剛愎케 하였냐하면은
(1) 바로(사탄)은 원수로 憎惡心을 품게 하기 爲하여
(2) 바로便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리기 爲하여
(3) 우리편에는 絶大能力 하나님이 같이함을 알게하기 爲하여
(4) 애급 대하여 이스라엘 百姓의 미련을 全燒하게하기 爲하여
(5) 애급 사람 對하여 한사람이라도 이스라엘 百姓의 情을 通하는 자가 없게하기 위하여
(6) 하나님이 미워하는 程度만침 이스라엘 百姓을 올라놓게 하기 위하여
(7) 하나님의 뜻에 一貫된 行動을 培養하기 爲하여
(8) 어떤 難關이라도 하나님은 打開하여 줄줄 알게하기 위하여
(9) 하나님을 對立하여 反對하는 者는 누구나 永遠한 원수로 알게하기 爲하여
(10) 前程의 勝利的 要素를 培養하기 爲하여
(11) 뜻을 바라 躁急하지 않게하여 永遠한 順從을 세우고저 하여
이상과 같은 意義로서 이스라엘 百姓을 오래 連帶시켜서 하나님의 바라는 條件이 具備할 때를 보기 위하여 바로(사탄)을 剛愎케 하심이었다. 이리하여 極度의 하나님을 대신한 모세와 사탄 代身한 바로와는 對立戰을 展開함이었다. 그리하여서 最後 勝利와 함께 이스라엘 百姓은 希望과 所望과 幸福의 곳 가나안 福地로 향하기 始作하였다. 이 始作은 오날 信仰生活 出發 路程한 表示的 路程이라는 것을 알어야 한다.
長子를 치심은 하나님과 사탄과의 對峠戰 展開에 失敗하는 終局에는 애급에 있는 長子에 對한 재앙을 내리심이었다. 이것은 무슨 意味냐하면은 사탄의 어두움의 血을 받은 百姓代表의 長子들은 더욱이 그의 直接的 먼츰 받은 血의 種子니 하나님이 미워하심의 百姓中 먼츰 난 者로 무엇이나 치게 되었다. 卽 사탄의 所有物 中心이었다. 이스라엘에게도 長子에는 羊의 血로 代贖하게 한바는 이 재앙을 避하게 하였음이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예수는 배암血을 받았던 百姓을 치는 自體로 오는 同時에 예수便에 屬하는 者도 代身血로 卽 예수의 生命을 받아 살수 있는 言約의 表示이었다.
모세 앞에 屈服한 바로는 드디어 이스라엘 百姓을 내보내게 되매 애급에 있는 財物을 取하여 가지고 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民族은 모세를 中心하고 出發함과 同時에 하나님과 直接生活하는 한 路中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스라엘 百姓을 아주 내보내게 된 것을 안 바로는 분하여 兵車를 몰아 이스라엘 百姓을 追擊하게
되었다. 그래 이스라엘 民族은 애급 兵車가 오는 것을 騷動하난지라. 앞에는 紅海가 가로 막히고 뒤에는 追兵車가 있으니 할 수 없이 죽는구나하고 全民族을 騷動하난지라.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 알리니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에 든 杖으로 紅海를 치라 하심에 打신지라. 紅海가 갈라저 陸地와 같이 건느난지라. 이것은 우리 過去信仰路程에 있어 사탄 主管下에서 예수 품으로 드러올적에 사탄은 바로와 같이 우리 뒤를 追兵하는 것을 表徵하는 바라. 예수를 依하고 나아가면 卽 杖로치면 紅海를 갈른것과 같이 우리로 예수는 杖의 代身으로 우리의 紅海같은 過去 世上에 苦海를 갈라서 紅海를 건느는것과 한가지로 살수 있다는 表示이엇든 事實이 있는 바이다.
그래 이스라엘 百姓이 紅海를 걷는 後에 메추리와 만나와 生水를 주어서 苦痛에서 救援하심은 예수 오셔서 우리 生命蘇生要素를 無條件으로 줄 것을 보여 줌이었다. 신曠野로부터 호렙山 盤石 生水까지의 路程은 우리에게 無條件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生水까지의 路程을 우리에게 無條件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生水를 줌이었다. 그 生命要素를 받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民族 앞에는 아말렉 族屬의 攻擊을 받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아말렉을 對하여서 여호수아에게 싸우라고 命하시고 山頂에 올라가 하나님의 杖을 들고 서니라. 모세가 手에 杖을 들면 여호수아 勝利하고 손을 내리우면 敗하난지라. 그래 아론과 훌은 石을 取하여다가 모세를 앉히우고 아론과 훌은 右左손을 終日들어 아말렉을 天下에서 除去하려니 爾는 是事를 記念하기 爲하여서 冊에 記하야 여호수아의 耳에 읽어드리라. 모세가 祭壇을 築고 其名을 여호와 닛시(我의 旗)라 하야 가로되 여호와의 寶座에 手을 置한 것이 有하니 여호아 아말렉과 代代로 戰리라 한지라. 이 事實은 무슨 意味인가하니 無條件保護받은 이스라엘 民族에 勝利 資格者로 세우고저하니 아말렉의 與戰을 보게함이었다.
이 事實은 卽 예수와서 우리 人間에게 無條件으로 사랑을 세어주시라. 예수의 生命받아 산 者에게는 원수 사탄의 한 對立을 주어 그 自體가 다시는 원수와 合하지 않게하고저 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언제나 信仰路程이 平坦한바가 아니고 혼자 살수 있는 保護 時期가 있으면 원수 對하여 勝利하여만이 될 義務가 있는 바이다.
勝利者가 되기 爲하여는 모세의 손을 들어주는 立場과 같은 條件을 保障하여만이 勝利할 수 있는 것이 原因으로 되어있다. 卽 모세는 手을 든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하나님이 품으시는 表示요 아론과 훌은 품길수 있도록 協助함이요, 여호수아는 信仰者 中心 代表者를 表示하면서 우리 自體들을 表示함이었다. 이와 같은 뜻이 成立되어만이 원수 아말렉을 問題없이
勝利條件이 成立하는 바를 表示함이었다. 그런고로 이 모든 것을 後日 第二 次 責任分擔 使命勘當者로 오는 예수와 우리가 合하여만이 勝利한다는 條件들의 要素를 보여줌이었다. 모세와 杖은 하나님의 代身을 表示함이고 石은 하나님의 寶座를 表示함심이다. 아론과 훌은 예수와 해와를 表示함이고 여호수아는 믿는 信仰者를 表示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後日에 예수를 侍하고 聖神을 右左p 두고 하나님을 받드는 者라야만이 勝利한다는 表示的 意義가 있음이다. 그리고 사탄이는 卽 아말렉과 代代로 戰하리라 하심은 石을 쌓아 모세를 앉히우신 緣故니라 이것은 아론과 훌이 한것이지만 하날과 땅을 나눠 세우여야할 立場에서 어렵다고 自己自意行事가 사탄이 하날 成事時까지 對敵할 수 있는 길을 지어주었으니 아말렉과 代代로 싸우심이라 하시었다. 이와같이 聖徒는 사탄 對하여 서 있음으로 뜻에 屬한 立場을 確固히 잡지못하면 끝까지 戰을 하여서라도 勝利하여야 할 것을 豫告함이었다.
이와같이 우리 聖徒는 아말렉과 같은 원수 對하여 싸워 勝利하여야할 責任이 있는 바이다. 聖徒를 사탄과 함께 싸우시게 하는 理由는 사람까지 全部가 사탄 主管할 수 있는 資格者되어야만이 根本이니 이런 싸움이 있게하는 바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直接指導를 받으면서 낮이면 구름기둥 밤이면 불기둥으로 引導함을 받아 시내 曠野에 至심이었다. 卽 이것은 直接품에 保護하여 引導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내 曠野山前에 留한지라. 그때 모세는 山上에서 돌아와 이스라엘 百姓에게 告하며 가라대 하나님의 말삼을 善히 듣고 나의 規禮를 지키면 祝福받아 世界에 없는 祭司長國과 聖한 百姓이 된다는 말삼을 宣布하신지라. 이 말삼은 예수 오셔서 大祭司長이 되어 全世界를 統治할 後日의 約束을 세우심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하는 바의 理想目的이다. 이와같이도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百姓은 더욱 하나님한테 合할수록 사탄은 이스라엘 뒤를 따르면서 曠野까지 따라나와 不信 不順從의 自體를 對할려고 試圖는 如前히 繼續하였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 뒤에 사탄이는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것을 아지 못하는 이스라엘 百姓은 다시금 不信 不順從이면 死亡에 處하는 것을 切切히 뼈에 세기지 못하였다. 때마침 시내 山上에 70 長老를 데리고 모세는 40日40夜를 지내면서 十誡命 말삼 石碑를 받게 된지라. 그때에 六日間은 여호와의 榮光의 雲이 시내 山을 덮더니 7日에도 여호와 雲中에서 모세에 顯메 여호와의 榮光의 形狀이 이스라엘의 目前에 火焰과같이 비치심에 모세는 그 雲裏으로 入해 四十日四十夜를 지내게 되었다.
이 期間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가장 重大한 期間인 同時에 百姓에게 가장 지루한 期間이었다. 이 十誡命 받음과 同時에 聖殿建設 始作을 보게된바이다. 이것이 가장 重要한 實體의 事實이었다. 聖殿構造를 살펴보면은 至聖所가 있고 聖所가 있음이었다. 至聖所에는 法櫃가 있고 그 우에 두 그릅이 있고 그 間에 贖罪所가 있고 또 그 앞에 聖所가 있난지라 聖所와 至聖所는 區別되어 있게 되었다. 卽 聖殿은 예수님의 한몸의 建設의 터를 表示함이었다. 聖殿으로되는 예수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表示함이었다. 그런고로 至聖所는 하날 世界를 表示함이고 聖所는 地上世界를 象徵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었다. 예수한 自體에게는 하날과 땅 完成이 한 存在로 있어야 한다는 表示를 말함이었다. 至聖所를 살펴보면 法櫃가 있고 그 우에는 두그릅이 있고 其間에 贖罪所가 있음은 무슨뜻이냐 하면 本來人間이 墮落함에 말삼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言의 理想實體인 하나님 몸인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림이었다.
아담 해와 墮落한 後 그릅들을 두어서 하나님 世界와 相隔(?)하였든 것을 表示하기 爲하여 예수오시면 하날 生命樹를 찾어 生命果를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그릅 間에 顯나시어 直接法櫃를 덮으심을 말하심이니 하나님이 그릅의 間隔을 通하게하는 것을 表示하여 이와같은 構造를 보게한바다. 贖罪所에 나타나심은 贖罪한곳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表示함이다. 이것은 卽 自身의 한몸인 예수와 聖神을 通하여 罪를 贖하신 後에 各사람의 마음까지 하나님이 계시고저 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基本터를 닦는 存在로 올 것을 말함이고 그 聖所같은 그에 接하여 안기게 되면 그도 亦是 하나님을 모실수 있는 理想을 再建設코저함이 根本目的이었다. 그때 예수 오신 後부터도 至聖所와 聖所 區分이 없게 된 것은 聖殿 쓸데 없는 바는 예수의 한몸을 象徵하였든 基本自體가 表現하니 聖殿은 無必要로되니 舊約時代의 理想은
完成함을 結論할수 있음을 表示함이었다. 그때 예수는 自己가 聖殿이라는 것을 明白하게한 意義는 여기에 有함이라. 예수오셔서 그릅으로 막었던 하날 世界와 通路를 지었고 生命果의 理想目的 達成의 始作은 全宇宙를 通하여 成事코저하는 重大目的意義를 두고 聖殿建設을 하게하였다 하심은 누구나 다잘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아말렉을 勝利한 後에 이 聖殿建設始作이라 하심은 예수를 믿는 信者들은 원수를 勝利할 수 있는 資格者가 되면 우리 信者도 聖殿 建設할수 있다는 意義를 告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全人類에게 對하여 苦待하는 最高目的이니 이 얼마나 貴한 所望의 存在였을가. 卽 누구나 하나님을 直接 對할수 있는 한몸 될수 있는 基本原理를 세우고저함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은 人間과 父子之間인 根本을 찾는 뜻의 成立이 始作이다. 이와같이 貴重한 聖殿의 始作을 보려고 모세는 山上에 四十日 四十夜를 지내는 中에 百姓들은 아론을 衝動시켜서 금송아지 偶像을 지어 심기난지라. 여기에 벌써 이스라엘 百姓들은 사탄 工作의 基礎를 지어준 行動으로 나아가 그 偶像을 自己들의 神으로 섬기난 것을 目見한 모세는 大怒하여 手에 든 二石板을 던저 破한지라. 그런고로 여기에 모세는 非法的 行動을 始作하였다. 石板들은 言을 記錄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아담 해와의 實體들을 表示함이라. 卽 石碑를 깨는 行動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對하고 있는 사탄 對하여서는 기뻐하는 行動이다. 卽 結果에 있어서는 사탄의 시킴받아난 行動에 지나지 않는 行動이었다. 그러니 여기가 하나님께 있어 크나큰 重大之事가 表現을 보는 事實이다. 卽 다시금 오실 存在에 對한 한 破壞를 意味하는 바를 表示하는 行動의 結果이었다.
이 二石板이 무엇이냐하면 自己의 몸을 表示한바이요 全이스라엘 보다도 貴한 自體인것이었기에 여호와 大怒하여 全百姓과 아론 以下 全部를 塗抹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보다 强하고 담대한 나라로 되게 하시겠다고 하심에 모세는 다시금 四十日 四十夜를 禁食하여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는 것을 돌리켜서 贖함을 받고 石板 二를 만들게한 石板에다 다시금 여호와 한테 言을 記錄받으니 前과 같이 모세에게 光彩가 發하난지라.
그런고로 다시금 뜻 繼承할바를 알게함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이스라엘 民族뒤를 다시금 이와같은 原因을 通하여 侵入의 길을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이스라엘 百姓은 모세를 反對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恨歎하여 먹을것이 없음으로 애급에서 나온 것을 말하니 모세는 會幕間에 도착하여 伏니 여호와의 榮光이 그 上에 顯아 가로되 杖로 아론과 더불어 會幕을 묶고 그 目前에서 盤石을 쳐서 水를 내어서 會衆과 牧畜에게 먹이게 하라하메 여호와의 命대로 모세는 其 目前에서 杖을 들며 갈아대 悖逆한 百姓들아 我言을 들으라. 우리가 물은 此 盤石에서 水을 내게하여 너희가 飮케 할려고 한다하면서 모세는 杖으로 盤石을 二次나 처서 水이 더 많이 나오난지라. 이것이 가데스에서 한것이었는데 그 때에 여호와 모세와 아론에게 謂시기를 너희가 我를 信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子孫의 目前에서 我를 聖케하지 아니함으로 너희를 引導하야 我가 너희에게 베푸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 이스라엘 子孫이 여호와를 向하여 爭매 여호와 自己의 거룩함을 顯심으로 此水을 무리바라 하심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 들지 못하는 行動이 卽 므리바 水로 因함이었다. 이로 因하여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根本意義였는가 하면 盤石한번 打것은 許諾된바지만 두 번打것은 許諾하지 않은 일인 同時에 또 許諾할수 없는 犯罪이었다. 盤石한번 打라는 것을 許諾하는 바는 너희가 順從하고 信지 못함으로 墮落하여 하나님의 몸되는 實體에 사탄으로 侵害받아 하나님의 몸을 破하는 行動의 始作을 보았기에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盤石을 말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면 卽 하나님의 몸의 表示다. 고린도전서 10장4절에 盤石은 곧 그리스도라 하심을 보아도 盤石은 하나님의 몸인 同時에 그리스도를 말함이었다. 그런데 한번 打한 바를 容恕한 바는 아담이 不順從으로 말미암아 破한 것을 表証하는 바이었기에 하나님 自身의 代身 몸의 表示인 盤石을 打라고 하심이었는데 意外에 두 번을 打한 것은 한번은 意外의 것의 行動인 同時에 사탄이 다시금 하나님의 몸을 치는 表示的 行動을 함이었다. 한번더 打한 것은 모세가 치섰지만 사탄이 打것과 같은 行動의 結果로 되어지었다.
이 表示的 實事의 失敗는 다시금 石板과 함께 破함을 받은 行動과 같은 바이었다. 石板 二은 다시 찾을 수 있는 예수와 해와의 表示이므로 다시금 찾어서 세울 수 있으나 盤石은 石板의 根가 되는 하나님의 根本되는 바를 表示하는 바의 몸이었다. 그런고로 實體 몸과 根本 몸을 犯하는 犯行이야 사탄에게 있어서는 다시금 勝利할 수 있는 行動의 基礎를 不順과 不信한 結果로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 앞에 犯한 모세와 이스라엘의 罪는 사탄의 터가 되는 始作인 同時에 다시 보내시어 第二 次 責任分擔 使命者로 오는 예수까지에 對한 未完成의 한 表示的 根本實體를
犯하는 行動이 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의 不順과 不信은 예수까지 다시금 打수 있다는 根本原理가 始作됨이라. 이 무서운 行動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이 行動은 즉 하나님만 앞에서 한 바가 아니고 사탄 앞에서 하였기에 이와같은 사탄의 기쁨의 한 勝利圈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 百姓 對하여 侵入의 基臺를 잡고 侵入할 수 있는 行動이 始作됨으로 이스라엘 民族 앞에 蛇을 遺받아 물리게 하게 한 것은 다시금 그 墮落시킨 本體의 侵入한다는 것을 表示하여 준 바이었다.
이 蛇에 물린바를 無事하게 되려면 火蛇을 지은 것이 旗等上에 있는 것을 보여만이 나옴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表示하여 준바이었다. 그런고로 모세가 盤石 두 번 친것이 卽 하날蛇的 예수의 自體가 侵犯當하여 死케 하는 行動의 基因을 許할수 있는 原因이 됨이러라 하는 表示였다. 이것은 卽 不順과 不信의 結果의 膳物이니 이것을 防備하려면 무엇보담도 實體인 예수 앞에서 順從과 信는 것 外에 要求되는 根本이 없게되었다. 그런고로 不順從 子孫들은 배암 사탄한테 便한바되어 曠野에서 全滅하게 한지라. 그런고로 가나안 땅은 信과 順從한 者만이 基業받을 곳이라는 것을 表示함은 우리 理想國家로 不順從者와 不信者와 恐怖者는 못가는 곳이라는 것을 象徵함이라.
乳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바는 가나안 福地는 우리 本理想 하날 나라라는 곳을 表示하여 준바이다. 모세가 死는 것은 不順으로 인한 失手로다. 이와같이 예수도 其 結果를 보리라한바를 알어야 한다. 이스라엘 民族이 가나안 땅에 드러와서 基業받게 될 때에 가나안 民族을 물리치는 役事를 始作하여서만이 基業地를 찾게됨이다. 모세가 失手로 因하여 여호수아가 뜻을 세움이었다. 이것은 盤石 두 번친 연고니라. 여호수아는 예수의 한 表示的 存在도 되면서 모세의 뜻 成事者도 된다. 하나님의 全 뜻 成事的으로 보면은 모세부터 예수까지매 여호수아는 예수로 象徵한바고 모세한 뜻 中心하고보면 第二 모세 뜻 成事者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오셔서 勝利하여야할 基礎인 하나님的 責任分擔路程이니 예수 世上에 와서도 卽 하날나라 建設中에서 원수와 싸와 基業作定이 남어 있음을 表示함이었다. 師士들을 세워서 役事하여 基業을 完全成事할수 있도록 協助하심이었다. 師士後에 王을 세우심 王으로 그의 目的을 達成할 수 있기에다. 이와같이 예수 오시기 前에 벌써 예수 오시면은 直接王으로 설수 있는 基礎工作이 있다함을 豫告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이 勝利한 後에 사울王을 세우심은 누구를 表示함이었나하면은 第一次 아담格者의 王位格을
表示함으로 失敗도 그 原因을 表示한바다. 다윗 王을 세워 하나님의 權勢를 드러내고 그 子 솔로몬은 榮光의 王으로 聖殿 完成王이라는 것을 表示한바는 예수 오셔서 뜻 成事하여 權勢로서 榮光으로서 本뜻 聖殿完成理想이 展開될 것을 表徵한바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目的을 完成하여야 할 使命的 課業을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 百姓이 믿지 않고 順從치 아니함으로 예수 自身의 死게 함을 보여 하날的으로는 榮光이요 땅的으로는 權勢로 成事할 全根本理想을 未成事하고 갖기에 다시금 오시겠다고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이와같은 하나님的 第一次 責任分擔 勝利路程에서 사탄이한테 侵犯을 받았기에 行動의 侵犯은 예수로 하여금 第二次 成事責任使命 分擔을 未成事케하여 다시금 實體成事로서 오지 않으면 안될 重大課業인 榮光王으로 나타날 수 있는 터를 예수는 權勢王格으로 사탄 對하여 勝利하여 全人類를 根本子女되로 百姓되로 復歸하여야 할 責任이 남아 있기에 再臨하신다는 根本目的이 있음이었다. 再臨이라는 것은 하날 슬픔의 한 事實이고 사탄이 기뻐하는 行動의 發露의 結果이었다.
그리하여 예수오셔서 靈的으로 이 舞臺를 世界舞臺로서 擴大하여 靈으로 全人類를 찾어서 根本터까지 卽 墮落 사람 部分까지 靈的으로 끄러 올려야할 責任的 使命을 聖神과 合하여 成事하여 다시 몸으로 成事의 터를 세우심이었다. 이런고로 靈먼츰 成事하고 肉身成事코저하여 남어지는 바가 目的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肉身몸을 쓰고 再臨하여야 된다는 바를 아러야 한다. 사탄 對하여 權勢로 찾어 榮光을 누리어야만이 根本目的이 完成하는 바이다. 이것을 全世界的으로 한 主管下에 成事할려고 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며 또 根本 創造理想이었다.
그런고로 世界에서 예수를 中心한 國家들이 權勢로 사탄 對하여 勝利하게 되면 榮光王 再臨主가 나타남이 멀지 않음을 表示한다. 예수가 사탄 對하여 全世界的 大勝利의 한 分水嶺 戰爭이 卽 審判 時期이다. 其 後 再臨主는 사람을 갖고 榮光王 格으로 나타난다. 그런고로 예수 와서 未成事 部分을 完全히 達成하여야만 예수의 要求와 目的이 完成할 것이다. 이 舊約에 結果인 三大王 卽 사울王과 다윗王, 솔로몬王들은 全部 하나님의 攝理的 全部를 表示한바의 王들이다. 사울王은 墮落케 하여 하나님 反하는 아담의 表示가 되고, 다윗王은 예수를 表示함이 되고 솔로몬은 再臨主를 表示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直接的으로 責任分擔의 한 路程은 第一段階를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最高目的인 하나님이 再臨할수 있는 聖殿造成한 根本完成意義는 한 成事를 보았으나 全이스라엘 百姓과 하나되는 것이 至今
以後의 한 사람 對한 要求의 對象이었다. 그것은 聖殿에서 要求하는 卽 하나님이 要求하는 全規例가 이스라엘 百姓全 生命의 基本이면서 全財産의 基本이며 國家成事의 基本이며 理想完成의 基本이었다. 이것은 卽 이스라엘 百姓에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貴한 存在가 聖殿을 높이면서 뜻 成事를 基礎잡아야 할 重大義務가 남아 있음이었다.
여기에 聖殿成事하여서 예수와서 한 基臺를 成事할 수 있다는 表示的 成事는 보았으나 百姓으로 하여금 聖殿 뜻 즉 하나님의 言이 全守行의 始作이 完成부터 예수와서 뜻 成事할수 있는 聖殿될수 있는 第二使命的 準備의 터를 各自가 닦는 것이 舊約歷史가바라는 所望이었는데 全 百姓은 어려우나 너무나 하나님과 合함에 繼續하여 나아가여야 할 義務를 分擔하시었다.
그리하여야만이 예수와서 傳하는 바의 福音에 順應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聖殿에서부토 우리는 한 分聖殿 建設理想을 造成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承할 수 있는 터를 成事하여야 할 使命段階가 즉, 솔로몬 王以後에 이스라엘 百姓이 질머진 근 重大目的이었다. 그런 反面 사탄은 이스라엘 百姓들에게 妙한 手段을 하여서라도 하나님이 直接 取하여 나오는 그 뜻 成事의 길을 分裂하고저하여서 여러 모양으로 不順과 不信의 씨를 찾어서 이스라엘 百姓에 對하여 侵入의 魔手를 뻗치려는 試圖에 强硬히 對峠하여서 하나님 便에 더 깊이 서서 나아가야 할 立場임에도 不拘하고 王으로부터 百姓은 淫亂의 神의 根本인 원수를 섬기는 方向으로 나아갈려는 百姓을 또 打여 覺心케 하여 오면서 가진 手段을 다하여서 이 百姓을 保護하여 왔는바이었다.
그러나 그 心情을 알고 안타까하는 者는 漸漸 그 뿌리조차 보기 難하게 聖殿을 더럽힌 行動이 몇번이었든고 하나님은 聖殿을 세워서 뜻 成事基礎의 表示는 完成한 目的基本을 잡어서 約束은 始作하였으니 그만 둘수 없는 責任感 그 外 사탄은 氣勢堂堂하여 하날뜻을 破壞하는 그것을 볼적마다 功드렸던 이스라엘 百姓을 破棄할 수 없는 事實이다. 破棄하면 全部가 死亡의 苦에 삼켜질 것이며 하나님 亦是 不安할 根本意義를 避할 수 없는 事實이니 아모리하여도 그 뜻을 成事하여야 할 바가 하나님의 課業이니 先知들을 세워서 그 뜻을 百姓들이 聯和할 수 있도록 聖殿 뜻 維持를 繼續하여 왔든바이다. 그런고로 그 뜻 根本目的은 예수 한 存在가 中心이었다.
그 다음은 예수께 合하여 한몸되어 第二次 예수 存在와 같은 繁殖理想目的始作의 全部가 이스라엘 百姓行動 如何로 基盤을 잡을 수 있는 바이니 얼마나 아바지 뜻에 안타까운 心情이랴.
그런고로 聖殿지키면서 하날 뜻을 받들 수 있는 周圍工作을 繼續하면서 基本되는 自體인 메시야를 보내여서 뜻 成事할 最高目的을 이스라엘 百姓에게 豫告하여서 그 뜻을 받들 수 있는 그 路程을 지켜나가게끔 하여서 先知者를 通하여서 메시야 보내실 것을 豫言하여 이스라엘 百姓을 刺戟하시었다. 그러나 그 뜻을 바라면서 十數百年 동안을 繼續하면서 勸告하여 왔든 바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스라엘 百姓이 積極協助못하여서 이와같이 뜻 成事의 時日을 延長 시켜왔든바이었다.
메시야 約束을 받고 바라는 百姓은 躁急하게 바랐으나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實踐에 對하여서는 忘却하고 自己의 要求들만 바라는 그 自體는 墮落의 血을 받은 悖逆의 百姓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리 참으시면서 메시야 오기 前에 對한 期間도 알려주어 그의 바라는 希望性을 높여주어왔다. 메시야 오기 전에 먼츰 그의 全目的을 받들 수 있는 準備工作使命者로 오는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約束하여 그 時期的 限度를 보여주었든 바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은 全部가 메시야 降臨이 全 바라든 所望으로 그를 生活內로서 뜻을 찾어 나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은 聖殿中心하고 메시야 所望이 한 目的으로 바라오면서 希望을 높이하여 自然的으로 自己들의 準備를 繼續하여왔든 바이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百姓과 合하여서 基礎工作과 함께 메시야를 世上에 보내주어 그들의 所望을 成事하여주는 同時에 自己의 目的實行의 한 기쁨과 期待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願하시는 메시야 보내주면 全 이스라엘 百姓은 生命代身 貴하게 알면서 그의 全 周圍에 대한 團束을 지어 聖殿理想을 실현코저 함이었는데 그 뜻을 아는 者 몇名이였는가? 그래 하나님은 한 所望을 갖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時期는 끝마추어 第二次 責任使命分擔의 行路를 잡아주고 攝理繼續하여서 自己몸으로 지었든 아담 해와의 使命的 分擔成事路程으로 옮기기 爲하여 오신바가 즉 예수였다.
예수는 第二 아담이다. 聖經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아도 로마서 5장 14절을 보아도 예수는 第二아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祖上 아담 해와가 墮落시켰으니 原理되로 自己들의 犯한 責任使命을 다찾어 復歸하여야만이 根本뜻을 成事할 수 있는 創造理想이 됨이었다.
第三 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대한 根本意義
第一 節 地上攝理 路程에 대한 根本意義
舊約時代의 全目的 終結은 예수 한분에 基因하며 그의 完成的 使命도 예수 한 存在가 中心이었다. 聖殿을 세우기 爲한 行義의 路程은 舊約時代의 한 中心路程이었고 그 路程脫線은 不義라는 死亡의 始作이라 한 것은 잘아는바다. 예수 한 存在의 價値는 卽 全 이스라엘 聖殿 + 이스라엘 百姓보담도 貴한 한 存在이었다. 卽 四千年 歷史를 通하여 하나님이 攝理한 結實의 自體가 예수였다. 왜냐하면은 하나님 全天宙目的은 예수로부터 다시금 찾는 價値의 存在니 이 모든 것보담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 貴한 存在이었다. 예수 完全히 살아서 天宙살고 하나님 完全히 살며 예수뜻 成事하여야 하나님 뜻 成事라는 한 中心點의 存在가 地上 예수였다.
하날 成事로 예수 하나로부터 始作이라는 原因은 더 말하지 않어도 잘 알줄안다. 이 天宙의 中心點 예수의 한 存在가 地上에 오는 바는 地 아니면 뜻 成事 못하는 하나님의 創造原理의 中心地가 卽 地上이었다. 地上에서 사람 祖上 아담 해와는 墮落하였으니 땅 中心하고 復歸하여 그냥 하나님의 萬世 前 理想 卽 創造理想을 原理되로 成事할 수 있는 條件成事를 보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땅 없으면 하날은 未完成하여만이 하날 뜻 圓滿成事하고저 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니 모두가 同一한 基点上을 分離할 수 없는 理由는 한몸된다는 基本因果로 되어 있기에 이와같은 貴한 한 存在가 예수인데 이 예수를 보내기 前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마 하심은 예수한테 사탄으로부터 被害를 받지 않게하기 爲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어 이 根本自體 오신 다음에 前이스라엘 百姓의 大歡迎 받게하여 全 百姓은 예수한분 만으로 無限한 榮光이며 그들의 자랑으로 信과 侍여야할 使命的 責任들을 다할 수 있는 具備條件을 지어 놓기爲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주마 하신바가 그 目的이 있는 바이었다.
이스라엘 百姓 對하여서는 直接引導하여서 뜻 侍奉으로 培養하였지만 世界的으로는 하나님은 全人類에게 모실수 있는 工作도 歷史的 聖人들을 通하여서 東西洋에 攝理를 하여 合成化 할려고 하는
뜻 成事 豫備 工作도 始作케 하심이다. 其 使命的 代表 人物들이 卽 孔子며 釋迦이었다. 또 哲人 소크라테스 等等의 良心的 道를 중심한 善을 標準하고 敎示케함도 그 根本意義였음을 알어야 한다. 어느 宗敎든지 근본을 善한 神을 標準케 함은 卽 하나님이 攝理하시는 目的을 根本하고 있다는 바를 明示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根本 뜻 成事하면은 그 自體인 가르침들도 한 根本上에서 總合을 보여야 되는바도 原理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한 存在의 理想中에 뜻 中心이니 全 하나님의 理想을 完成할 根本体이니 예수의 뜻 成事時는 全 天宙는 한 中心에서 起動되어야 한다. 宗敎도 經濟도 科學도 合하여 한 基本上에 起動될 바이다. 그런 目的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찾어 맞추고저 함의 根本意義가 있다. 이와같은 크나큰 使命的 中心 存在의 降生과 함께 온 天宙는 큰 福音의 消息을 보았다.
하날은 勿論 예수의 뜻 成事를 바라는 바 그 땅은 예수의 앞에 指導받고저 함이 요구이었다. 예수 한분이 모든 生命의 근본이며 解放의 主人公이었다. 그것은 卽 사탄 世界인 非公式世界서 原理世界 예수의 世界에로 建設目的의 完成의 要求가 예수의 할 責任인 同時에 우리는 그에게 順從 信從 侍從하여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땅의 백성이 질머진 責任使命이었다. 이 責任의 要求를 成立할려니 엘리야 와서 할 使命全部는 全百姓 合하여서 엘리야와 合心一體가 되어서 뜻 圓滿成事고저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은 잘알고 있는 昇天한 存在였다. 그런고로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올줄알았다. 昇天한 엘리야 언제나 오실까하고 바라는 데는 하날 向하여서 바라보는 것이 中心으로 되었다. 卽 하날로 올라갔으니 하날로써 나려올줄만 바라본 바는 事實이었다. 昇天한 엘리야로 그 當時 第一 貴하게 바라는 한 相對로 된바는 메시야 때문이었다.
메시야를 모실수 있게 하여주는 바도 엘리야니 엘리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必然的 要求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날로 내려오니라고 바라는 者는 至今까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유대교적 信者 等이다. 메시야로 왔든 것은 事實이매 至今은 全世界的으로 歷史를 通하여 確固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當時에 있어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生覺할 수 없는 存在로 取扱되었든 바는 聖經보아 잘알 수 있는 바이다. 卽 바리세 敎人과 書記官들은 예수 對하여서 몇번식이나 묻기를
그대가 메시야면 엘리야는 왜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는 어데왔는가? 하면서 예수 對하여 反問한바는 自己들이 歷史的으로 바라는 事實과 符合하지 않은 事實을 告白하는 것을 聖經에서 많이 볼수 있는 바이다. 果然 當時에는 참말 믿고 順從할 수 없는 바이었다. 메시야라는 그 存在는 그대들이 잘아는 요셉의 子로서 집에 뭇치어 木手業으로서 어제날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存在이며 그 內容內幕까지 잘아는 그 自體이며 生活體型으로 보아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그 自體인데 어디 그 存在가 自己들이 바라는 理想한 中心存在라고는 生覺하는 點에 하도 먼 距離의 存在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보이었다. 우리가 바라든 그 存在는 千數百年間 約束의 存在요 希望의 存在든 自體가 예수라하니 이스라엘 百姓은 무슨 영문인지 큰 患難의 한 存在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메시야를 바람은 全部 뜻 中心하고 바라는 것 보담도 먼츰은 自己를 中心하고 바란바는 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날줄로 알았다. 그러면은 自己들의 메시야 오면 한 조각의 食物이나 居處할 房이나 衣服이나 그 中 한가지라도 準備해놓고 베들레헴을 向하여 먼츰 무슨 色다른 消息이나 있는가 하여서 苦待한 者 萬一 있다면은 메시야 誕生도 알았으리라. 그런 存在조차 없었다는 事實을 볼때에 그들의 메시야 苦待는 벌써 全部가 自己 中心이었고 自己들이 메시야의 힘을 비러서 좀더 좋은 것을 바랐든 것이 事實이라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各自 各自는 自己들이 理想에 符合하는 以上의 存在로 바랐다는 其 立場에 있을 때 예수란 者가 出顯하여 너희들의 理想의 存在라는 宣言은 하도 너무한 同時에 憤慨할 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果然 예수는 肉身쓰고 나니 自己들과 同一樣式으로 살어왔고 또 至今도 變함없이 同一한 樣이니 果然 그 自體에 對하여 疑心하는 바 當然之事였다.
이와같은 예수를 對하여서 더 疑心케 된바는 엘리야가 前提問題의 存在였다. 自己들이 엘리야라고 하는 그 者가 왔다면 예수니 메시야니 如何튼 問題는 解決인데 엘리야도 오지 않고 메시야 왔다니 그 어찌 信任할 수 있으랴! 지금 우리는 바꾸어 生覺할 必要를 느끼면서 昔日에 이스라엘 百姓을 辱하여 되는 問題다. 그러면 至今은 예수 卽 메시야가 萬民의 救主요 이스라엘이 希望한 中心存在라는 것은 歷史的으로도 認識過程으로 나왔으니 예수는 메시야며 뜻하신 豫言의 實體라는 것을 알며 그 前에 올 엘리야도 왔었다는 바를 世上 敎人들은 다 아는 事實이다. 卽 엘리야는 왔는데 洗禮요한 이라는 것을 歷史로서
認定하여주는 聖經을 보아 아는 事實이다. 또 예수는 엘리야가 왔으나 任意로 待接하였다고 하면서 福音書에 洗禮요한을 指摘하여 말한 바를 보아서 아는 間接的 知이었다. 果然 그 當時의 立場을 바꾸어 가지고 生覺하면은 至今은 果然 메시야로 信 侍 順從을 할 者 몇 名이나 될까? 지금 現敎人들이 바리새 敎人信仰 만치도 못한 者 많은 이 때에 生覺할 問題이면서 念慮할 重大問題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어찌하여 洗禮요한이 엘리야가 되는가 그 根據는 무슨 뜻이며 하나님이 攝理하는바는 무슨 意義를 두고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고는 洗禮요한이를 보내였는가 하는 問題의 根本을 먼츰 알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根本意義를 밝히지 못하는 現實世界가 하날이 攝理하는 뜻의 侍奉을 完成할 것인가. 지금은 末世라고 하는 때이니 聖經 中에 未知였든 事實이 明白히 되어야만이 聖經目的을 끝내고 再臨主를 迎接할 수 있는 決定的 關門을 삼을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런 重大視 되는 未知의 根本을 밝히기로 하자.
第二 節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根本意義
하나님이 根本 뜻을 成事하시려 할 때에 그 뜻 成事에 제일 要點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外 사탄 存在가 有한 것인데 이 存在가 하나님의 根本 뜻을 破壞하였고 至今까지 敵으로 나와 뜻을 成事하지 못하게하는 存在가 있기에 큰 重大한 問題가 된다. 萬一 사탄이 없다면 뜻 成事는 問題되는 것이 아닌데 사탄이 있어서 人間을 대하여 自己의 所有圈外로 보내지 않으려고 極性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對에하여서 役事를 하여나옴으로 하나님의 뜻의 成事는 歷史로 延長을 거듭하게 하여 온 바이다. 이 사탄이를 全幅的으로 屈服시켜서 뜻을 未成事게 하는 工作이 없도록 사탄 全滅을 期하는 바가 要求되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根本 뜻은 뜻을 防害하려는 사탄을 뜻의 路程에 없게 하고저 함에 根本 뜻 中心이었다. 그런고로 이 根本 뜻을 成事하려고 메시아를 보내기전에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反對하는 사탄이를 屈服시켜 다시는 예수의 뜻(메시야의 뜻) 成事 路程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工作이 먼츰 問題이었다.
이 問題를 解決할 責任者로 보내마 하신 存在가 卽,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잘 아다싶이 하나님앞에 혼자서 사탄 全部하고 싸운 最勝勢者이었다. 엘리야가 要求하는 當時의 最高 目的은 사탄 全滅의 目的이었다. 다시는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막는 곳 없
게끔 바라든 바가 엘리야가 바라든 目的이었다. 그 目的이 卽, 하나님이 바라는 뜻 成事 路程을 두고 바라보는 目的과 같은 目的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神(사탄) 八白餘를 滅한 者이며 뜻 成事 路程을 完成 할 수 있게 하는 사탄 대한 重要存在 였다. 엘리야의 目的은 完成하였는가 하면은 그 當時 사탄 대한 目的은 未完成하였다. 왜냐하면 다시금 사탄이 侵入을 보아서 예수앞에까지 侵犯할 優廬性이 있음으로 다시금 이 사탄에 對立하여 엘리야가 바라는 根本目的을 完成시켜서 예수 앞에 사탄 自體의 踪蹟이 없게하기 위한 代表者를 보내어 엘리야의 바라든 사탄 全滅工作成事할 것을 바람에서 엘리야를 새로 洗禮요한으로 表示한바며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바의 目的이 있는 바이다. 卽 엘리야의 目的이 洗禮요한으로 完成할 使命的 役割을 가지고 있었든 바이었다.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말 할적에 엘리야의 目的의 成事는 洗禮요한으로 終結짓게 되는 것이다. 洗禮요한이 와서 한 使命達成하면은 하나님 뜻은 完全成事하므로 사탄을 하나님 뜻 路程上에서 없애고저 함에서 豫言하신 엘리야가 洗禮요한이었다. 例를 들면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인데 뜻 成事하는데는 甲(엘리야)과 乙(요한)이 完成하였다.
그런고로 뜻은 하나이고 사람은 둘이다. 뜻 하나 中心하고 말할때 甲=乙 이라는 한 몸으로 完成한 것과 같은 根本意義를 두고 豫言하심이있기에 엘리야=洗禮요한 이라고 하심이 根本目的이 完成되는 바이다.
하나님의 뜻 = 甲\乙
이런 뜻으로 말삼 하심을 아지 못하는 百姓은 큰 犯行의 行路를 取下面서 自然스러운 뜻의 行함이라고 生覺하였다. 이제 엘리야 代身으로 보냄을 받은 洗禮요한의 使命은 무슨 目的이 남아 있나 하면 하나님의 目的 뜻 成事가 完成 하여야할 土臺를 造成하여 메시야 卽 예수 自體한테 被害 없게끔 하여야 할 歷史的 責任이 負擔되어 있다.
洗禮요한의 하여야 할 使命은 엘리야의 心情과 才能으로 예수앞에서 아버지로 아달을 사랑 할 수 있게 하는 同時에 子息으로 其의 아버지께 孝道하게 하여 줄 歷史的 使命性을 말라기 四章 五節, 六節에 記錄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누가복음1/16-17)
그런고로 예수는 卽 누구나 다 全人類의 祖上인 同時에 全人類는 예수의 子息이라는 創造原理로 되어있는 目的 찾어서 맞출수 있는 길을 닦아야할 責任이 요한의 使命이었다. 밖으로는 사탄을 防備하고 內的으로는 百姓으로하여금 子息된 道理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모시어 사랑 받을수 있도록 其 時代에 대한 責任을 蒹有한 重大立場에 요한은 서 있었다. 그런고로 洗禮요한의 全 目的은 메시야의 道를 準備하는 者로써 卽 메시야 한 분만이 그의 生命의 代身이며 希望과 所望의 全部의 存在이었을 것이었다.
또 自己 自身이 알고 있어야 할 事實이었다. 그리하여야 洗礼요한의 曠野生活이라는 全 目的은 여기에 完成을 가져오는 바이었다. 예수보담 六個月 前에 사가랴의 家庭에서 태어난 그 自体는 하날이 無限한 期待로서 보낸 者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存在이었다. 其 時代를 代表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三十余年生涯 모두가 예수(메시야) 한 存在가 目的인데 그 메시야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榮光이 그대의 目的이었다. 洗禮요한의 뜻을 全 이스라엘 百姓앞에 洗禮를 施行하게되었다. 洗禮는 예수의 그 根本 뜻을 成事할수 있는 한 터의 資格을 賦與하여 주는 約束의 表示의 禮이었다.(요한 福音 一章 三十一節~三十四節)
洗禮요한이 이 礼式을 施行 함은 自己 뜻을 成事하기 爲함이 아니고 예수의 뜻을 繼承키 위하여서 하심이라는 바는 다 잘아는 사실이다. 當時 洗禮요한을 이스라엘 百姓은 하날이 보내신 한 先知者로 알고 있었다. 그래 洗禮요한 한테 이스라엘 百姓은 洗禮式이나마 洗禮요한에게 洗禮를 받음은 하날로써 보내심을 받은 者로 알고 있든 까닭이므로 新法(요한복음 一章 十五節) 其 洗禮를 받음이었다.
이 洗禮요한은 證據하기를 自己는 물로 洗禮를 주지만 다음 오시는 메시야는 火와 聖神으로 洗禮를 준다고 하시며 大衆앞에 宣布하심은 自己自身의 使命과 메시야의 使命은 格別하게 相異있음을 告白하는 바이었다. 그래 洗禮요한은 全目的 實體 메시야의 한 存在가 所望城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요한이 요단江에서 洗禮를 배풀고 있을 때에 예수는 갈리리로부터 요단江에 至하여 요한한테 洗禮를 받고저 할때에 洗禮요한은 辭하야 말하야 가라대. 당신이 나한테 나오시나있까하니 예수 말삼하시기를 許諾하라. 우리들이 義를 行하는 것이 合當하리라 하신데 洗禮요한이 許諾하여 洗禮를 施行함을 받고 水에서 올라오시니 天이 開고 하나님의 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其 우에 臨하심을 보시더니 天로써 聲있어 言하사대 此는 我의 愛子요 我의 (기뻐하는 者라) 하시더라.
비둘기 모양으로 聖神이 나린 根本意義는 이와같은 하날의 뜻의 存在라는 것은 洗禮요한 스스로가 알게 되었다. 其때 누구나 全部가 이 事實을 듣고 보았든가 全部는 아지 못하였지만
洗禮요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이 한 目的을 責任진 洗禮요한한테 알리어 全이스라엘 百姓한테 傳하여서 하날뜻을 成事하게 하고저 하심이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하날로부터 예수는 메시야라는 것과 하날로 보내신 特別한 者라는 것은 알려주었으나 洗禮요한한테 예수는 메시야라고까지는 指摘하여 敎示하여는 주지 않았다. 知慧롭게 行動을 取하여야 하는 한 段階에 處하게 되었다. 그때에 洗禮요한은 自己가 바라든 메시야를 맛난슴은 그 以上 무슨 딴 目的이 어데 있으며 다시금 무엇할 使命的 外部分을 要求할 무엇이 없었든 것이 事實인 同時에 기뻐서 大衆을 대하여 積極 예수는 보내시마 하신 메시야라고 宣布하여서 大衆이 예수앞에 集結하게하는 同時에 自己도 亦是 예수 앞에 있어서 모든 代表的 態度로 나서게 되었든가. 그 自體의 態度 如何로 因하여 大衆에게 큰 影響을 傳하는 重大立場에 있다.
그런데 洗禮요한이 예수 對하여 積極的으로 예수 自身은 우리가 바라는 目的의 存在 메시야라고 大衆앞에 宣布 못함은 사실이었다. 그저 요단江에서 洗禮 받을때에만 알뿐이고 洗禮요한은 그냥 그대로 自己가 처음 始作한 洗禮나주면서 다니는 行動을 繼續하게 되니 예수를 대하여서도 大衆은 메시야라고 보는 것 보담도 洗禮요한의 行한 行禮의 도움자로써 아는 者라고 生覺하는 者는 있는 程度이었다. 洗禮요한의 目的은 그저 洗禮나 주고 다니는 것이 歷史的으로 賦與받은 全使命이었든가. 너무나 價値없는 行動이었었다. 全이스라엘 百姓대하여 生命 繼承의 한 中繼存在가 그냥 멋대로 四方을 自由로히 다니면서 洗禮만 준다는 行禮에는 우리는 寒心한 態度로 注目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이었다.
洗禮요한 自身은 亦是 예수 앞에 서서 나타난 엘리야의 代身 存在라는 것을 잘알았는가 하면은 疑心할 問題이다. 요한 福音 一章 二十一 節에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라 하심 보아도 自己 自體가 그 使命的 立場을 明白히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自己 自身이 알았으면 왜 大衆앞에 自己를 宣布하여서 이스라엘 百姓의 疑問点을 없이하여야 할 責任도 準備 못하였든 바이었다. 洗禮요한 自身이 엘리야란 것을 알았으면은 大衆에 대한 責任을 勘當하여야 할 存在
로서 어데 그 責任을 다하기 爲하여서 싸워서 그 基臺를 세웠든가 自己 自身도 確固한 엘리야의 代身者라는 것은 自覺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事實이었다. 이렇게 洗禮요한은 自身使命에 대하여 積極的 準備 工作을 하여서 그 目的 本體로 오신 예수 앞에 全을 侍從의 중심 存在로 서서 예수의 全 使命의 協助者로서 또 第一 큰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수의 한 弟子로서 侍奉하는 外에 더큰 다른 무슨 目的이 있었으랴. 그런데로 不拘하고 예수와 分立하여 行하신데는 洗禮요한이 하날 앞에 重大한 責任 未完成을 가져오는 基本的 代身 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는 事實이었다.
聖經을 보면은 洗禮요한은 全幅的으로 메시야라는 것을 確實하게 알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獄中에 있어서 弟子들을 보내며 묻기를 그대가 오실바의 메시야니까 하는 質疑, 또 다른 사람을 기대리 오리까 하는 것을 보면은 洗禮요한 自身도 메시야에 對한 解決을 못하였든 바를 알리워 준다. 이와 같이 뜻 侍奉者가 되어야 할 그 存在조차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아러주지 못하니 예수 自身에 있어서의 全期待와 所望은 如何한 程度이였을까? 果然 痛恨치 않을 길이 없을까. 누가 그 心情을 알 者 있었으랴. 여기에 洗禮요한이 예수 앞에 하날 앞에 큰 犯行의 始作이 있다는 것을 아는者가 現基督敎界에 없는바를 나도 痛憤하는 바이다.
그저 洗禮요한은 貴하고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아니될 存在 待遇하는 것은 容恕 할수 없는 行動이라 아니할수 없는것이다. 그런고로 自己 責任 다하지 못하고 自己 뜻대로 行하는 洗禮요한이는 아바지 앞에 貴함의 存在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아라야 한다. 예수 때문에 온 者가 其 本使命 中心地을 떠나서 行하는 其 自體는 勿論이며 其의 侍從者까지 하날로서 善아히 對버할 수 없는 存在로써 그 末路에까지 하나님은 貴히 보지 않음은 事實이다. 이와 같은 重大之事 如何가 예수 앞에 크나큰 曠野生活이라는 苦痛의 路程을 斷行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原因이 되었다. 曠野에 나아갈 때에 孤獨한 心中을 헤아려 同情하는 者 世上에 몇사람이었든가?
여기에 人間을 相對하여 예수의 使命範圍는 한 暗路에 逢着하였음을 누가 아는가 아는 者 아버지와 예수뿐이었다. 그 曠野의 寂寞感은 예수 앞에 큰 落望과 同時에 다시금 再出發의 한 路程을 決心케 하는 路程이라 아니 할 수 없다. 曠野까지 예수를 侍奉하여 따른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먼츰 예수를 메시야로 모시는 者 있다면 이는 하날에서 내리는 큰 賞을 받을
存在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生覺하면 東方博士는 어데 갔는고, 牧者는 어데 있는고. 母親은 어데 갔는고. 洗禮요한은 어데 갔는고. 모다 自己 뜻 中心하고 行動하는 其 自體들은 예수 앞에 기쁨을 變하여 嘆息하게 하는 한 存在 等에 不過하였으며 더욱 슬픔을 激動시켜주는 基臺에 틀림없는 存在들이었다. 그런 心情을 품고 曠野生活에 있어서는 第一次 落心을 다시 復歸하기 위한 目的인 同時에 積極的 원수 사탄 對하여 最終 決判時期이었다. 사탄이 벌써 하날 뜻 成事할 터를 侵入하여서 뜻 順從 路程을 받들지 못하는 洗禮요한의 期待는 보았으니 그 다음엔 그 中心 自體인 예수까지 와서 試驗의 試圖는 原理的 한 行動이었다. 그러니 曠野生活 中 사탄의 自由行動에 對比한 예수에 試驗이었다함을 알어야 한다.
第三 節 洗禮요한 人間性 標準으로 예수를 對함
洗禮요한의 行動이 어찌 容恕받겠는가 生覺하면 몸에 솜서리 치는 한 行動이 아니었는가. 洗禮요한 亦是 예수를 대하여서 뜻 中心하고서 對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洗禮요한도 사람인지라 메시야라는 自體는 좀더 高貴한 位에서 自己에게 보여지었을 것이 없는데 별다름 없는 存在의 容貌이면서 自己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뜻의 成事의 路程을 取하여 나가지 못하는 存在로써 어찌 메시아의 資格이란 너무나 距離가 멀었었다. 요한 亦是 그 時代的으로 대하든 이스라엘 百姓과 同一한 觀點으로 서게 됨이 큰 失手의 始作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百姓은 두 말할 수 없는 行動이었다.
그 洗禮요한은 예수 앞에 메시야라면 全 侍從하기 위하여서 自己를 中心하고 其 外 弟子들까지도 함께 데려와서 예수의 弟子가 되어야 할 立場이었는데 그것이 果然 人間性에서 나온 破壞行動이었다. 自己 弟子들과 함께 예수 弟子가 되어 昨日의 先生의 立場을 變하여 예수 앞에 弟子 樣으로 서니 弟子였든 者들과 同級的 立場에서 其 立場이 果然 人間世界에서는 어려운 事實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觀點 等은 人間의 全部가 自己 中心하고 하날을 대하고저 하는 代身 사탄 工作이라고 보여주는 結果를 招來하여 사탄과 合하는 方向으로 나가는 셈을 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論하는 것은 無根據한 原理위에서 論함이 아니다. 聖經에서 洗禮요한이 一大 失手의 行動을 暴露한 句節을 찾아서 解說하여 보자. 至今까지 神學界
에는 難解 問題의 句節일 것이다. 즉 마태복음 十一章을 보면은 그 內容的 事實이 如實하게 들어나 있다. 卽 예수께서 12弟子에게 命하심을 畢하시고 거기에서 離사 敎洲하시며 領布하시라고 各城에 往시더라. 그때 왜 요한이 獄에 있어 그리스도의 行함을 聞고 그 弟子들을 遺야 예수께 亶야 曰 當身이 來실이니까. 先生任이 오닜까 我等이 他人을 待하리까 예수 對答하여 曰 爾等이 往하야 聞고 見난 것으로 요한에게 告하대 귀머거리가 드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癩者가 潔하며 눈먼자가 보며 貧者가 福音을 傳한다하라. 그런지 我로 因하여 犯罪하지 아니한 者는 福이 있도다 하시고 被等이 離메 衆애개 요한을 指하야 言하시매 爾等은 何을 視라고 野에 去더냐. 風에 動이닌 갈대냐 또 爾等이 何을 視라고 去더냐. 美服을 衣한 人이냐 美服衣한 사람을 大闕에 있나이다. 爾等이 어찌 去더냐. 先知者를 見하랴더냐. 是하다. 我가 爾等에게 말하노니 此人은 先知者보다 勝하니라. 此人을 指하야 記錄하였으며 見할지어다. 我가 我의 使者을 爾等 前에 遺하노니 被가 爾路은 爾前에 豫備하리라 하였나이다. 我가 眞實로 爾等에게 論하노니 女人이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보다 雄大한 者가 起함이 無이나 然나 天國에서는 至極 小子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洗禮요한이 來할때부터 至今까지 天國은 用力함으로 得하나니 用力난 者는 奪나니라. 諸 先知者와 律法에 豫言한 것은 요한까지 至하였으니 萬一 爾等이 그것을 肯受할진대 來리라한 엘리야가 此人이니라. 耳가 有서 聽者는 聽지어다. 次世代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譬喩컨데 兒孩가 市場에 座하야 同類를 불러 曰 我等이 爾等을 向하야 나팔을 吹하여도 爾等이 舞지 않고 我等이 哀音을 하여도 爾等이 울지 않았다함과 같으니 요한이 來하야 食지도 않고 飮지도 아니하매 被等이 語하기를 邪鬼가 들렸다 하더니 人子는 來하여 食하고 飮하매 또 語하기를 食하기를 貪하고 酒을 嗜하는 人이요 稅吏와 罪人의 親舊로라하니 다만 智慧는 그 行事로 義를 顯하나니라고 以上과 같은 言을 宣言하였다. 이 內容全部는 洗禮요한 對하여 놓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요한 弟子와서 물을때에 본대로 말하라.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나 너희는 스스로 自覺하여라 하면 서 여러 異蹟 奇事로써 表示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런 對答을 하였는가. 그저 묻는 그대로 對答하여 옳도다. 내가 來하고 한 者로라 하면은 그만 解決을 짓는 일인데 이와 같이 예를들어 말한바는 人間으로 하여금 깨달을수 있도록 敎示하였으니 그것 보아서 알라는 큰 意義가
있음을 알어야 한다. 그 理由는 貴하고 높은 예수를 찾으면 그야말로 그에 더 成功은 없는 것인데 누구나 全部가 가르쳐주고 全部끌어다 주면은 그 貴한 自體를 찾지 못한 者 어데 있을까 밝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自己들이 智慧를 通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여야만이 그 뜻 成事는 勿論 하날의 協助하여 주었지만 自己 努力으로 찾으여야만이 墮落하지 않고 이루었다하는 結果를 보기 爲하여 그 찾는 賞給에 對한 榮光받을 資格이 決定되는 바이므로 最終點까지는 敎示하여 주지 않는바이다. 例를 들면은 100까지를 찾아야 하는데 95가량만 알려주고 5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한 뜻의 路程의 表示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100까지 中 100까지 全部를 敎示하면은 그 賞給은 하날에 있는 聖徒들 앞에서라도 그 榮光누릴 資格完成者라 할 수 없기에 95까지만 가르쳐주고 5는 自己 智慧를 通하여 찾아 100까지를 채우시기를 바래서 敎示하는 바가 지금 役事 路程에서 많이 보여지는 事實이다. 이 5이란 그것 찾아 成事하는 그 事實은 100의 成事한 榮光을 누리고 基本權限을 決定하는 事實이니 이와같은 例로서 洗禮요한 對하여서 對答한바도 事實이다. 또 洗禮요한 한테도 하날로써도 이와 같이 敎示하였다. 智慧로 찾아서 義로 定함을 주시고저 하여서 예수는 메시야라고 確定지어 敎示치 않은 바이다. 이런 것이 至極한 하나님이 사랑 하시어 하시는 攝理인 同時에 누구에나 許諾한 예수니 智慧있는 者만이 合하여만이 원수의 智慧를 破할 수 있는 基本動力이라는 根本의 力의 터가 되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은 攝理하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特히 어떤 目的을 敎示하였다가 다시금 試驗하여 그 目的 對한 疑心을 發하게 敎示하여 주는 때도 있다. 그것은 智慧로서 그 根本을 確得할 수 있는 資格者가 되어야만이 하나님 自身이 直接干涉하지 않아도 사탄 원수 對하여 勝利할 資格者로 세우려니 이런 試驗도 있는바는 靈敎示로 받는 者들의 體驗하는 事實的 根本意義로 있음을 알어야 한다. 그것은 즉 사탄이 對하여 反對役事할 수 잇는 것이기에 또 그리하여 完成格者 되면은 全部를 하나님의 干涉을 하지 않고 自由成事를 標準하기에 이와같은 자리를 바라서 우리에게 對取하기 爲하여 攝理하심은 알어야 한다. 智慧로서 뜻 찾어 完成하는 者는 저 하날 圈에서도 말할수 없는 貴한 存在다. 누구나 부러워 하는 存在의 資格은 智慧를 찾음으로 만이 尊敬의 價値를 볼 수 있는 根本의 行動이 즉 智慧로 뜻 成事를
完成하는 態度이다. 그리고 貧者에게 福音을 傳한다 하심은 큰 意味가 있다. 즉 여기는 이스라엘 百姓 全部가 메시야를 苦待하기를 自己들이 더 좋아지기 爲하여서 苦待하였기에 至今 이와 같이 나 自身은 너희들이 바라는 目的相對로 되지 못하여 貧者와 같은 者 밖에 相對할 수 없는 貌樣에 있다함을 告하는 同時에 너희들은 마음으로 富한 것이었기에 나 對할 수 없었다는 것을 間接的으로 表示하는 말삼이었다. 이 말삼은 사탄이 主管世上에서 善은 밝혀 貧者級에 많은 것을 말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惡의 主管世上이니 惡者는 富하고 善者는 貧하니 이런 原理的 言詞로 되어 있는 것 알어야 한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말삼하시기를 誰던지 我를 因하여 犯罪하지 아니한 者는 福이 有하도다 하심의 句節을 보게 된다. 이 句節이야 예수님의 숨은 心情을 表示한 말삼이었다. 卽 이 말삼에는 벌써 洗禮요한은 내에게 犯罪하였다는 結論的 事實을 告白하는 것이다. 犯罪하지 않은 者는 福이 있도다 하였으니 벌써 福된 立場에서 離脫한 存在하는 것을 暗示한 바이었다. 果然 예수 앞에 洗禮요한 한 自體는 크나큰 打擊의 存在이었다. 예수의 全目的의 大部分에 一大難事를 招來케 한 큰 犯罪라는 것은 더말할 나위없는 事實이다.
그 다음은 爾等은 무엇보려 曠野에 出더냐. 그 目的이 무엇이던지 그 野에 나아감은 全目的은 예수한 自體를 보기 爲하여 行動한바가 아니냐. 또 野에서 요한 自體가 證據한바가 아니었든가. 그런데 그때 벌써 알어야 할 時期를 놓치고 至今와서 이렇게 行動하는 것을 暗示하면서 責望하는 말삼이었다. 그러나 그 證據한 洗禮요한은 果然 先知者 中에서는 第一큰 者라고 하면서 말삼하시었다.
野에서 본 洗禮요한은 果然 先知者 中에도 큰 者라고 하나 할 責任을 擔當하지 못하였다는 意味로 말삼하시는 말심아 我가 眞實로 爾等에게 論하노니 女人으로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보다 雄大한 者가 起함이 無하다. 天國에서도 至極者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하심에 結論的 判決을 내리웠다. 이 말삼이 지금 神學界에서 未解決點이나 그 根本意義는 예수 對한 洗禮요한의 犯罪行爲에 對한 責望의 말삼이라는 것을 밝히 이제는 알어야 한다. 卽 根本意義는 무슨 뜻인고 하니 女人으로 난 사람 中에 洗禮요한보다 雄大者가 起함이 無하다함은 이 말삼에 對한 根本意義를 알어야 한다.
昔日의 先知者도 女人을 通하여 生하고 至今 洗禮요한도 女人을 通하여 生한 者라는 것은 틀림없는 事實인데 왜 洗禮요한이 第一로 큰 存在라고 하였는가 하면은 先知者라면 하나님의 뜻을 豫言하시어서 뜻을 알려주는 代辯人임에 틀
림없다. 그런데 洗禮요한은 亦是 하나님 뜻을 알리는 代辯人이라는 것은 같은 뜻의 存在이나 그 自體들이 證據 立場을 취하여 보면은 昔日 先知者 全部는 證據하되 豫言的 證據로서 예수를 證據하였으나 洗禮요한은 證據하되 直接的으로 證據하였으니 證據的 立場을 中心하고 말할 때 洗禮요한의 以上가는 者 없음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證據的 立場을 두고 洗禮요한에 對하여 말할 때 果然洗禮요한은 女人으로난 사람中에는 第一큰 存在라는 根本意義가 確實하다는 것을 明白히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然나 天國에서는 至極者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하심은 무슨 意義냐 하면은 根本意義가 이러하다.
天國에 간 者도 女人으로 난 者들이다. 그렇다면 女人이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이 第一 大하다고 하였는데 왜 天國에서도 커야 할터인데 第一 작은 者가 洗禮요한이가 되는가 하는 것이 疑心아니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 關門이다. 이 根本意義도 洗禮요한의 犯罪的 行爲를 責望한 重大句節이란 그 뜻은 이러하다. 至今 洗禮요한은 예수를 메시야로 證據하여 놓고는 自己는 自己 멋대로 行하였으니 예수에 對하여서 積極 存在가 되어 行하여야 할 立場을 떠나서 行動하였으니 큰 犯罪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야로서 侍奉하여야 할 中心 存在가 侍奉하지 못하고 도리어 뜻 破하는 行動을 하였으니 그 自體에서는 果然 天微者의 行動力이 아니라 할수 없다. 洗禮요한이 積極侍奉하였으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날에서는 至極히 큰 存在가 될터인데 侍奉치 못하니 天에서 微者보다도 못한 存在로 되었다하는 意味였다. 卽 천에 있는 聖徒나 또 天使나 어떤 存在라도 예수 對하여서는 메시야란 根本存在라는 것을 다 알고 極心으로 侍奉하고 있는데 侍奉할 中心存在가 侍奉하지 못하니 侍奉에 있어서는 最微者가 되었다하는 意味를 알어야 한다.
이 말삼은 侍奉을 中心하고 말삼하여서 洗禮요한에게 對한 犯罪行爲를 策함이라는 重大한 根本意義를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洗禮요한 來할때부터 至今까지 天國은 用力함으로써 得하나니 用力하는 者는 奪하나니라 하심의 말삼도 亦是 洗禮요한 對한 犯罪之事를 指摘함의 말삼이었다.
요한 來할때부터 至今까지라는 말삼은 무슨 뜻의 말삼인가 하면은 먼츰은 洗禮요한 自體가 뜻을 받들어서 侍奉하였다면 예수님의 首弟子는 洗禮요한이 될바는 定한 하날의 目的이었는데 用力하지 못하였기에 卽 侍奉하지 못하였기에 요한부터 至今까지라는 中에 요한이 先有權利를 주었든 큰 位置를
指示한바였는데 그 位置를 지키지 못하니 그 指定되었는 位置는 用力하는 다른 弟子에게로 옮겨지었다는 것을 指摘함이었다.
그런고로 天國은 用力하는 者는 奪하니라 하심이었다. 豫知 豫定은 根本을 두고 하신 말이란 뜻이 根本이다. 그런고로 用力하는 다른 弟子들한테 그 位를 奪심이라는 根本意義를 明白하게 表示한바를 보아도 여기에 洗禮요한이 犯行한 自體이면서 예수 앞에 큰 하날적 反逆者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存在 對하여서 오늘날까지 尊視하였다는 過去 信仰者의 無知의 서러움을 무엇으로 防止할까. 果然 痛憤한 事實이다. 이 事實의 行動으로 因하여 예수의 十字架의 難의 始作을 再促하는 行動이라는 것을 밝히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洗禮요한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그는 世上이 食口 飮치 않으니 邪鬼가 들렸다하고 나도 食口飮하니 稅吏와 罪人의 親舊라하니 다만 智慧는 行事로 義를 顯하나니라 하시었는데 이 말삼 中에는 世上이 함부로 하날뜻을 不知하면서 自己 멋대로 定하여 評한다는 것을 指摘하면서 뜻을 갖고 온 者를 對하여 조금도 應하는 者 없다함을 譬喩하여 兒孩가 市場에서 座하야 同類를 吹하여 曰 我等이 爾等을 向하여 나팔을 불어도 爾等이 舞치 않고 我等이 哀音하여도 너희들이 胸을 拍지 않는다는 것으로 世上을 譬喩하여서 現在 뜻 中心한 自己의 目的要求에 조금도 應치 않음을 指摘하심이었다.
그러나 智慧로운 者만이 하나님의 뜻을 行義로 顯낸다하심의 警告를 볼 수 있다는 바를 至今 敎人들이 아는가. 이와같이 初臨예수 앞에 展開되었든 眞狀이 至今 再臨을 바라는 世界信者들과 바리새 敎人들과 比하여 볼때에 뜻에 屬한 存在가 至今 信徒 中에 몇 名이나 있겠는가! 이와같이 根本原理들은 末世가 되니 뜻 成事時期가리니 明白하게 되어야만이 再臨은 오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根本의 뜻 알고 侍奉者는 하날에서 第一큰 者라는 것이 끝날도 付與하는 事實이다. 이와같은 環境을 본 예수 앞에는 曠野라는 서러움의 路程을 展開시킨 根本原理이라고 위에 論한바를 理解할줄안다. 이런 根本을 밝히지 않으면 積極反對할 者들은 現敎界 信仰者들일 것이다. 그러나 뜻과 根本을 알적에 큰 두려운 問題라 아니할 수없다.
以上 論한바 根本問題는 洗禮요한 自體는 하날적으로 豫定的 存在였으나 그 使命을 侍奉 못하게 될 때에 하날은 뜻 侍奉의 價値를 알고 侍奉하는 者가 하날적 豫定的 目的을 繼承하여 完成하는 바로 하나님은 뜻의 攝理를 돌리어 役事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豫知 豫定的이라는 것은 뜻을 中心하고 말씀한바이지
뜻 對하는 사람을 對하여서 말씀한바아니다. 이것 보아도 現實 信仰界의 豫定論 等은 그 問題外 位置것으로 되어진다.
第四 節 復歸攝理 表示로 된 예수 祖上의 血統
人間은 해와의 失手와 아담의 失手는 全人類로 하여금 死亡에 指導받아 하나님과는 먼 距離에서 反對方으로 나아가는 것을 다시 찾고저 하시어서 歷史를 通한 攝理路程에 全幅的 뜻 表示로 傳하여 왔음을 以上 論한바에 依하여 잘알줄안다.
그런데 特히 예수의 直系의 血統을 가진 歷史的 祖上들의 全部를 살펴볼적에 우리가 根本原理를 아지 못할때에는 한 疑心되는 血統을 가진바를 누구나 다 切感하여왔는 事實이 되어 왔다. 예수의 祖上의 혈통은 全部를 攝理하시는 하나님 뜻을 中心하고 祖上의 하나님을 對하여 왔든 바이다. 歷代의 祖上의 全表示的 中心되는 일은 後日 예수의 歷史的 事實을 全部 完成할 수 있는 原理대로 表示하면서 예수까지 引導하여 經由하심이 었다는바를 아러야 한다. 卽 예수와서 墮落한 全人類를 根本되로 回復하여야 하는 存在가되려니 그 歷史에 對하여서 根本 하나님의 뜻에 대한 表示的 系統을 取하여 왔든 바이다.
예수 祖上에 보면은 世上 사람보기에는 不潔한 血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血代는 純粹한 血系가 아니고 여러 女人들 代表的 存在들이 나타나고 있다. 卽 다마, 라합, 룻, 밧세바 等의 女性들이다. 이와같은 血系를 가진바는 本來 人生祖上 아담 해와들이 더럽힌 者의 行例로서 하나님의 直系를 떠나서 사탄과 合하여 死亡의 血系를 받은바를 다시금 復歸하여 根本에 옮겨 놓고자하니 사탄한테 빼앗긴 事實的 例와 같은 反對行動으로 하나님께 屬하게 하여서 사탄의 根本 더럽힌 原理를 찾어 세우고저 함이 重大要素이다. 그런고로 이런 더럽힌 女性들과 같은 者들이 行動의 뜻 成事할 수 있는 하나님의 根本, 順從, 侍奉, 信從할 수 있는 그때야만이 뜻 成事된다는 原理成事를 始作할 수 있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고로 예수와서 復歸하여야 할 根本뜻들을 全的으로 表示的 順, 信, 侍從의 타나나는 곳에서만이 뜻이 始作한다는 表示로서 歷史의 祖上의 行動의 成立의 表示가 合意를 보아 예수의 根本되는 祖上 資格者로서 附與하신 바이었다. 야곱은 에서를 두고 長子의 基
業을 빼앗아서 하나님의 基業을 成事할 表示的 事實의 成立을 보았으나 이제는 다음째도 선 者가 먼츰 子에로써 本 系代를 成事할 始作은 卽 유다부터였다. 유다에게 있어서는 뜻 成事的 事實의 表示와 同時에 뜻 實踐 成事出發을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다 支派를 通하여 하나님의 뜻 成事할 것을 미리 말하였든 바이나 뜻 成事의 첫 繼代者로서 베레스와 세라를 보여 주심이었다. 이 유다부터 하나님은 뜻의 基本 始作을 보는 것이었기에 다마에게 한 雙胎를 주어 베레스와 세라 亦是 야곱과 같이 腹中에서 싸워서 그 뜻의 基本 確立에 한 表示를 成事함이라는 큰 意義가 있는 바이었다.
그러면 다마가 한 行動으로부터 아러보자. 다마는 本來 하나님 뜻으로 許諾한 系代를 繼承하여야할 立場이었는데 그 男便 죽고 血代를 繼代하여야 自己 存在에 대하여 많은 苦心한 存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할려는 血代를 繼承하기 위하여서 누구보담도 많은 苦痛과 함께 其 血代의 價値性을 안 女性이었다. 그리하여 自身 뜻을 成事하는 同時에 하나님의 뜻을 繼承하기 위하여서 부끄러움도 死亡도 第二次的 問題視하고 目的達成의 行動으로 나아간 바이었다.
그때 이런 行動이라면 容恕없는 죽음의 길이 다마앞에 始作되는 바도 알고 있지만 그런 問題를 問題視보담 此後의 問題로 하고 아무리 하여도 유대의 子孫을 通하여서 繼代를 못할 것을 아는 다마는 不得已 自己의 媤父를 通하여서 繼代를 잇지 않으면 안될바를 覺悟하고 其 路中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때 마침 媤父가 羊毛를 剪(깎으)려 딤나에 온다는 말을 듣고 寡婦의 衣服을 입고 너울을 蒙고 딤나 路側에 坐즈매 유다는 娼女로 여겨 子婦인줄 모르고 我와 相關함이 어찜이뇨하니 許하여 同寢하니라. 그리하여 孕胎된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었다.
이런 非原理인 行事가 유다와 다마 사이에서 始作되었다. 卽 다마는 非原理로 繼代를 잇는 存在가 되었다. 이 다마의 行動은 卽 무엇을 表示하는 바냐 하면 해와가 사탄한테 貞操을 빼앗겨서 非原理的 繼代를 세운자가 되었으니 墮落을 始作케 하였는데 그와 反對로 다마는 뜻 成事하기 위한 하날 便쪽에서 繼代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根本 뜻인 한 해와가 잃었든 存在로 後日에 나타나서 다마와 같이 行動하는 것과 同一한 事實이 뜻 路中에 있음을 表示함이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墮落된 世上에 한 女性이 하나님의 根本뜻 成事할 수 있는 한 女性이 다마와 같이 非原理的과 같은 樣으로 사탄 世上 相對를 對하지 않고 하날 相對者로 繼代하여야 한다는 한 事實의 內包되어 있는
表示的 存在 卽 다마이었다. 그런고로 다마와 같이 사탄 世上 女人이 하늘 男便 맞으어야할 根本한 해와가 나타나서 新婦端裝하여 世上 보기에 非原理樣으로 生命을 아끼지 않고 뜻 繼承을 찾어 準備하는 女性이 잇어야 할 後日의 目的이니 이 다마는 그 實體를 表徵하는 한 存在로되매 이런 다마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血統的 繼代 잇는 第一 祖上이됨이다. 예수와서 이와같은 한 해와를 찾어 하나님의 뜻을 成事할 暗示的 숨은 表示가 있음을 아러야 한다.
다마와 같이 해와는 아비지품에 들어가기 爲한 努力이 다마 貌樣으로 世上에서 하날로 옮겨지는 한 行路가 있다함도 表示함이다. 유다는 하나님의 對象的으로 表示된바고 다마는 다시 찾으여야할 한 해와를 表示함이니 그 表示가 卽 예수의 뜻 中心이니 예수의 祖上의 繼代로 原理上으로 許與되는 뜻으로 되는 바이다. 男便되어야 할 存在를 두어두고 媤父의 품으로 들러오야 하나님이 사탄한테 다시 빼앗는 樣式을 實成하여서 根本復歸를 成事할 수 있갔으니 이런 表示로 됨이 事實이다.
이 다마에게서 베레스와 세라의 雙胎는 本來 하나되어야 할 存在가 둘이 되었다는 것을 表示함이다. 사탄에게 屬한 者와 하나님께 屬한 者가 있다함의 表示이다. 墮落없엇으면은 그냥 처음난 者가 長子될터인데 서로 長子되겠다고 싸운바는 墮落의 血을 받은 者가 되었기에 서로 뜻 繼承받은 者되기 爲하여서 싸우심을 아러야 한다.
야곱 時에는 나온 동생으로부터 빼앗을 것을 表徵하여 그 基業을 빼앗고는 基業成事者 베레스와 세라는 하나님의 基業繼代에 드러와섰으니 먼츰난 者가 뜻 繼承者가 되는 바는 事實이니 베레스와 세라는 싸와서 먼츰 나오려는 세라를 물리치고 베레스가 난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世上에서 원수 물리치고 長子의 基業成事 할 것을 表示함이었다. 卽 같은 世上에서 長子되려고 하는 者를 물리치고 根本자리에서부터 長子를 成立시켜 基業成事할바를 아러야 한다. 이와같은 原因으로 因하여 다마는 하나님의 뜻에 成事者의 母가 되었음이다. 그 아들 베레스가 長子됨이었다.
이 全部는 예수와서 直接 싸와서 勝利하여 基業成事함을 歷史的 距離를 두고 表示한바이다. 라합 亦是 그러하고 룻 亦是 그러하다. 이 女性들은 하나님의 뜻을 爲하여서 至今 現實의 立場을 떠나는 存在들로서 되었기에 그런 非原理行例樣과 같은 許諾으로 뜻의 成事를 繼承한다는 하나님의 根
本뜻을 暗示하는 表示的 存在들이었다.
밧세바를 살펴보자. 人間世上에는 容納할 수 없는 非行에서 生起인 한 存在가 卽 밧세바의 表示的 恩赦를 받는 理由는 여기에 있다. 사탄이 해와를 빼앗을 때에 男便되는 하나님을 두고 빼앗은 것이었다. 이런 것을 다시금 빼앗아서 찾으여야할 原理로서 한 男便있는 女性이 밧세바이었다. 卽 다윗 王께 있어서는 한 忠臣인 우리야를 다윗王은 戰場 第一線에 보내어 죽이게 하여서 그의 婦人을 빼앗은 存在 卽 다윗王에게 同寢한 솔로몬의 母親이 밧세바이었다. 이런 밧세바가 어찌 예수의 祖上되었는가. 또 至極한 榮光의 王 솔로몬의 母親이 되었는가 하는 것의 根本意義는 다윗王은 하나님을 表示함이고 우리야는 天使長 누시엘을 表示함이고 솔로몬은 親히 찾고저 하는 榮光主 예수의 中心을 表示한바이었다. 예수와서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할 使命은 사탄의 妻와 같은 해와를 우리야의 妻 밧세바를 다윗王이 取한바와같이 世上에서 成事하여야 할 使命있다는 根本 뜻 中心하였기에 이와같은 예수의 한 뜻 成事의 表示이었다. 우리야를 죽인것과 같이 사탄이 이런 立場에 處케하기 爲한 뜻을 表示한 存在였기에 하나님은 사랑하여서 그 子를 榮光의 王 솔로몬으로 삼은것과 같이 이와같이 찾는 理由로 뜻 成事하여 예수가 榮光 누리게 하고자 함의 根本意義를 둔 뜻이 있기에 이와 같은 非公式的 存在들이 예수의 祖上들의 母들로 서게 된 바를 表徵시키는 하나님의 中心意義였다. 이와같이하여 예수와서 하여야할 使命的 內容을 表示하게하는 歷史的 祖上였음을 알적에 果然 이 根本問題가 全部 解決의 中心의 始作이니 이런 表示로서 攝理하시었다. 예수는 世上에 誕生할때에 하나님으로부너 童貞女마리아로부터 誕生케하심이었다. 이도 亦是 하나님이 사탄한테 童貞女 해와를 빼앗겨서 墮落시켰으니 하나님도 定婚한 요셉을 한 相對롣고 빼앗아서 第二次 아담 예수로 誕生케 하심이었다. 이때 對象的으로는 요셉과 마리아는 根本 아담 해와가 墮落때에 未成婚의 한 事實的 立場에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그와같은 原理로서 빼앗는 樣으로 하나님의 童貞女한테 受胎케함의 根本意義를 아러야 한다.
하나님 親히 靈으로 빼앗았으니 예순는 肉으로 또 그 根本意義를 復歸하여야 할 意義를 갖고 있음인데 마리야 不順應 함으로 뜻 未成事로서 예수 앞에 難點의 始作을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肉身으로 해와 한 自體를 찾으려고 하니 새 路程을 取치 않을 수 없는 立場의 路程이 三年 共生涯의 路程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앞에 보여지는 마리아
는 重大한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는 원수적 存在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母親보고 女人이여 너와 나와 무슨 相關이 있뇨 한 것은 하나님 뜻 成事케 못한 存在니 이런 言의 한 相對의 存在이었다. 人間的으로 아지 못하는 이와같은 根本原理를 세우려는 예수앞과 하나님 앞에서는 사탄이 第一 무서워하는 根本歷史인 이터가 破壞하는 일이니 사탄은 예수 앞에 언제나 對立하여 나아감을 다시금 認識치 않으면 안될 事實이다. 이와같은 世上없는 한 路程의 始作이 있다함을 完成하여야할 그때(하나님)의 心情에는 말할수 없는 큰 生命代身하여서라도 成事치 않으면 아니될 課業이 남어지게 되었다. 人間的으로 生覺하여 하날 뜻 成事못하는 그 立場인 요셉의 家庭과 마리아와 예수와는 相關없는 生活의 始作으로 나서게 되는 첫 始作이 曠野生活이다. 이때 弟子들로 完成하여야할 洗禮요한 一派 等도 예수 앞에는 何等도움 못되는 存在들이었다.
第五 節 예수 三年 共生涯의 路程은 뜻 成事의 터를 찾기 爲함
三十年이란 長期間에 걸쳐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예수는 꾸준히 요셉의 집에서 木手業으로 生計를 取하여 나오든 그 心中에는 다만 뜻 成事의 마음을 何時라도 잊어 본적이 없는 立場이었다. 三十年間 여러 가지로 하나님 뜻을 갖이고 試鍊를 거듭하여 오면서 뜻 成事할 수 있는 成就者되도록 內的完成을 爲한 準備時代였다. 그 中에 內的으로 마리아 母親과 協助을 보지 못한 예수는 出家하여서 새뜻 成事하기 爲한 第二次 뜻을 세워 찾고저 함에서 나서게 되었다.
예수 한 存在가 그 時代에도 貴한 存在라는 것은 洗禮요한으로부터 요단江邊 宣布가 있은 後에 요한은 뜻과 使命다하지 못하여서 外部로 成事하려는 예수의 뜻 成事의 路程에 한 서리를 퍼부었다.
內部로는 요셉 家庭이고 外部로는 洗禮요한이 하도 難한 行路를 獨斷히 가려하니 원수 사탄 對한 싸움의 步調로써 曠野四十日 禁食期間은 始作을 봄이다. 曠野에 나아가서 四十日 禁食이라는 것이 根本的으로 예수 앞에 付與한 길 보담도 하나님이 根本 잃어버렸든 여러 가지의 條件들을 사탄과 判結하기 爲한 期間이었다. 卽 예수는 第一次 하나님 責任分擔 過程에 있어서 사탄한테 잃어버렸든 諸條件을 찾어 成事할 歷史的 復歸責任이 있는 同時에 自己로서 勘當하여야 할 第二次 責任分擔使命路程을 잡고 나서고저 하니 舊約 時期에 보여주신 第一次 하나님의 責任分擔路程을 본받아 成事하여야 할 始作이 있어야겠으니 먼츰 사탄한테 歷史的으로 表示的 約束의 物件에 侵入을 본 根本사탄이
全的으로 예수 앞에 다시금 그 實體者로서 侵犯을 防止하여야 할 根本을 찾어 세우고저 하는 期間이 이 期間이었다.
예수는 第二 아담 하나님 몸으로 온 者이었다. 출애급 時代에 曠野에서 하나님의 約束의 言에 二石板을 破한 事實과 盤石 두 번친 事實들은 卽 예수 몸을 치어 하나님 몸까지 칠 事實的 意義를 잊었기에 한번은 許諾으로 한바이나 二次式이라는 것은 큰 問題 卽 사탄이 行한바의 間接的 結果點을 보게 되니 사탄이가 하나님의 몸을 쳐 그 根本自體에 侵入한다는 表示的 自體가 이미 侵入을 보았으니 사탄은 벌써 예수 自體한테 이런 侵入의 根本으로 因하여 다시금 사람들이 不順, 不信, 不侍에 나가는 것을 바라든 차인데 內外로 예수는 失敗보니 卽 不順과 不信과 不侍를 보니 벌써 사탄은 昔日의 自己가 所有할 수 있는 表示로부터 그 根本 實體物까지 侵入하여 屈服케 하고저 하는 意圖의 實現狀이 사탄의 試驗이었다. 그래 사탄은 實體 예수를 試驗시키는 것은 實體를 屈服시켜 하나님 뜻 破하고저하는 一大 重要意義가 있었다. 그런고로 사탄은 예수를 試驗에 對立하여 서게 되는 理由가 있는 바이었다.
이때 사탄이 試驗主人格으로 설수 있었다는 바는 벌써 表定物 二石板과 盤石을 取할 수 있다는 그 理由로서부터였다. 그리하여 사탄은 實體 예수앞에 侵入할려고 가진 根本을 잡으려하나 예수는 全體가 하나님 뜻을 完全히 成事할 수 있는 自體格 具備를 보니 사탄은 그 目的을 未達成하심이었다. 끝까지 뜻을 세울수 있는 터라 예수 앞에 보였다면은 큰 事實이었겠는데 試驗하여보아도 그 自體를 如何히 할수 없기에 사탄은 떠나가고 天使는 侍從들었다는 基本意義를 아러야 한다. 사탄은 試驗할적에 根本目的은 예수가 試驗받을 수 있는 條件이라면 그것은 예수 앞에 重要한 全目的을 갖고 하여만이 예수를 誘引시킬것이 事實이니 예수 自體와 分立못할 그 目的體式을 갖고 試驗하기 始作하였다. 同時에 사탄은 勝利하면은 예수의 全目的을 破壞라는 그 根本目的을 갖고 試驗하기 始作하였다. 예수가 온바는 舊約을 完成하여야할 存在다. 卽 하나님的 使命責任路程을 實體로 完成하여야 할 責任者가 卽 예수였다. 그런고로 그 責任 다 할려면 네가 모세의 失敗한 部分을 찾어 세우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사탄은 아니 이 重要點을 가지고 試驗한 첫것 卽 石로 試驗하심이었다. 四十日 苦로 因하여 받은것도 찾어 세워야 할 使命이 있으니 亦是 四十日 禁食이 要求되었다 이 잃어버린 石을 찾으려니 굶주리고 있는
中에 사탄 와서 이 石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떡이 되게하여 먹으라 하심이었다. 이것은 石板을 破하게되는 第一原因은 먹는 것을 基因하였으니 너도 그리 굶주리지 말고 먹으라하심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는 것 때문에 失敗하였으니 너도 먹으라마 하심이었다. 그 根本失敗케 하든 자리로 돌아가라하는 事實失敗한 그 表示的 要求로 試驗하였다. 그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口으로 나오는 言으로 산다하심이었다. 이는 卽 全部가 言을 찾어서만이 산다는 것이었다. 이 말삼이란 뜻이 根本体를 찾어야 산다는 것에 意義가 있는 바이다. 卽 石과 盤石인 同時에 그 根本實體인 예수 自體를 말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로써 산다는 것으로 勝利하였었다. 예수=하나님의 말삼의 全表示完成者 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있는 곳에 하나님은 뜻 成事하니 너는 어서 물러가라는 根本目的으로 勝利함이었다. 이러므로 잃어버린 그 實體인터는 세워 놓았다. 이 盤石과 石되는 터는 예수 하나로써 한 基盤지었으나 이 다음은 뜻 實踐成事는 남아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누구신고하니 聖殿 代身者이면서 聖殿의 主人公이라는 根本意義를 갖고 試驗키 始作하였다. 이것은 卽 예수의 全目的体이었다. 그런고로 사탄은 事實의 要求重要目的을 다시금 表示하여 試驗키 始作하였다. 예수를 聖殿頂에다 세우시고 曰 爾가 萬一 하나님의 子이어든 뛰어나리라. 大槪 記錄하였으되 하나님께서 爾를 爲하여 使者들에게 吩咐하여 手로 떠받쳐서 足이 石에 부딪히지 않게하시리라 하여 試驗하시었다. 그러나 뛰어내리라하심은 그 聖殿 主人格에서 한 平民과 같이 되어라 하시어 그렇게되면 사탄이 自己가 聖殿主管者가 되겠으니까 너는 原理대로 되는 存在인이니 그 原理的 存在는 卽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몸이 나이다. 그러니 나밖에 聖殿 主人公은 없으니 너는 하나님을 試驗할 수 없다. 卽 그 主人公은 언제나 主人公이니 너는 물러가라하시는 그 根本意義를 두고 하신 말삼이었다.
이리하여 聖殿 完成的 表示存在 예수는 그 表示的 實體存在로써 설수 있는 한 勝利를 보았으니 너는 妨害하지 말라는 根本 뜻 成事하는 過程에 사탄을 對防할수 있는 基礎를 세워 大衆 聖殿 繁殖의 始作은 할수 있다는 터를 成事하시었다.
다음은 예수를 至高한 山에 上하야 天下萬國과 그 榮光을 示하야 曰 萬一 我에게 伏하야 拜하면 이 모든 것을 與하시리라
하시었다. 예수 對答하여 曰 사탄아 물러가라 記錄하였으대 主, 爾의 하나님께 敬拜하고 惟獨 그를 事리라하여서 一大勝利를 가지게 되었다. 이 根本意義는 예수 自身은 果然 하나님 뜻 中에서 天下萬國에 至高은 存在라는 것을 表示하는 것은 至高山에 上야 보임이 卽 예수는 하나님 뜻 中에서 第一 貴하고 天下萬國에 第一高다는 者라는 것을 알며 그 榮光 全部도 차지할 存在인것도 알고 있음으로 이런 것이 예수에게 第一貴한 目的이니 이런 예수의 全目的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伏拜하면 이 모든 것을 與리라하시었다. 이에 사탄아 退라 하심은 이것은 原理的으로 나에게 屬하여 있는 것이요 또 내것이면서 하나님 뜻에서 完成되어 하나님이 尊敬받으여야 하는 바가 原理인데 네게 伏拜하라는 그 말은 사탄 本性暴露니 너는 물러가라 絶對 容恕할 수 없는 非原理가 말삼에도 主 너의 하나님을 敬拜하고 惟獨 그를 事하라하시었다. 내가 섬길바는 하나님 한 自體밖에 없고 너도 根本은 그분 한테 敬拜할 者 안인가 하여서 大勝利하여 사탄을 敗케 하였다. 이 勝利로 因하여 예수는 勝利의 出發이라는 뜻을 품고 나서게 되었다. 이와같이 사탄과 예수와는 原理的 事實을 두고 싸웠으나 結果는 原理的으로 勝利하는것이라는 勝利點을 세워가지고 나서게 되었다.
사탄은 떠러졌으니 사람이 예수께 絶對하면은 사탄 試驗한바와 같이 舊約 完成者면서 聖殿完成主人者면서 世界大主宰이라는 確固한 基本軌道를 잡고 나서게 되었다. 그 後에는 十二弟子와 七十 門徒를 擇함이다. 四十日 期間은 노아 洪水審判時도 四十日晝夜로 죽이게한것도 卽 아담 때문이고 모세가 四十일 晝夜를 苦生함도 아담때문이니 第二 아담으로 오는 예수는 四十日 苦難의 期間에 잃어버린 全部를 完成하여야 할 代身責任이 있으니 四十日 禁食期間이었다. 그리하여 苦難의 期間이라는 것을 없이하기 爲한 目的이 있기에 四十日을 苦生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四十日 禁食한바도 言을 찾으려 하였으니 말삼 成事한 예수는 苦痛없애기 爲한 禁食이 四十日 禁食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로 因하여서 苦生없이 言 完全成事한다는 것이었다.
여기 附言하려는 바는 예수 요단江에서 洗禮받고 올라올적에 聖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上에 臨하심은 무슨뜻인고 하니 예수 한 存在는 아브라함의 約束받은 全部를 完成하는 中心自體이었다. 卽 아브라함의 豫約祭物을 사탄한테 侵入받았던 事實은 사탄이 따를 수 있는 터가 되
었었든 바이였는데 예수 한 自體가 나타나는 時에 사탄 뜻에 빼앗기었든 根本 割하지 않았든 鳩를 다시 찾어서 完成하는 그 自體가 나타났으니 예수는 蘇生表示祭物 鳩的 舊約時期는 완성하여서 基本 뜻 成事는 始作할 수 있는 基本意義의 表示로 鳩와 같은 聖神降臨이었다.
이것은 잃어버렸든 舊約成事完成을 터로하여 新約 長成期의 羊의 時期의 始作과 함께 뜻 始作 確立을 알리는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完成 牝牛的 해와 한 存在가 始作을 찾어나아가게 되는 責任分擔路程이 예수의 한 使命路程이었다. 그러니 예수는 아브라함 豫約祭物 完成基本存在였다는 것은 事實이니 이 모든 根本 完全成事가 要하는 바이었다. 이와같이 예수는 舊約時期의 全部를 찾어마추고는 根本路程으로 第一 步를 내여 놓으려 할 때에 侍從者를 擇하는 弟子 擇하는 것이었다. 曠野生活 끝나고는 이스라엘 百姓 對한 福音宣布이었다. 舊約的 信仰의 中心인 律法을 通한 行義의 路程을 變하여 信義의 노정으로 轉換시켜서 福音完成 卽 뜻 完成이 要求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이 예수 앞으로 올수있게 하기 爲한 洗禮요한이 使命을 破하였으니 弟子들을 擇하는 第二次的 路程은 두려운 路程이었다. 그런고로 弟子들 擇한 後에는 믿게하기 爲하여 異蹟奇事로서 예수 自身이 메시야라는 것을 宣布하기 始作하였다. 이제 예수가 나아가야할 路程은 하나님이 本으로 보여준 한 舊約路程을 標로 바로와 싸운 사탄 對하여서 先 이스라엘 百姓이 있었든것과 한가지로 먼츰 예수 앞에선 이스라엘 百姓의 結束이 先決問題이었다.
그러하여 사탄 攻擊은 始作할터인데 그 本되는 뜻을 完成하기 爲하여 나아가는 모세 앞에 여호아 現하여 모세를 죽이려 할 때에 모세 母子 合하여서 成事한 割禮가 完成한 後에야 積極行動하여 三日期間되는 曠野를 나아가는 決定的 對立의 點에 나간것과 같이 예수도 母親과 合하여 뜻 成事할 基礎를 보지 못하고 第二次的으로 다시금 母子가 合하여 成事할 部分을 外部로 찾어서 始作함이 弟子 擇하여서 第二次 사탄 對하여 取한 路程이니 아직 이 뜻 根本을 세우지 못하면 사탄 對하여서 積極 對할 수 없는 것이니 이야말로 예수 앞에 重大한 課業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割禮 完成者를 세워야만이 三日期間 曠野路程에 대한 出發과 같이 三日期間을 넘으려니 먼츰 割禮的 條件이 남어서 合意를 세울 수 없으니 예수는 弟子들을 대리고 나아가면서 福音을 傳하면서 根本 뜻을 세우려고 하시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弟子中 사랑하는 弟子들 中에 가롯 유다가 있었다. 이 유다를 사랑하여 하날뜻 成事를 協助할수 있는 한 相對存在로서 세워 하나님의 根本 뜻 根本的 造成을 目標하고 工作하시었다. 그때 예수는 유다를 한 對像者로 삼아 墮落根本自體인 한 해와格 存在를 取하여 세우고저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유다의 婦人을 한 해와의 存在로서 取하여서 뜻 本意를
세우게함이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뜻을 絶對 順從者인 同時에 가롯유다의 한 愛人格으로 있었다. 그래 예수는 유다 婦人을 해와格으로 사탄이 해와를 아듬두고 빼앗아 낸 모양으로 유다의 婦人을 빼앗아서 原理를 채워서 뜻 成事를 工作하시었다. 그리하여 가롯유다에게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어 代身케 하고저 하심이었다. 그래 예수는 이 해와한 自體로서 유다 婦人을 擇하여서 攝理를 始作하였다.
그와같은 基本問題가 提起되니 사탄은 全發動하여 바리새 敎人과 書記官 等等으로 大激動을 시켜 예수를 對케 하시었다.
그러나 유다만 全的으로 信과 順從이나 侍奉을 하였다면은 成事의 基本을 세울 수 있는 바이었는데 가롯유다 亦是 이와같은 原因에 對하여 不滿을 품고 行動의 始作을 하니 歷史上에 없는 自己先生 對하여서 銀 三十에 파는 根本問題는 여기서부터 始作리하는 바를 中心하고 가롯유다는 하날 뜻 아지못하고 예수에 反하는 行動이 始作이 되어 원수들과 結託하여 破壞的 行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탄 願하는 行動을 하고나니 예수는 被피 못할 立場으로 나가며 十字架上에 달릴 것을 順從치 않는 사람들 向하여 呼訴하였든 바이었다. 모세가 蛇을 든것과 같이 人子도 들려야겠다는 것은 不順, 不信, 不侍으로 因함이라는 基因으로 始作하여 사탄 侵入의 表示가 나타나니 蛇이 물어 죽을者를 모세가 든 銅蛇보아서 주검을 免한바와 같은 原因으로되는 結果를 가져올 것을 豫告한바이었다. 이 모두가 信지 않고 順從치 않는 것으로 生起였으니 至今도 信지 않으므로 必境 十字架까지 달려서라도 뜻 成事하여야겠다는 예수님의 內心을 發表함이었다.
이 모든 原因도 不順 不信으로 因한 行動이 유다로부터 外部 結託하여 죽이려는 工作으로 展開를 본바를 至今알게 될 때 크나큰 두려운 事實이라 아니할수 없다. 그런고로 예수 앞에 十字架 路程은 旣定的 路程이 아니고 不順 不信으로 因한 非原理的 路程이다. 그런고로 요한 福音 三章 十二節부터 十六節에 世上것 信지 않는 者가 어찌 하날 것 믿겠느냐. 그러니 모세가 曠野에서 蛇든것과 같이 人子도 들려야 하리라 하시었다. 다만 이 길 生起인 것은 信지 못하고 順從치 못하여서 始作한바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도 유다더러 나지 않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노라 하시었음은 불신, 不順의 存在였다는 破壞存在가 가롯유다였다는 것을 表明한바다.
그 外 예수 自身이 祈禱하시기를 아버지여 할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 被하게 하시옵소서 하신 祈禱 等을 보아도 決定한 路程이 않이었음을 말하는 말삼이다. 이리하여 十字架를 通하여서라도 예수 自身이
成事하여야할 使命分擔責任을 죽어서라도 成事하지 않으면 안될 責任이 있기에 肉身으로 成事할 수 없는 立場이니 靈的으로 成事하여서 사탄 對한 勝利路程을 세우기 爲하여서 十字架를 對하게 하는 基本原因이 有함이다. 肉身成事못하면 사탄 勝利라. 그런고로 사탄 對한 勝利的 條件으로써 靈으로라도 成事하여서 해와의 한 存在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세워 예수는 新郞이며 信者는 新婦라는 名詞로서 예수는 뜻 成事의 基本을 지어 놓고 十字架를 지시어서 三日期間을 出發코저함이었다.
그런고로 지금까지 歷史를 通하여 全하나님의 攝理한바는 해와 찾어 세우기 爲함의 目的이다. 그런고로 全世界的으로 예수는 新郞新婦라는 뜻 最高目的한 곳으로 向하게 하시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聖神을 보내심은 해와의 神을 보내신 바가 卽 예수 昇天後 온 聖神降臨이었다. 그런고로 해와는 卽 男便이 예수라는 것을 잘알므로 사람 마음에 드러가서 感動주어서 예수를 男便과같이 思慕하면은 靈的으로 天에는 예수 땅에는 聖神으로 思慕케 하여서 하나이 될수 있는 그 때만이 靈的生命의 注入始作을 보는 바로 되었다. 그런고로 根本 罪짓게 한 것은 해와니 罪짓는 直接役割은 해와의 神 聖神이 하여야할 해와的 責任分擔使命이 있음으로 聖神은 사람, 사람 마음을 通하여서 役事하여서 全部가 한몸이 될 때에 墮落하기 前 아담 程度까지는 全世界人類를 끄러올리고저함이 예수와 聖神 基本役事의 原因이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모세가 바로 對한 三日期間과 같은 길을 주검과 함께 出發키 始作하여 生命世界에로서 예수로 因한 無條件 生命要素를 받는 路程으로서 가나안 福地와 같은 天國 向하기 爲하여 원수 對하여서 各自가 예수 힘을 받아 싸워서 各自 聖殿建設하여 最終目的點인 하나님 侍실수 있는 過程으로 지금까지 나온바이다. 聖經에는 聖神을 훼방하면 容恕함을 받지 못한다고 한바는 弱한 神이니 卽 해와의 神을 表徵하여 있음을 아러야 한다.
萬一 가롯 유다가 順從하였으면 예수의 뜻에 유다 婦人은 合意하여 예수 程度까지 絶對順從과 함께 예수가 對할 수 있는 곳까지 올라오면은 聖神降臨하여 예수와 合體 理想을 造成하여서 根本創造人 祖上의 代身存在들로서서 그를 中心하고 信과 侍여서 根本뜻을 볼것이었다. 그런고로 사탄은 여기에 根本的으로 屈服을 볼 수 있는 基本條件의 成立을 보았을 터인데 그것이 靈的으로만 지금까지 目標한 點으로 되었으니 예수님 未成事로 간것과 같은 理由니 再臨하여서 뜻 完全 成事를 남겨두고 昇天하시었다. 이런고로 再臨은 반드시 肉身 몸으로 와야하는 根本意義가 남아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지금 二千年 歷史는 되풀이하는 基点에 다시금 옮겨온 바와 한가지다. 이 期間에 虛費라는 것은 유다가 信과 順從치 않은 原因으로 始作이 바리새 敎人들이 不信, 不順, 不侍로 因하여서 이와같은 있어서는 아니될 한 失敗를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바리새 敎人 向하여서 말하기를 蛇과 毒蛇의 種類들아 너희 自體들은 不順從의 血을 받고 있는 者로다. 또 너희는 사탄이가 너희 父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聖經에도 요한 福音 八章 四十四節에 사탄을 爾等의 父라고 하신곳이 있음을 아러야 한다.
이와같이 不順으로 不信으로 不侍로 다시금 너희는 배암의 하는 行事를 다시금 成事코저 하는구나 하면서 예수는 七禍의 말을 發表하여서 責望하심이었다. 이 責望 中에는 歷史的으로 蛇의 種類된 事實의 內幕을 包含하고 責望한 바이다. 그러면 歷史的으로 蛇의 血을 繼承할 수 있는 行動은 다만 不順, 不信, 不侍 하였든 原因으로 因하여 始作되었는데 至今 너희들도 不信의 種類하심이었다. 이때 벌써 예수는 山上에서 모세와 엘리야 만나서 將來 예루살렘에서 別世할바를 듣게 되었다.(누가복음 九章 三十節에서 三十 一節)
그리하여 모세의 目的과 엘리야의 目的을 完成할바를 알고난 後이었다. 벌써 十字架를 覺悟하고 하날편적 路程을 成事하여야 할 것을 아렀다. 그런고로 예수는 責望하는 말삼 中에 그 祖上들이 원수 사탄과 合할수 있는 터를 잡아서 至今까지 나와서 예수 대하여서까지 원수의 實體行動을 하는구나. 너희 中에는 하나님의 슬퍼하는 刑罰을 免할 수 없는 歷史的 열매라는 것을 發表하시었든 바가 卽 바리새 敎人과 書記官 對한 七禍에 대한 宣言이었다.
이 말삼은 全이스라엘 百姓들이 墮落的 血系를 繼承된 順序的 指摘으로 그의 全罪와 至今 너희의 罪의 行動이라는 한 열매의 行動임에 틀림없다고 斷言하시면서 責望하신바가 七禍의 責望이었다. 이 責望이야 예수의 마지막이란 行路인 十字架 路程은 멀지 않아 앞으로 바라보면서 하신 바리새 敎人과 書記官 대한 마지막 責望이었다. 그러면서 必境 너희 祖上들의 血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구나 하시면서 爾等은 爾等의 祖上의 惡한 量을 充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十字架로 殺임을 當하여 根本 罪의 目的量을 充려 하심의 目的이었다. 罪는 다 決定하였으니 罪로써 예수를 死하게 하는 그 값의 全部는 이루우며 罪의 目的物은 다 주어서 取케 하고 罪의 한 行路의 結實을 期하기 爲한 決定的 路程이 十字架이었다.
歷史를 通하여서 예수를 보내여서 뜻 成事코저 함이 目的
이었는데 예수를 보내고저하는 뜻의 길을 막기 爲한 것이 사탄의 길이었으니 이 願하든 目的 自體인 예수의 肉身에 對한 殺은 許諾하여서 사탄 要求全部는 完成할수 있는 한 段階를 보았으니 예수를 十字架의 路程까지 내놓게 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이다. 그런고로 사탄은 自己가 取할 수 있는 根本的 全部는 取한 結果를 完成하였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取코져하는 方向으로 나아갈 수 있는 路程이 卽 예수 十字架 以後의 路程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예수의 十字架의 道理를 세우셔서 聖神과 合하여서 하나님이 取할수 있는 善에 것으로 全世界를 맑히기 爲한 攝理는 始作하심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十字架를 예수 앞에 許하여서 사탄 뜻 完成에 한 量을 充라 하심은 根本意義가 있음이었다. 예수는 惡의 終局을 爲한 한 代身 蕩減者로서 犧牲함이 十字架의 路程인 것이다. 그런고로 罪의 뿌리는 끊어지는 한 段階으로 넘어서게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順從者와 不順從者를 分立을 세우기 爲하여서 예수는 全世界的으로 信의 信仰을 세워 하날便이고 不順, 不信, 不侍者는 사탄으로 自己들 所有權 判結을 지어 나오심이 歷史的 예수의 福音使命이다. 그런고로 예수께 屬하면 사탄은 떠러지는 原理로 되어 있기에 勝利하는 한 基本原理가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罪의 終局을 짓는 同時에 善의 한 始作을 보았다. 그런고로 지금까지는 사탄이 예수한테 攻擊하여 나왔지만 예수 十字架 後부터는 사탄은 保守的이고 예수는 攻擊에 第一步의 段階로 넘어가는 原理的 條件成事와 한가지라 卽 모세가 三日路程을 始作하는 原理的 基点은 始作하는 行路出發과 같은 것의 始作이 예수 十字架上에서 세운 勝利의 한 中心이었다. 그런고로 사탄은 屈服하는 段階로 예수의 便과 사탄 便으로 分岐는 確立케 하심이었다. 그 사탄은 하나님한테 무엇갖고 取할 수 있는 條件을 다 取한 樣이니 至今부터는 예수의 取할수 있는 것을 保守的으로 防備的 態勢으로 나아가는 한 許諾的 勝利路程과 같은 曠野生活과 같은 信仰生活 始作이 完成하였다.
그런고로 判結的 分岐를 지으려니 하나님은 예수를 十字架까지 내 놓은바의 原理가 있음이다. 이것은 여러 條件으로 未練갖고 있으니 卽 예수 몸까지 取할 수 있는 不順 不信의 열매였든 모세의 盤石과 石板 打破한 基本原理가 있었기에 아주 사탄의 뜻에 未練남기지 않을 全部의 淸算과 같은 根本意義를 完成하기 爲하여서 十字架라는 許함의 始作의 成立을 付與하심이었다. 그런고로 사탄은 全部 取할 것 取하였으니 뜻에 對한 未練을 남길 수 없게 되어 不順從이면 네것이고 順從과 信으면 我것으로서 世界를 向하여 自己것 取하기
爲한 한 攻勢를 取하여서 예수와 聖神은 本格的 出發을 始作하였었다. 그런고로 本來 예수(아담)는 全人類를 自己便에 屬하게 하여야할 原理이니 예수는 全世界的으로 이 目的하고 本路程을 始作하심이었다. 사탄은 끝까지 빼앗기지 않기 爲하여서 積極으로 行動하여 歷史的으로 對立을 보면서 나려오게 되었다. 全世界가 사탄 惡屬에서부터 예수 善屬으로 分立하여 勝利를 보고저 하니 하나님은 예수를 十字架에 내놓지 않으면 안될 原理的 事實의 基盤을 볼 수 있음이다. 그러니 예수도 自己의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立場의 根本이 있음이다. 이 모든 것을 이와 같이되니 유다로부터 바리새 敎人과 書記官들이 信고 順從하고 侍從하였으면 이런 것은 防止하면서 保守와 攻勢를 取하여 나오는 樣으로 勝利할 수 있는 路程이었다.
그런데 如前하게 그 원수의 結果性은 表示하니 禍根에 대한 量을 充려는구나 하시어서 二禍로서 歷史的 罪의 發展由來를 暴露하심이었다. 그 內容을 살펴보면은 사탄의 侵入路程은 不順으로 不信으로 因한 路程과 不侍의 路程을 타서 侵入이 始作하여 지금까지 그 結實點 現世까지 왔구나 하심을 밝힘이었다. 卽 罪의 由來의 侵入 經路는 아담부터 始作이었으나 그의 取할 수 있는 分岐存在는 子息부터 임으로 가인 對한 하날便 아벨 죽이는 不順과 不侍와 不信의 果로 因하여 始作의 本路程은 始作하였으니 마태 福音 二十三 章에 七禍의 根本 責望意義를 살펴보자.
그런고로 罪의 決定的 始作은 가인부터다. 아담은 뿌리였다. 順從하는 子息이면 復歸가 始作할 수 있는 中性 存在였다. 그런고로 本格的 始作의 터는 가인이다. 가인으로 因하여 始作하여서 사탄은 人類歷史를 通한 侵入路程을 봄이다. 다시 말하면 그 順序는 가인과 함과 아브라함, 모세, 石板 破, 모세 盤石 破, 요셉 家庭과 마리아 다음 現 예수 對 원수 等等으로 사탄의 侵入의 路程을 가졌다는 歷史的으로 두고 禍의 原因點되는 侵入行爲等의 根本인 不順 不信 不侍等을 보니 그의 結實을 찾아서 가라고 하여서 言命한바가 七禍의 內容 根本意義를 아러야 한다.
(1) 禍가 有할진저 外飾하는 書記官과 바리새 敎人들이여 너희는 天國門을 人들 前에서 閉하고 爾等도 入치 않고 入하려는 者도 入치 못하게 하난도다. 果然 너희들이 行動은 外飾의 行動으로 因하여서 卽 本 하나님의 뜻에서 나와야 할 存在가 딴 立場에 나오면서 하나님의 뜻에 선 듯이 行하는 者들아 너희는 틀림없구나 너희 根本祖上 되어서 犯行한 者의 가인과 같은 血統을 받고 있다함을 말하면서
그 가인은 하나님 뜻 外에서 있으면서 뜻 안에 선 者같은 樣으로 하고저 하여 그 뜻 不成事로 因하여서 아벨을 죽인바와 같이 너희도 그의 피를 받은 者와 같이 뜻 外에 서 있으면서 뜻안에 선 듯이 하여 아벨과 같은 예수 나를 對하는구나. 그의 行動의 結果로 因하여서 가인은 全人間에게 天國門을 닫고 全人類의 드러갈려고하는 門을 닫는것과 같은 行動을 할려는구나. 이 뜻 外으로 行할려는 行動이 全人類의 死亡의 始作을 보았는데 至今 바리새 敎人들과 書記官들은 그 가인과 같은 結果의 立場에 서서 예수의 血을 노리는구나. 너희는 果然 가인 血을 받은 者니 그의 結實까지 充우라 하시는 根本墮落根인 가인이 不合意한 立場에 서 있는 것과 같은 立場에 서 있다는 것을 指摘하는 바면서 至今나는 天國門을 開하고저 하는 者인데 너희들은 閉고 다른 사람까지 드러가지 못하게 하는 사탄과 같은 뜻 破壞者라고 責望한바이었다.
(2) 禍가 有할진저 外飾하는 書記官들과 바리새 敎人들이여 爾等이 海와 陸地로 行하며 敎友를 得하야 그가 敎에 入하면 二보다 培나 더 地獄子息이 되게 하난도다 하심이다.
이 根本 뜻은 노아 審判後에 사탄이 海와 陸地를 두루돌면서 自己의 뜻 맞는 者를 찾어서 그로 因하여 自己所有로 삼아 다시금 地獄의 子息을 불린것과 같이 너희도 至今 함의 行한 行動의 結實의 한 子息됨이 틀림없는 사탄과 같은 行動으로 뜻의 始作을 하고저 하는 行動이 나에게 對하여 함에게 取하든 사탄이 즐기는 行動을 하듯이 自己로부터 사탄이 터를 잡고 다른 兄弟들까지 그 뜻에 協助를 하게하는구나. 그래 地獄子息을 많게하기 爲하여서 行動하는 함의 한 行動의 結果로 나타나서 너희는 그의 結果인 種類이라함을 指摘하면서 너희 하고저 하느대로 行하여 사탄의 要求하는 罪의 量을 充라하시는 뜻을 中心하고 責望하신바다. 卽 나에게 오면 地獄을 避하는데 나에게 여러 사람까지 올려는 것을 막는구나 하시어서 責한 內容이었다. 다음.
(3) 禍가 有진저 瞽者가 되어 他人을 導하난 者여 爾等이 言하대 誰던지 聖殿을 指하여 盟誓는 虛疎하거니와 聖殿의 金을 指하야 盟誓한즉 守할지라하니 爾等은 愚民이요 瞽者로다. 何者가 大하뇨. 그 金이냐. 金을 聖케 하는 聖殿이냐. 하면서 다음은 같은 뜻의 內容으로 重複하여서 말삼하신바이었다. 이것은 무슨 뜻을 表示함인고 하면은 아브라함이 信의 祖上이나 그의 行함에서 代身祭物은 盟誓로 들인 것이나 그것은 헛것으로 할 수 있었으나 이삭 實體祭物은 하나님의 盟誓를 세우시었다는 것을 指摘하시어서 말한바이었다. 그와같은 聖殿과 같은 許諾的 規例로 되는 뜻은 헛될수 있으되 聖殿 金과 같은 예수한 自體는 헛될수 없다는 것을 말함이었다.
舊約的 行例 全部는 廢할수 잇으나 예수의 “言”은 廢할 수 없다는 것을 指摘하시어 말삼하신바이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이 瞽者와 愚民의 立場을 떠나서 하날과 땅을 갈렸으면은 이삭까지 犯하지 않이 하였을 터인데 그 時 瞽者와 같은 貌樣으로 行한 것이 사탄 侵入을 본것과 같이 되어 나중에는 全子孫에게까지 侵入하는 사탄의 길을 잡은바와 같이되어 盤石까지 打는 結果의 始作도 애급 生活이 있었기에 다라는 것을 말하면서 너희도 아브라함의 宗孫이지만 分別하여야 할 時期에 서 있는 아브라함의 立場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對하다가 예수까지 犯하는 行動이 되리라 한 事實을 들어서 하날 뜻을 分別하여서 對하여야 될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은 아브라함의 態度와 같은 結果의 始作을 보리라 하시어서 指摘하시어 말삼하신 바이었다.
(4) 禍가 有할진져 外飾하는 書記官과 바리새 敎人들이여 爾等이 薄荷와 茴香과 芹菜의 十一條를 納하되 律法의 더 重한 義와 仁과 信은 行치 아니하니 此를 行할것이요 被도 棄치 말것이니라. 瞽者가 되어 他人을 引導하난 者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하시었다.
이 內容은 모세가 바라는 바는 十誡命과 같은 律法 全部를 要求하여 나오는 中인데 지금 그것 버린 立場에서 하나님의 뜻을 反하였으니 이제는 十誡命도 쓸데없다하는 生覺으로써 二 石板을 깨시었다 그리함과 같이 너희도 그와 한가지로 十誡命 中心 本體와 같은 예수를 아라보지 않고 그저 枝葉部分과 같은 十一條 등이 한 쉬운 것으로 하나님의 뜻의 全部를 成事하는 表示禮로 하는 者들아 結果에 가서는 하나님의 뜻 背反하는 結果를 이루어 예수까지 破하게 하는 行動으로 나타나리라 하시어서 그의 中心뜻을 몰라서 받들지 못함의 失敗의 基因과 같이 너희 行動이 如前히 모세 十誡命 앞에 나타난 者들아 한가지로 뜻을 떠나 사탄과 짝하는구나. 그러니 結局에는 모세의 二石板 破하는 것과 같이 되리라 함을 指摘하여 말함이었다. 다음은
(5) 禍가 有할진져 外飾하는 書記官과 바리새 敎人들이여 盃과 盤의 表面은 淨潔히 하되 그 內에는 討索함과 不義함으로 充滿케 하난도다. 瞽者가 된 바리새 敎人아 盃과 盤의 內을 淨潔히 하여야 表面이 또한 淨潔하리라 하시었다.
그 內容은 모세가 盤石水를 내어 먹일적에 그 外面上으로는 좋은 듯 한 것이었으나 內面的으로는 討索함과 不義가 充滿하였다하심이었다. 卽 하나님과 이스라엘 百姓이라는 外面上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된것과 같은 것이나 內面에 들어서는 원수가 不義의 基本 터를 잡는 行動의 結果를 完成하였구나. 卽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 되었구나. 그런고로 먼츰 盃(이스라엘 百姓)과 盤(하나님의 몸)의 內를 깨끗이 하여야
만이 그 表面은 自然 깨끗한 것이라 하시면서 먼츰 하나님과 이스라엘 百姓의 뜻 하나를 完成한 깨끗한 후에야 그 모든 表面의 全部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난도다 하시어서 指摘하신바다. 이것은 이스라엘 百姓 自體들의 하나님의 뜻 中心 떠난 行動의 基因으로 仁하여 不義의 한 터를 자아내며 百姓의 더럽힘이 하나님 더럽힘으로, 땅 더럽힘이 하날 더럽힘으로 되게 되었다는 것과 한가지로 모세 盤石 두 번 침도 너희들이 뜻을 소흘히 하였기 때문에 친것과 같이 너희도(바리새 敎人) 뜻을 그와 같이 對하니 지금 예수 나 自身을 다시 打서 盃과 盤을 더럽히는 者로 되려는구나 하시어 너희가 땅과 하날을 다시금 犯할려고 하는 結實이 되려라 하시어서 責望하심이었다. 結果로 十字架까지 지어야되리라 하는 內容을 表明함이었다.
(6) 禍가 有할진져 外飾하는 書記官과 바리새 敎人들이여 灰漆한 墓와 如하니 外로 見하기는 美하나 그 內에는 死人의 骨와 모든 더러운 것이 滿하도다. 此와 같이 爾等도 外로는 人에게 義를 示하되 內로는 奸詐와 惡毒이 充滿하도다 하시었다.
이것은 요셉 家庭과 마리아가 世上의 한 義를 세우고저 하는 行動으로 基因되어 死亡의 터가 始作되어 그의 全部가 그 上로서 한 始作이 되어 結局에 가서는 하나님 앞에 第一 원수의 行動으로 사탄의 즐기는 터가 되었다는 것을 指摘하여 말함이다. 이런 結果로 나왔으니 나는 果然 世上에서 容納받지 못할 立場에 선바이니 너희들이 원수와 合한 行動은 果然 當然하다. 너희들이 要求하는 대로 行하려므나 하여서 責望하심이었다.
(7) 禍가 有할진져 外飾하는 書記官과 바리새 敎人들이여 爾等이 先知者의 墓를 造하고 義人의 碑를 飾하며 曰 萬一 我等이 祖上時에 在하였다면 我等은 先知者의 血을 流하기를 圖謀치 아니하였으리라 하나 然함으로 爾等이 先知者를 殺한 者의 子孫됨을 自證함이니 爾等이 祖上의 惡한 量을 充하라. 爾等 蛇과 毒蛇의 種類들아 어떻게 地獄의 判結을 避하겠느냐. 然함으로 我가 爾等에게 先知者와 智慧가 有한 者와 書記官들을 遺하며 爾等이 其中에서 殺하기도하고 此城에서 被城으로 逼迫하기도 하리니 地上에 義人의 血을 流한 罪가 다 爾等에게 歸하되 義人 아벨의 血로부터 聖殿과 祭壇間에서 殺한 바라갸의 子 사가랴의 血까지니라. 我가 眞實로 爾等에게 論하노니 此事 다 此世代에 歸리라 하시었다.
이 말삼은 全 바리새 敎人과 書記官을 至今까지가 歷史的 血統을 繼承받아온 者라는 것이 틀림없는 者들이니 또 다시금 先知者와 義人의 墓를 飾하여 나서는구나. 卽 다시금 예수 對하여서 이와같은 行動을 하는구나. 그러면서 自己들의 行動은 가장 善行인 듯이 外飾하면서 사탄의 血統을 받아온 그 目的
充當케 하고저 하는구나. 그러니 너희들의 行動의 結果는 사탄이 끝까지 自己의 要求되는 것의 分量을 全部 이루어주고저 하는 行動이로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의 要求에 應하여 罪의 量을 다 充워 주마하시면서 앞으로도 너희는 義人과 先知者의 血을 流케 할것이나 이 모든 罰은 너희가 받으리라 하시면서 現實의 바리새 敎人과 書記官 對하여서 最後的 態度를 宣言하면서 責望하신 말이었다. 그런고로 이리하여서 사탄 對한 合意 最高目的을 達成할려면 하려무나 하는 決意를 表示하심이었다. 이와같이 하여 歷史的으로 侵入한 사탄의 全結實은 한 段階를 채워주기 爲하여서 十字架까지 覺悟하면서 七禍의 根本 歷史的 根據로되니 너희들도 因하여 血統된 歷史的 義人의 血값은 누구보담도 너희가 받으리라 하시어 누구보담도 큰 禍中에 서 있는 것을 表明하여 그 目的 達成할려면 하여라 하심이었다.
第六 節 예수 十字架의 勝利的 根本意義와 勝利的 信仰者
十字架로서 사탄의 舊約時期에 더럽힌 要求열매를 淸算하기 爲하여다. 왜 淸算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면은 출애급 路程은 예수의 表示的 根本路程의 本으로 되었기에 其 中에 사탄한테 侵入받은 二石板과 盤石으로 因하여 예수 몸까지 犯할 수 있는 한 失手를 淸算하기 爲하여 十字架짐이다.
예수 하나 모 하나가 사탄 全目的 結實의 存在였다. 그런고로 예수 十字架는 사탄 全部와 罪全部의 目的物이었다. 예수 生하여 있는 限, 사탄 全部와 罪全部는 生하여 있는것과 같으니 예수 주검= 全사탄+ 罪全部 주검과 같은 蕩減을 完成하기 爲할려니 十字架를 지심이다. 예수 죽음으로 歷史的 罪를 蕩減하며 사탄으로 하여금 뜻 成事흐는 곳에 터를 없게하기 爲함이다. 다시금 復活로서 다시금 하날 뜻 繼承成事할 수 있는 하나님의 最高權限으로 因한 사탄이 侵入 못하는 生命權位를 始作케 하심이다. 卽 이곳에서 사탄과 하나님과 終局的 合할 수 없는 分岐點을 보여주었다. 사탄이는 그 目的達成 最高部分은 죽일 수 있는 部分까지나 살릴수 있는 곳까지는 하나님 밖에 없는 부분이니 이곳은 根本的으로 사탄이 할 수 없는 部分이니 사탄이 비로서 分岐를 始作하게 하시는 根本 뜻이 있음이다.
그런고로 十字架 死는 사탄의 最高 實力의 結果를 表함이고 復活은 하나님의 特有權內의 部分이니 이곳 處하면은 사탄은 處할 수 없는 것이니 너는 至今부터 나와 떠러진다는 한 分點의 始作이 十字架로 因함이다.
사탄은 살리는 權없으니 하나님은 사탄 갖지 못한 權으로서 十字架 以後에 復活의 攝理이다. 十字架
의 道는 信을 세우심은 不信을 對하여 基本 反對되는 하날쪽의 始作을 다시찾는 始作이니 信을 세우심이다. 卽 根本 아담 해와가 信지 못하였기에 墮落이었었는데 根本에서 信을 두고 不信이 었든 것이 사탄이었으니 信이면 하나님의 便이었다는 根本意義로서 信을 세우심이 目的이다. 信는 곳은 墮落前까지 向上할 수 있는 터이다.
예수는 第二 아담이니 처음 아담 完成者니 根本 墮落段階는 예수부터 向上할 수 있는 原理로된다. 墮落은 不信으로 因하여 아담 以下로 내려왔든바나 信으로 아담 以上 위로 向進하는 基本點이니 信을 세우심이다.
예수는 罪 짓기전 아담이니 예수 붙잡는 것은 卽 信는 일이니 아담 以上에서 付與되는 天國生命의 注入은 原理的 復歸로서 因함을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信으로 예수로 通하여 하나님을 對할 수 있는 生命成事의 基礎이다. 이 터가 確固하여야만이 모든 뜻 成事의 始作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의 全部의 愛를 세우심은 信成事한 터우에서만이 始作을 볼 수 있는 바이다. 사랑은 生命注入의 根本이다. 이것은 예수를 思慕하는 聖神力活과 合하여 成立된다. 그런고로 愛를 세우심이다. 所望을 세우심은 아담 해와가 所望成事를 하지 못하였으니 우리로 因하여 所望인 目的地를 復歸코저 하시어서 基督生活 三要素를 세우심은 全部가 基本目的 達成을 目標하여서 세우심이다. 또 十字架로서 勝利하여서 무엇을 表示하였는가하면 사탄의 血는 靈體的 實體인 天使長 누시엘의 血을 받아서 死亡이었든바를 다시금 예수로 靈體적 實體로서 靈的 血을 받은 길을 막어 生命血을 繼承하기 爲하여서 復活体로서 昇天하신바의 根本뜻이 있는 同時에 全人類를 靈的으로 다찾아서 뜻 成事까지 옴이 根本意義를 아러야 한다. 萬一 十字架 아니었더면 靈과 肉 合하여서 成事코저 하시었다. 그렇다면 再臨은 不要求의 原因이 成立될것이었는데 그것은 사람과 사탄 合함의 始作이 分立하여 至今까지 靈的으로 찾는 力活을 예수는 하날의 사랑을 갖고 땅성을 對하여 美的存在를 取하여 나온바의 基督敎信仰歷史다. 이런고로 十字架의 意義를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사탄은 不信, 不順, 不侍로 取케하고 信고 順,侍로 하날로써 歷史的 고마운 分岐는 取하여왔다. 그런고로 예수 以下부터 사탄은 失敗한 發足을 짓게 되었다. 이리하여서 사탄 相對하여 바로 앞에 모세가 三日期間을 出發한 始作을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信仰生活은 全部 舊史 출애급부터 가나안과 같은 靈的 路程이 勝利의 路程으로 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出發할 수 있는 諸條件을 具備하였다. 卽 예수는 勝利的 蛇으로 모세가 第二次 手를 넣어 癩病을 낫게한
것과 같은 生命의 길로 生命의 血를 世上에 줄수 있는 것으로 그 다음은 信成的 聖神合함에서 曠野를 向할 수 있는 具備條件成事를 지어서 믿는 信者와 合하여 出發케 함이다. 그런고로 먼츰 믿고 나서려할제는 世上과 하날, 사탄과 하나님과에 바로와 같은 싸움으로 끝까지 참고 勝利하여야 하는 者가 되어야 出發한 것이 事實과 같은 한 表示的 歷史와 그 路程으로 始作케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信고 이런 世上 條件 勝利할바가 信仰生活한 出發點이라는 것은 歷史的 表示路程이었음으로 이와같은 路程으로 因하여 나아가는 그 生活 中에서는 絶對信仰하면 萬事勝利나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百姓과 같은 것의 如實의 表現化를 보게 되는 바가 事實이다. 三日期間을 찾어 나아가는 이스라엘 百姓 앞에 원수의 한 對할 수 있는 紅海와 曠野苦難生活과 아멜렉 攻擊 等과 蛇等의 出現할 수 있는 길인 信, 不信을 左右로 놓고 出發하는 것이 우리 信者의 한 路程이다. 그런고로 曠野路程은 한 十字架를 지어야만 된다는 것이 한 原因으로 된다. 그런고로 뜻 成事하는 者에 너희는 누구보담 나를 사랑치 못하는 者는 나에게 合當치 않고 나를 第一 사랑하여만이 된다는 宣言을 歡喜하는 者야만이 나의 弟子가 된다고 하심이다.
第七 節 나를 더 사랑하라는 根本意義
지금까지 不信世界에서 信仰世界로서 出發할려고 하려면은 誰보담도 예수 自己를 사랑치 않으면은 안된다는 原因의 程度는 如何인 程度까진가 하면은 聖經에 말하기를 “ 我가 世上을 和平케 하려 온 줄로 知지말라. 和平케 하려온 것이 아니오 兵器를 起기로 來노라. 我가 온 것은 子이 父와 不和하며 女이 母와 不和하며 婦와 姑와 不和하게 함이니 人의 仇가 其家內의 食口니라. 父나 母를 愛하기를 我보다 더하는 者는 我에게 合當치 아니하고 十字架를 負고 我를 從치 않는 者는 我에게 合當치 아니하고 自己 生命을 惜하는 者는 特以 失코 我를 爲하야 生命을 失는 者는 特以 索하리라 하시었다.
이와같은 말삼을 宣布하심은 예수 當時 時代的으로나 모든 方向으로 보아도 容恕할 수 없는 一大 革命的 宣布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生活하여온 全部가 하나님의 뜻 成事할 수 있는 家庭이면서 하날뜻 成事할 수 있는 家庭이냐하면은 그렇지 않다. 前日의 그 家庭은 全部가 사탄의 뜻과 理想을 發展시키는데 도움을 推進시키는 길인 同時에 하나님 앞에는 미워하는 그 家庭이었고 그 生活舞臺
이었다. 그런고로 지금까지 사랑하든 父母, 兄弟, 妻子들은 사탄이 기뻐하는 生活의 사랑 舞臺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없는 家庭이었다. 하나님이 善義를 높여 찾고저 할적에 惡의 屬한 터를 지나서 善에 屬할 수 있는 곳이 始作되어야만이 始作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家庭生活하면서 살던 너희가 그 家庭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 믿고나서 예수를 더 사랑하여만이 하날의 한 뜻 成事의 뜻을 볼 수 있는 한 뜻이 있는바이다. 10程度로서 예수를 사랑하면은 昔日 사탄 사랑함을 比하는 級까지니 그런고로 昔日 사탄의 舞臺에서 사랑하든 以上의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은 사탄 取하든 한 터위에서 始作하는 樣이 됨으로 昔日 10 사랑보담 남을수 있는 10以上의 사랑이 始作되어야 하날 사랑할 수 있는 한터를 잡을 수 있으니 예수는 사랑할래니 이런 矛盾과 같은 한 宣布하심이다. 10사랑이면 10사랑으로 蕩減하고보니 아무도 남지 않는 樣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善한 것으로 한터의 사랑 部分이없기에 10사랑 以上을 要求하심은 全部가 하나님 사랑을 注入하고저 하는 根本意義가 있는바이다. 이 部分이 始作됨으로 所謂 重生이 始作의 基本點 始作과 같이 하날 사랑 對하여 生命 始作의 基因을 보니 이런 時期에 難한 宣布가 卽 사랑에 對한 宣布이었다.
이와같이 하날사랑 찾어나서니 사탄은 極的으로 그런 路程을 지키려니 食口를 通하여서 對立케하는 工作이 始作되니 卽 사람 中心하고 하나님과 사탄의 對敵을 보니 直接 仇가 家庭食口라고 하심의 直接對仇者된다는 基本原因이었음이다. 그러나 그것 問題하지 않고 한 十字架가 될지라도 끝까지 生命다하여 勝利하여야할 人生의 根本義務的 關係를 打開하여야할 根本的 意義였다하심의 意義있는 한 宣言이었다. 이런 信觀 目的을 達成하는 信仰 生活者가 몇 名이나되는가. 傳하여야할 예수의 心情과 받으여야할 人間의 責任的 使命의 一로써 世界가 始作을 얻는 때가 언제일까하고 바라든 責任的 使命에 對하여서 얼마나 서러워 하였을까. 우리로 最後的 勝利한 十字架의 路程을 成事하는 것과 같은 뜻을 生覺하여서 사탄 敗케 하는데 如何한 十字架라도 개이치 않고 나아가는 者라야만이 예수의 弟子가 될것이었다. 또 新郞되어야겠으니 예수 對한 斷的 愛이 各自가 所有하여 하날 生命繁殖을 하여야할 責任이 있기에 이런 使命을 圓滿히 完成하기 爲한 宣布가 根本意義를 둔바이었다.
第八 節 地獄가서 傳道하는 예수의 根本意義
本來부터 사람이라는 存在에게는 地獄이라는 있을 수 없는 곳이 었는데 사탄의 誘引받아 分岐를 본 後부터는 地獄이라는 非原理存在가 生起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 地獄가게 된 것은 勿論 하나님의 원수되는 罪와 結託한 報答의 곳임은 틀림없으나 創造할전부터가 원수될수 있었든 存在로 根本的으로 않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 靈들도 墮落됨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이와같은 不順者의 靈의 處罰하는곳이 卽 地獄이다. 이와같이 곳에 와 있는 靈도 亦是 墮落된 世界로부터 始作한바는 事實的의 原因이니 이 根本責任的問題는 全部가 사람들이 不足함이 있다할지라도 그 根本責任은 墮落하게 한 아담,해와가 根本的 責任을 져야하는 明白한 基本事實이다.
그런고로 地獄간 것은 結局은 아담 때문에 이와같은 곳이 生起는 터를 지었으니 이곳까지 第二 아담 格으로 온 예수 앞에는 責任的 使命이 짊어지게되는 한 目的이 남어있음이었다. 그들도 根本은 나한테 屬하여야 할 存在였든 것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들 한테도 한 生命받을 수 있는 길을 세우고저 함의 始作을 보아야 하겠으니 地獄까지 가서 傳道하지 않으면 안될 根本目的이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 十字架 後부터는 地上뿐이 아니고 地獄部分까지 한 生命의 길이 티어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地獄에 있는 곳까지도 蘇生할수 있는 길을 찾어 無限한 苦와 싸워가면서 말할수 없는 먼 期間을 두고 救援復歸路程이 始作됨을 아러야한다. 卽 그들의 犯한 罪는 그 몸의 짐이되어 가시가 되어 그집을 다풀어 맑혀야만이 빛을 찾어 長成할수 있는 特赦의 路程始作을 봄이었다.
그런고로 靈의 世界는 善에 對한 刺戟은 强하지만 惡에 對한 刺戟은 甚하지 않기에 惡이 그 靈人体로부터 잘 分立하기 難함으로 그 期限的 規定은 無限數에 比하여 長期間이 要하면서 長成 善을 向할수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地獄傳道 根本意義가 있음을 아러야 한다.
그래 사람은 肉身生活에는 罪에 對한 刺戟이 强함으로 速히 善을 發達시킰 있는 것이 根本創造原理이었다. 靈人 世界는 理想만으로 充滿하게하는 것이 根本뜻으로 되었기에 惡에 對한 處置方法은 創造理想 原理가 아니기에 果然 그 期間的으로 善에 向할수 있는 對向을 볼적만이 生命要素를 볼수 있도록 되었다. 그런고로 地獄에 가서 있는 者들도 善한 根本을 基本으로 하여 惡에 對比하여 善 長成을 도움받을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런고로 사람이 地上에서 善만을 志向한 所有者가 되면은 全的으로 理想要素 善을 取할수 있는 것이 基本이니 道라는 것과 理想準備라는 地上이 原理의 터로 되었기에 예수도 地上 않이고는 뜻 成事할수 없갔기에 地上降臨의 根本意義가 있음이다. 地獄에 예수의 生命要素는 한 터의 始作을 잡는 양이니 이 터에 附合할 수 있는 善한 것을 놓여야만이 蘇生할수
있는 部分要素를 받을 수 있다. 이리하여 地獄도 한 惠澤의 始作이 예수 十字架로부터 始作이다. 사탄이 예수가 地獄 傳道할수 있는 길을 許與치 않을수 없었으문 根本原理로 되는 主人自體의 復歸의 터의 始作을 주었으니 할수없이 許與한바도 아러야 한다. 卽 하나님의 生命蘇生權限은 天宙 어디나 始作되는 것이니 地獄에도 한길이 始作됨이다. 聖經에는 베드로전서 三 章 十九節에 예수가 또한 그 神으로부터 去사 獄에 있난 神에게 宣布하신지라. 그들은 昔日에 노아 이 일에 方舟를 豫備할동안을 하나님이 久忍시고 侍실때에 順從치 아니하던 神이라하시었고 또 베드로 전서 四章 六節에 死者에게도 福音을 傳한 것이 無他하라. 其 肉體로는 人처럼 審判받고 其神으로는 하나님처럼 活게 하심이니라 하시었다. 이 말삼들을 보면은 特別한 恩赦를 가르쳐주는 根本뜻을 알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地獄 撤廢理想이 完成하여야만이 하나님의 뜻 圓滿成事라 할 수 있다. 이 時期가 果然 언제나 되겠는지 其 時期는 限定 못한다.
第四 章 예수 昇天 後도 攝理하는 責任的 根本意義
本來 하나님의 뜻을 中心하고 지음받은 人間 祖上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終局 目的 段階級까지 못하고 墮落하게 되었다. 萬一 墮落 없이 完成하는 자리까지 나아갔드랬으면은 하나님의 몸과 함께 地上에 地上天國으로 展開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고로 아담 해와로서 뜻 完成部分까지는 아직 남아있는 한 過程에서 墮落하였다. 그런고로 처음 아담 해와는 未到達部分부터 向上으로 前進함이 아니고 退步의 一路로서 밟게 되었다. 그런고로 그로因하여 非原理的 子女 繁殖으로 하나님의 미워하는 世界를 이루어 나온바이다. 그래 하나님은 다시 찾고저하니 이 全世界에 人間을 全部 墮落하든 未到達部分이었든 아담 해와가 하나님 對하든 곳까지를 옮겨 놓아야만 하나님은 根本 뜻이 完成할수 있는 곳으로 展開할수 있는바다. 그래 아담 해와가 全人類를 合하여서 墮落 前級까지 옮겨 놓으여야 하는 責任的 使命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十字架로 因하여 이 基礎잡고 人間은 根本墮落시킨 同級까지 올려 놀으여야할 責任이 完成을 보아야만이 그 以上 部分으로 예수도 第一步를 옮길것의 基本되는 理由니 그 以上을 成事코저 하는 點은 卽 하나님을 中心한 아담 해와가 地上에 完成할 수 있는 世界人間에 숨어든 어두움과 사탄을 除하는 歷史를 두고 攝理하지 않으면 안되는 理由다.
그래서 아담 해와가 떨어져 나려오든 部分級은 하나님 보담 낮은 部分 生命級이었다. 生命級은 靈人体의 한 長成한 部分을 表示하는 것인데 舊約時期를 通하여 한 基臺를
잡아주는 靈形体的 基臺위에 新約的 生命級까지 끌어올리는 예수의 남은 使命分擔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날에 昇天한바는 먼츰 하날에 있는 聖徒까지 가져다 놓으여야 아담이 墮落한 部分을 充當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이 部分까지 채우려는 役事가 聖神(해와의 神)과 協助하여 基督敎 歷史發達을 움직여서 나온 原因이다. 그런고로 하날 가 있는 聖徒도 至今까지 努力하는바는 地上에 빨리 生命級까지 復歸的 事業의 歷史를 도와서 빨리 뜻 完成 標準까지 到達을 보고저 하여 온 하날은 總動員하여서 地上을 對하여왔다. 그런데 사탄은 이에 反하여 地上 뜻 成事의 길을 사람 通하여 反對하여서 對立을 보여 왔든바다.
그러나 사탄은 敗하여 내려가는 向面으로 前進하여왔다. 그런 中에 歷史를 通하여서 사탄은 信者를 迫害하여왔다. 사탄은 먼츰 主權 國家들을 達成하였었기에 그 主權機關을 通하여서 基督虐殺主義 等으로 反對하여 나왔다. 惡이 主權 잡았으나 漸次로 하날쪽으로 옮겨지게 하는 格으로 되는 中 基督에 屬한 義人은 많은 殺害를 입어왔다. 그것은 하나님이 殺害받게 하는 理由는 이 義人들의 血가 惡의 血에 더럽힌 世界를 씻는 代身蕩減으로 歷代의 血을 밝혀왔든 바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血과 合하여 世界를 맑히는 樣으로 至今까지 왔든바이다. 이와같이하여 世界 더럽힌 어두움의 蕩減되어 맑혀서 하나님의 뜻을 成事할수 있는 時期를 苦待하기 爲한 準備的 時期가 卽 예수와 聖神과 하날 聖徒들과 땅 聖徒들이 하여온 役事이었다. 그리하여 빨리 世界를 맑혀서 어두움을 淸算하는 時期가 卽 再臨前 審判時代라 하는 것을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이 땅에 全部가 하나님의 理想建設에 第一步를 始作하는 것이 根本目的 地上再臨부터 始作되는 바의 目的이 되어있다. 그런고로 아담 해와의 自體들은 하나님을 中心하고 한 사람 成事 夫婦를 要求하여 至今까지 靈으로는 相對되어 役事하여온 하나님과 예수와 聖神은 한 肉身e고 根本自己들이 墮落하지 않아서 나아갈 部分 卽 뜻의 夫婦는 成事못하였었다. 그런고로 땅 向하여서 信者에게 新郞 新婦라는 歷史를 두고 그 한 터 成事를 本삼고 어두움을 除하며 完成할수 있도록 苦待함의 全目的이니 이 時期와 함께 하날도 完成할수 있는 基本理由가 結點의 한 始作이 됨으로 天宙의 全聖徒들은 合하여서 目的成事를 하날은 苦待하는 바다.
그리하여 墮落하지 않고 完成한 創造理想人 夫婦를 찾어서 全人間의 祖上으로서 間接的 繼代와 같은 養子와 같이 信徒였든 者들은 땅으로부터 하날 完成할 수 있는 始作이 보는바가 事實 原理로 되어 있다. 그런고로 이리하여 하나님의 몸으로 合한 한 夫婦의 出現成事 時의 잔치가 卽 어린양의 잔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人間이 根本 아버지 어머니를 찾으시어 侍시는 첫 出發
日이 卽 再臨成事的 重要點으로 되어 있다. 그런고로 땅의 創造人間祖上을 이제야 찾어 놓는 것이이 이것이 하나님의 創造根本理想이면서 本目的의 始作을 成事하고부터 하날 生活始作이 되는바를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至今까지 하나님 아바지분으로 어머님 없는 아바지로써 歷史를 通하여 왔든바를 사람은 아러야 한다. 어머님 없는 하나님 아버지였든 根本 뜻을 生覺조차 못한 父母잃은 子息을 볼적에 아바지의 그 앞은 痛憤이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간 人生이 未解決的 苦痛은 歷史를 通하여 나온 事實이었다.
그런고로 하날 아버지 어머님의 成立이 되어야만이 子女의 家庭組織成事가 始作할 수 있는 것이 目的이므로 聖徒나 하날 사람은 이 한날을 기리 苦待하여 왔든바이었다. 그런고로 땅이 完成하여야할 存在가 卽 再臨主니 이 분은 地上에 있다 할지라도 하날 全部는 그분을 아버지와 어머님으로 侍시여만이 이루는 것에 代身이루어 채우는 歷史를 하여서 하날 聖徒는 우리를 찾어 合하고저 하는 바의 根本意義이다. 하날 사람이나 땅 사람이나 이 根本 아버지 어머님을 侍시여야만이 땅에서부터 永遠生活 始作으로 그 땅 夫婦는 하날 夫婦로서 永遠家庭建設이 始作되는 時代가 卽 再臨主 아바지 格으로 오신 분이다. 그런고로 이때가 빨리 오게하기 爲하여서 예수와 聖神은 힘써 왔든 바이다. 그런고로 再臨基臺 잡아주는 役事 時期가 예수 昇天後 攝理하는 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이와 같은 한 뜻 成事에 第二 아담 예수가 未完成한 理想部分 第三次 아담 格으로 現아 根本 뜻 完成하여서 夫婦로부터 새로운 天國家庭建設에 目的과 合하여 血代 轉換하는 新郞 新婦의 聖禮式으로 全世界로 傳하여 하나님의 몸 部分을 分配받아 根本 理想까지로 옮기는 道가 卽 再臨主 侍시는 道며 아바지級 完成部分 靈人体를 造成하는 生靈의 道가 萬天宙 合하여 始作하는 것이 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至今은 예수와 聖神으로 因하여 長成한 生命級까지 온 者들에는 반드시 아담 해와라는 것으로 逢着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墮落前 아담級까지 와서 한 夫婦級을 成事할 수 있는 格者라는 것을 敎示받는 信者도 至今은 많아야 한다. 그리하여 再臨主 根本人間祖上 아바지를 侍실수 있는 터를 세우기 爲한 基本準備의 터는 世界 각곳에 始作하고 있는 것이 事實이다. 그런고로 예수와 同級的 生命級者가 되면은 主하고도 敎示함은 있는바다. 그런고로 끝날되면은 여기 저기에서 主라고 하는 者가 많이 나와야 한다. 그 中 한 뿌리는 한곳이다. 그곳은 全天宙에 숨은 하나님의 全部를 合하여 發表하는 곳을 向하여 準備的 完成者로 하날 家庭 過程으로 한 過渡 分期를 잘
잡아야하는 根本 뜻을 아러야 한다. 그리하야 子女 根本 理想組織으로 하날인 根本 땅이 始作을 본다는 바를 아러야 한다. 이와같이 生靈體까지 完成하여만 하날 理想人型体構造를 完成하는 바이다. 이 뜻을 成事할려면은 侍시는 生活世界로 世界主管復歸에로 될 것이다. 그러니 再臨의 雲乘 降臨이라고 譬似한바를 아러야 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洗禮요한이라 하심과 같이 같은 理由로 뜻 中心하고 말한바이게 뜻은 하나이나 사람은 두 사람과 같은 理由는 말하였기에 論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예수는 어찌되나하면은 長子로서 모든 사람의 侍시는 中心의 本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중 오시는 再臨主가 根本된다는 바를 알바는 두말 할바도 없다. 이 분 中心하고 땅이자 하날의 한 部分이라는 始作이니 六千年의 歷史完成과 하날의 한 目的 達成의 始作을 보는 事實이니 世界의 기쁨이며 하날의 기쁨이로다. 이런 時代가 와야만이 全部 하날뜻은 한 完成의 基臺는 잡아 嘆息없는 世界에로 第一步의 始作을 볼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聖經 마태 福音 十六章 二十七節에 人子가 父의 榮光으로 天使들과 偕來하겠으니 其 時에 사람마다 行한다로 報리라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再臨은 아바지로 오시는 바도 밝혀있음을 아러야 한다. 以上과 같은 原理로 볼 때 우리도 靈으로 이룬다는 者가 하나님 앞에 어떤 者라는 것은 結論的으로 各自 解決로 맡기자.
第五 章 復活의 根本意義
信仰歷史的으로 全人類는 누구나 勿論하고 復活의 理想을 다갖고 왔다. 그러나 그 復活은 至今 基督敎信者의 全所望의 對象으로서 歷史的 한 憧憬의 한 中心이다. 그런데 復活에 對한 그 中心의 意義를 무엇 標準하고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같은 肉身復活을 基本点으로 하고있는 바가 現信仰生活者들이 바라는 全部로 되어있다. 그리스도의 復活은 무엇을 意味하는 바며 우리들의 復活은 무엇을 意義로서 찾게되는가 하는 問題에 逢着하게된다. 예수의 肉身復活은 사탄이 干涉을 받지않은 하나님의 再出發点을 세우기 爲한 하나님의 勝利的 復活權限을 造成하기 爲하여 肉身復活을 成立시킨바다. 그리스도의 復活로 因하여 우리信者들이 肉身復活을 할수있다는 基台를 完成하심이다. 즉 예수 復活이 없다면은 우리 肉身은 全部가 死亡圈에 속하여 있기에 하나님의 生命을 注入받아 다시금 長成할 수 없는 더럽힌 몸임으로 그리스도의 復活로 因하여 死亡의 터로된 肉身들이 한 復活要素 卽 그리스도의 生命을 다시금 蘇生 할 수있는 한 基台를 造成하기 爲함에서 그리스도의 復活은 根本死로 肉身을 生命肉身으로 始作 할수 있는 許與의 始作을 봄이었다. 그런고로 信仰生活함으로 內的生命成事 수 있는 基本터가 그리스도 復活로
因하여 始作함이다. 그터우에 生命을 完全히 長成시켜서 나와 다시금 우리는 復活을 바라는 第二復活인 再臨復活을 바라게되는 바다. 예수 十字架死는 死亡의 터를 淸算함이고 復活은 다시금 生命의 길로 永遠히 始作할 수 있는 基台를 닦음이었다. 사탄이 主管下에서 있는 바를 分岐케한 바는 그리스도의 復活로 因함이니 사탄이 없어서 예수 生命받으니 復活터를 우리 몸에 始作하였다.
그런고로 예수 復活과 함께 死亡의 肉身에서 다시금 創造原理的 生命蘇生받은 잃어버렸든 바를 始作하니 한 復活을 표시함이다. 復活이란 말도 우리 祖上 아담해와가 肉身을 더렵혔든 바를 始作하니 한 復活을 表示함이다. 復活이란 말도 우리 祖上 아담해와가 肉身을 더렵혔든 事實로 因하여 生起었든바다. 墮落없었으면 우리는 復活名詞조차 아무 相關없는 바이었지만 墮落함으로 復活을 바라게 되었다. 그런고로 우리가 墮落前立場으로 한다리를 놓아 드러서는 樣이니 그리스도로 因하이다. 或은 한것이라는 名詞를 부쳐 復活한다고 하는 意義를 아러야한다. 사탄으로 死었든바가 다시 예수 復活로 인하여 生스니 苦生에 도라오니 卽 復活이라는 뜻이 있는바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復活할수 있는 生命을 받고 있는데 무슨 또 再臨復活은 무슨 意味인가 이것을 아러야한다.
모두가 根本을 아지못하는고로 우리는 모르는 것이 事實이다. 그 理由를 밝혀보자. “本來 사람은 墮落없었다면은 復活要求없는 完全完成한 靈人体를 造成하였을 것이다. 靈人体가 完成할려면 하나님의 몸과 合한 一体的系代를 成立하여야만이 完成始作은 이미 말하였다. 卽 예수(아담)는 하나님의 一体몸까지 나가지 못하여서 墮落한바를 이미 아는바다. 하나님의 몸 받은 級이 卽 生靈体를 造成함인데 이 生靈体를 받으여만이 우리 根本創造人 理想生이었는데 이것이 墮落으로 因하여 나누어서 찾어 채우는 樣으로 되는 것은 몬츰 墮落하기 前까지 生命級 程度는 예수로 因하여 받았지만 아직 生靈級까지는 다시금 나와 있지못한지라 이 部分까지 받으려면 再臨主로 인하여 充當하여야 할것이 남아있는 未蘇生部이다. 이 部分은 歷史를 通하여 天國에 가서있는 사람도 未蘇生으로 되었다. 땅 中心하고 蘇生할 수 있는 根本理想父母가 나타나여만이 全天主人은 理想人形인 本生靈体 完成한 靈人体를 구성하는바다. 그런고로 이 生靈体를 찾을수 있는바는 다만 再臨하여서만이 成事할수 있는 級이다. 再臨成事하여야 그 根本墮落前 生靈体構成으로 나아간다. 그전에 못되는 原因은 根本生靈의 父母가 없는 立場에 어찌 먼츰 生靈을 받는데는 것은 祖上없는 子息을 成立하는 樣인 非原理的事實이므로 하나님은 이 目的이 再臨부터 完成함을 받게끔 役事하는바니 全天宙도 이날을 渴望하여 바라는 바는 다시금 하날에도 復活한 完成級을 부여 받은바를 말하면은 地上에서도 우리도 靈界 生靈級한 復活의 始作을 본다는 根本原理가 있기에 再臨復活을 말함이다.
空中에 婚姻잔치라는 榮光을 받을수 있는 資格者는 예수 生命級까지 完全長成한 者만이 資格이 있어 그 잔치로 因하여 復活의 生靈体를 가진 한 根本子女의 立場을 造成하여 하날 家庭組織의 始作인 榮光을 付與 받는다. 그런고로 再臨時까지 樂園에가 있는바는 根本하날 生活못하고 準備期間에 處하여 있었다는 바가 事實이다. 再臨하여만이 始作한다. 卽 根本아바지 어머니가 生起여야 아들과 딸이 生靈의 始作을 보겠으니 이 父母 生起기까지 苦待가 하날이나 땅이나 바다는 再臨時期인바다. 그러므로 하날간 사람은 잃어버린 아바지 어머님의 復歸苦待가 卽 再臨苦待라는 根本意義를 아러야한다. 그런고로 根本肉身에서 完成하여 하나님 아바지와 合하여 하날 땅 一体時 ”天宙完全復活日“이니 누구나 苦待한 原因이다. 하날에도 靈으로 한 級 復活始作. 땅에서도 根本完成始作이되니 이 어찌 고마운 復活이 아니랴. 以上과 같은 原理的 事實이 舊約時期가 新約時期)와는 靈的級으로 한 給次를 갖고 있는 바다. 舊約은 터를 닦는 級이므로 生心에다 靈体를 始作케하여서 生命級 繼承으로 할 基本 터 이었다. 그런고로 靈体的 舊約時期서부터 新約生命体級까지에도 한 級的 復活의 歷史가 있다함을 根本 論한 原理와 같은 理由를 舊約時代의 靈들은 그리스도의 復活과 同時에 한 生命級으로 繼承하는 復活의 始作되었다는 것을 아러야한다.
聖經 마태 복음 二十七장 五十一節부터 五十二節까지를 보면 聖殿 휘장이 上으부터 下로까지 찢어져 둘이되고 地이 震動하여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聖人의 身이 多起하대 하는 구절이 있는바다. 우의 句節보면 그 當時에 예수 復活과 聖人復活의 始作을 말함이다. 그러면 이 聖人이 墓에서 多起따 하는데 예수와 같이 復活하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럼 무엇을 말하는 바냐하면 舊約的 完成者는 卽 靈体部分부터 生命部分으로 繼承하여 成事하는 한 復活始作을 말함이다. 이 길의 始作이 舊約靈人들에는 큰 榮光이었든바다. 이것을 볼 때에 한 靈人体가 歷史)를 두고 이와같이 復活段階를 갖인 歷史的 時日의 하날간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苦待라 아니할수없다. 이와같이 復活長成으로 하날사랑 理想家庭까지가 目的이 全天宙는 地上再臨과 同時에 地上天國建設을 目標하고 바라고 있다. 하날 사람도 至今 우리 再臨主 對하는 者를 無限히 바라고 있다. 하날에 가서 좋은 것 같이 생각하면 큰 誤解다.
하날에서 未完成部分을 代身 聽하기가 難하다. 하날에 生靈을 받을 길은 再臨主를 侍奉함으로 잡았으나 땅에서 하여야 할 部分으로 되어있는 것이 根本創造하심이 目的었든것이니 하날 靈人들도 사람도 땅 聖徒와 協助하여 代身 未成事部分을 充當하여 받은 樣으로
完成된다. 그런고로 땅 聖徒는 自己 분과 同時에 하날한 自体면 自体家庭이면 家庭을 代身하여서 채우는 길을 代身하여야 하는 目的이었음으로 全 하날 聖徒는 우리 땅에서 再臨主를 侍奉하는 聖徒들과 合할려고 여러 모양으로 하날의 사실을 表示的으로 敎示함도 있게된다.
그러므로 聖徒世界 時期란 이 目的이 完成할려니 이와같이 땅을 中心하고 充當 完成하려 하는 時期를 말함이다. 이 時期에 全目的은 하날과 땅이 和合하여 生靈 繁殖 世界를 온 天宙에 傳할바 傳道使命이다. 그런고로 예수도 말삼하시기를 마태 福音 十八章 十八節에 내가 眞實로 眞實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무엇이든지 너희들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심이었다. 이와같이 말삼하심의 根本目的은 뜻의 完成地는 땅이라는 것을 中心하고 말한바를 現身仰者는 아러야한다.
그런고로 땅에서 中心 自体인 예수를 모신자는 舊約時代의 靈人들이 부러워하든 바며 또 再臨宙 自体를 侍하시는 者들은 예수를 모시든 靈人들이 부러워하며 自己들이 땅에서 未成事하였든 部分을 委任하면서 完成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新約時代에 예수를 모시던 者들은 舊約時代의 完全한 靈人들보다 높은 位에 居하는 바는 사실이며 또 成約時代에 再臨主를 侍하는 者는 新約時代에 예수를 侍하든 者들보담 높은 位에 居하는 바는 事實이다. 왜냐하면 成約時代에 再臨主를 侍奉하는 者들로 因하여 自己들의 目的과 하나님의 뜻을 끝맺아 完成함으로 因함이다.
그러니 땅에 있는 直接 再臨主를 侍奉하는 聖徒들의 榮光이야 무엇으로 報答을 하랴! 이러한 原理가 있기에 聖經 히브리서 十一章 三十九절에서 四十절까지에 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찬함을 얻었으나 許諾하신 것을 얻지 못하였으니, 大槪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豫備하였은즉 萬一 우리들이 아니면 너희들로 하여금 完全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심이니라 하시었다. 이것은 終末에 있는 者가 먼츰이 되고 먼츰 있는 者가 나종이 된다고 예수께서도 말씀하신바도 이와같은 언리적 根據를 두고 말함이었다.
이와같이 먼츰 될 者되가 먼츰 못되고 나종으로 된다 하는 것은 墮落함으로 歷史的 距離를 두고 三段階 分擔으로 成事하려는 舊約時代와 新約時代와 成約時代로 뜻의 成熟을 보는 바로 基因된다. 이와같은 攝理의 路程은 지루하고도 무서운 고난시기로 展開된 것을 우리 人間은 생각하였는가 하면 至今까지 未知의 事實이었다. 그런고로 再臨時 肉身復活을 바라는 者는 昔日의 바리새敎人과 書記官的 存在와 같은 者라는 것은
事實이다. 以上과 같은 復活原理 根本意義를 알고 뜻을 바뜰지 못하는 者라면 그 얼마나 하날이 슬퍼할 者일까. 이와같이 숨었든 奧妙를 밝히는 根本目的은 뜻 成事를 速하게 함에서다.
第六 章 天使長의 喇叭소리와 再臨과의 根本意義
하날에 天使나 땅에 사람이나 全部는 墮落으로 因하여 自己들의 全部 잃어버렸든바다. 그런데 根本 墮落케한 存在가 누구였나하면 天使長이라는 存在가 基本問題의 根本 自體이었다. 墮落으로 因한 世界가 되고보니 땅이나 하날이나 全部가 어두움에 잠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根本 最高 理想은 破壞를 보고나서니 원수를 對하여 다시금 빼앗아서 찾고저 하는 非公理 部分 한 일을 始作케 되었다. 그런고로 天使世界에서는 하루바삐 하나님의 根本 時代가 오기를 一日 千秋로 苦待하여 온바이었다. 이 全部의 責任은 天使長 누시엘이 失敗케 하였으니 다시금 天使長들은 이 目的 復歸를 自己들이 代身이라도 하여야 할 間接的 立場에 서게 되었다.
그런고로 至今까지 天使들과 天使長들은 歷史를 通하여 基本復歸로서 많은 努力을 繼續하여 왔던 바인데 이 目的 成事는 두말할 것 없이 再臨이 地上에 始作하여만이 自己들이 全責任도 完成하는 同時에 地上에 對하여 하나님의 뜻을 代身 도와주는 根本出發點을 보게 되니 天使長은 勿論 再臨과 함께 와서 地上에 하나님의 根本 뜻을 協助하는 根本生活體系에 第一步를 보아 再臨主 앞에 하나님 뜻 成事에 많은 責任을 다하기 爲하여 喇叭로 音을 發하여서 準備的 協助를 始作하는 바를 完成하니 天使長 降臨이 되어 主 뜻을 代身 告하여 大衆 對하여 宣布的 存在가 있는 것을 表示함이다.
喇叭이란 뜻 本 實體의 目的을 代身表示하여서 알리는 使命이 喇叭이니 이와같이 地上에는 再臨主의 뜻의 한 基臺準備가 地上에 있어서 合하여 뜻 成事하는 根本目的이 있는바이다.
그리하여만이 天使世界도 最後 目的을 達成 보아 같은 기쁜 理想 始作을 볼바로 되어 있기에 天使와 天使長 責任的 分擔도 있는 바이다. 特別한 存在도 그의 뜻의 使命을 天使長的 使命 擔當者가 地上에 빨리 많아지는 것이 기쁨바다. 이와같이 天使等도 하날 完成으로 發達하여 나오는 것이 自己들이 基本解放의 始作이니 그 얼마나 기뻐할 바일까.
第七 章 審判에 對한 根本意義
人類歷史와 하나님이 攝理하신 바의 路程과는 同一한 基点上을 離脫할 수 없는 樣으로 展開하여 온 바는 벌써 論한 바다. 그런고로 歷史를 두고 하나님과 人生과의 關係가 지금까지 계속하는 한 目的 途中에서 있기에 如前히
그 目的을 向하여 나아가는 歷史路程 否認할 수 없다. 그런고로 역사를 두고 하나님이 미워하게 되는 根本目的은 다름 아니고 사람 對한 한 非原理的 存在가 生起므로 그에 대한 防備的 對峙陣을 取하기 爲하여 人間에 對하여 하나님은 如斯한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本來부터 人間 앞에 審判이라는 可恐할 刑罰은 웨 生起었나 하면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사탄이란 非原理存在가 있어 原理的存在인 우리 人類를 侵害하는 故로 其結果에 對한 한 原理的 對象이 卽 하나님이 人間 對한 審判이다.
이 審判의 結果가 歷史上에 보여지는 한 戰爭의 結果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니 이 審判이 要求하는 基本 主人公格으로 되는 바는 사탄이라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이 하나님께 屬하여야 할 存在가 뜻 外의 存在에 屬하게 될 때에 審判의 始作을 본바를 우리는 歷史的 事實들을 보아서 否認할 수 없다. 第一審判은 “노아 洪水審判”이다. 이 審判한바는 사람의 全部가 하나님께 屬한 自體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사탄 원수 相對하여서 하날 對한 反對向으로 나아가니 그는 原理만인 主人世界니 그 自體에게는 靈肉合하여서 하나님이 取할 수 없는 存在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時代 사람들을 全部다 淸算하고 하나님의 뜻을 中心한 基本存在를 要求하심이었다. 그래 하나님은 노아를 擇하여서 그 食口로 因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시금 復歸의 한 基礎를 잡고저 하심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그 時代的으로 본다면 하나님 앞에는 노아 食口가 全世界 人類와 比例되는 價値格 理想으로 보았으며 同時에 한 目的의 基点의 存在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人類를 全部 全滅하는 中 노아 여덟 食口만이 時代的 하날의 要求인 所望의 存在였다.
이 基本 食口로 因하여 하나님은 사탄을 本格的으로 追放하고저 하였으니 그 뜻 成事를 보지못한 바이었다. 그런고로 基本 目的 達成하여야 할 第一步에 다시금 사탄의 誘引을 보게 되었다. 노아 審判은 全部의 根本目的은 사탄 對한 所有存在 全無케 하기 爲하여서가 審判의 要求하든 根本目的되는 相對이었다. 그랬든 그 根本自體 사탄이 다시금 侵入할 수 있는 한 路程始作이 있었기에 우리 人類社會에 있어서는 한 審判되는 한 攝理部分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 原因은 아직까지 사탄이 人間世界에 侵入하고 있으니 언제나 이 存在가 남아있다는 곳에는 반드시 審判의 한 對像存在라는 것은 事實이다. 이 사탄과 合하는 사람과 하나님과 합하는 사람과가 歷史를 通하여서 分立을 보게되니 언제나 非原理 存在世界가 原理的 存在世界의 뜻에 極背馳에 설적마다 한 審判이 始作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탄과의 對立을 보는 世界가 되었으니 世上에 되어지는 審判은 노아 以後에는 사람을 中心하고 審判하게끔 攝理하여왔다. 卽 하나님의 한 擇한 사람 或은 氏族,
民族, 國家를 새워서 審判의 뜻을 繼承하여온바는 歷史를 보아서 잘아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第一審判의 主權者는 하나님이다. 이 審判을 推進시켜 成事케 하는 바는 사람을 세워서 그 目的을 成事하여 攝理하시는 바다. 그것은 사탄을 사람한테서 멀리 하기 爲한 目的이며 사람과 合할 수 없는 工作을 세우기 爲하여서 반드시 審判 뜻 目的成事는 사람이 完成할 수 있는 그 路程으로 나온바다. 그것은 또 사람이란 存在는 最終局에 가서는 사탄까지 主管할 수 있는 存在이므로 하나님 그 權限을 完成할 수 있는 資格을 세우기 爲하여서 그 審判 目的을 達成하여온 바이다.
그런고로 世上에서 사탄이 좋아하는 目的에서 處하는 者는 旣必코 어느 時期나 한 審判時期가 있는바다.
하나님의 直接하는 審判의 罰을 받는 者도 있고 또 사람으로 因하여서 그 罰을 받는것도 있는바다. 病으로 因한 者도 있다. 사람이 사탄에서 떠러져나와 하나님 便으로 옮겨오면 올수록 사람에 對하여서는 하나님은 其 創造理想的 權限까지 주려고 하니 時期를 두어서라도 사람으로 因하여 사탄을 全部 屈服하게 하고저 하는 바가 目的의 要求로 되는 바다. 그래서 노아 審判은 하나님이 사탄 對하여서 淸算코저하는 審判이었으나 그 目的 未達成하고 基臺만 잡고 사탄 對하여서 싸울 수 있는 氏族 選擇과 同時에 하나님의 理想 基臺를 세우기 始作하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直接指導下에 있는 이스라엘 百姓에 있어서는 그 中에 사탄에세 屬하는 者만이 生起면 容恕없이 한 審判對像으로 취급 하였다. 그것은 여러 가지 樣式으로 하였다. 直接하지 않으면 病으로 그 外에 間接的 사람으로써 取하여서 왔다. 이스라엘 百姓이 사탄 便에 屬하면 勿論 審判은 免할수 없었거니와 그 反面 이스라엘 百姓 對하여서 對立으로 나오는 사탄에 對하여서도 防備的 審判으로 態勢를 取하여왔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百姓을 中心하고 自己의 保護圈內로 定하고 이 圈內에 侵犯하는 者에 對하여서는 斷乎한 處罰로서 對하여왔다. 卽 審判 對 像이 되었다. 하나님의 目的은 世界上에 審判이면 全部가 하나님 便에 屬하는 그 時期라는 것은 事實이다. 그러면 審判이란 目的이 없겠는데 아직까지 歷史路程에는 사탄의 行動이 繼續하여 나오니 아직까지 審判은 除外되지 않음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審判이란 名詞의 最高目的은 사탄을 全部 屈服케 하는 時에는 우리 世界 上에서 必要치 읺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런 意義에 있어서 하나님의 審判에 對한 것을 사람한테 傳하여왔다. 그러니 審判時期는 큰 무서운 時期인 同時에 큰 기쁨의 한 境界 分岐嶺이라 할 수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바라는 바는 全世界가 하나님의 품에 돌아와 合하
여야 할 것인데 사탄이 남아 있기에 如前 目的 未達成이니 우리 앞에도 한 審判이란 非原理 時代에 남어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根本審判을 完成하여 뜻 成事하는 그 時期를 바라왔든 바는 事實이다.
이 目的은 어느 時期에부터 始作하나 하면은 예수와서부터 始作할것이니 이 예수 한 存在가 이 全部의 審判을 左右하는 한 中心存在이었다. 이 存在가 確立되어야만이 하나님은 完成審判成事한 目的으로 되는 바니 이 예수 한 存在는 그 時代에 있어서 한 全歷史를 左右하는 한 基本存在였다. 즉 예수 와서 사탄을 顚覆시키는 目的이 始作하겠으니 하나님은 이 時期를 미리부터 先知者를 通하여서 傳하여 왔다. 그런고로 世界全部를 左右하는 主人公이었다. 審判의 根本目的은 惡한 사탄을 치는 것인 同時에 사탄 便 아닌 者 向하여서는 根本 解放時期다. 그런고로 사탄 便쪽 者도 크고 두려움의 日이요 하날 便쪽 者에게도 크고 기쁨의 날인바는 틀림없다. 審判 받는 者도 死亡이요 않받는 者는 生命즉 永生이니 예수 한 存在로 因하여 이 根本 分岐點이 完成하갔으니 사람 앞에는 말할수 없는 두려움의 날이었다. 그런고로 예수에 屬하면 生命이고 그 外 사람은 사탄이란 두갈랫길이 지어지게 하는 中心 存在가 예수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 앞에도 예수 한 存在는 크고 두려운 存在였다. 全部가 예수 앞으로 合하여 나아가는가 가지 않는가 하는 바는 사람들 앞에 許諾되어 있기에 이스라엘 百姓까지도 죽는 길의 始作도 예수로 因하여 始作하니 크고 두려운 날이었다. 예수를 믿지 못하고 順從치 못하고 侍시지 못하니 이스라엘 百姓에게 있어서는 全部가 하나님과 相關 없는 存在立場으로 나아가니 果然 두려움의 한 基点인 存在가 예수니 果然 歷史를 通하여 예수가 오는 날을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舊約에 많이 말한바다. 옛 올때도 말라기서 보면은 卽 萬有 여호와 曰 其 日이 至리니 形勢는 熱한 풀무와 如고 므릇 驕慢한 者와 行惡한 者는 草芥와 如하야 其至난 日에 盡燒하야 根과 枝를 餘치 아니하되 오직 我名을 敬畏하는 너이에는 必 義로운 日이 昇하여 治療하는 氣運이 光線下에 有리니 너희가 出躍기를 勒을 脫한 송아지 같이 하리라 하시었다. 이와같은 말삼을 보면은 예수 自身은 기쁨의 存在인 同時에 한 審判의 存在였다.
이와같은 말삼은 무엇을 말삼인가 하면은 예수 自身으로 因하야 이와같이 될 것을 敎示한바인데 예수 自身이 世上에 오실때에 그와 같이 되었냐하면 그렇게 됨이 아니고 그 內容 뜻은 사탄 對한 絶對的 勝利로서 사탄이 根絶됨이 불에 탐과 같이 하는 것이라는 그 뜻이 있는 바이다.
예수는 惡(사탄)을 燒無케 하기 爲한 存在니 예수 앞에 있지 않으면 그 燒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니 果然 두려운
날이라는 것을 敎示한바다. 그래 이스라엘 百姓은 사탄 對한 積極的 反對 立場으로 예수를 協助하여서 審判的 立場을 取하여야 할 存在임에도 不拘하고 그 反對에로 나아가니 卽 예수까지 對하는 反逆者 行動이니 이 얼마나 두려운 行動이였으랴. 그리하여서 사탄에게 積極的인 審判을 하지 못하고 다시금 目的 達成을 歷史를 두고 始作하여왔다. 그리하여 再臨 時에 完全히 이 目的을 達成할 것을 豫告 하심이다. 그리하면 이 審判 根本目的은 사탄 全滅이 全目的이다.
그런고로 審判은 모든 世界萬物에 대한 것 보담도 사탄 對하여서가 根本問題로 되어 있는바이다. 그런고로 예수가 直接成事할 部分을 남긴 것은 世界上에 하나님 품 外에 處하는 存在가 남기지 않는 그 時가 卽 審判目的을 完成하니 이 完成時가 가까워오면은 사람들은 全權을 갖고 사탄 對하여 審判하여서 사람을 全部 하나님 便 쪽으로 主管當하게 하는 그 時代가 卽 審判時代다. 全世界的으로 두 分立이 되어 鬪爭時期가 되면은 벌써 審判目的達成 時代를 豫証하는 바이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審判은 地上에서 사람들을 通한 國家, 國家 合하여 하날쪽 反對 國家 對하는 時期오면 그 時代도 뜻 成事의 基臺時期라는 바를 아러야 한다.
사람으로 因한 國家으로 사탄으로 한 國家 對立하여 勝利하면은 再臨理想은 벌써 始作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地上에서 이와같이 對立 二 體系國家潮流로써 하나의 勝利가 되면은 벌써 再臨主가 와서 理想成事의 터는 完成되었음을 아러야 한다. 한 主義가 되는 同時에 再臨主는 始作을 볼 것이다.
그전에 벌써와서 있다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 根本理想 始作은 再臨主를 通하여서 宇宙는 完成理想의 第一步를 옮기게 된다. 그리하여 사탄은 宇宙 어느곳에서나 自己의 있을 곳을 주지 못하고 空中 어두움 한곳을 잡게 될바다. 根本的으로 사탄은 하나님 한테 屈服하였으나 예수한테 勝利하고저 하였으나 그도 失敗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사람한테도 敗하게 되는 同時에 再臨主 나타나니 사탄이 處할곳은 地球上 어느 部分이라도 容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最高目的이 이것이다. 하나님과 예수와 聖神이 合하고 하나님과 사람이 合하고 또 萬物과도 合하고나니 그 目的으로 싸우던 그 根本 全部를 所有치 못하여 하나님이 攝理하든 路程에 未練을 두지 못하고 나중에는 사탄까지 屈服하여서 本原理로서 基還하여야 할 때가 再臨과 同時에 始作됨을 原理로 보아도 알바이다.
그런고로 至今 現敎人들이 審判에 對한 하나님의 根本中心目的을 알지 못함으로 至今까지 自己들이 取할 方向을 잡지 못하는 바다. 이 根本 뜻을 알고 全世界는 合하여 뜻 成事의 目的으로 必然的으로 나가게 되는바다. 그 뜻 目的에 서지 못하는
者는 世上에서 그 苦痛의 生活을 避할수 없는 時期가 반다시 온다. 善의 全勝時代며 惡의 屈服時代니 全世界는 惡의 한 貌樣이라도 없는 理想世界建設을 再臨主를 中心하고 展開할 것이다.
第 四 編 攝理로 본 歷史的 辨證
第一 章 人類歷史 발전과 하나님의 섭리로 본 辨證
人類歷史는 全部가 사람끼리가 合하여서 發展하여 왔다는 것은 아니고 神을 對한 사람들이 關係로써 만이 歷史發展은 始作하여 한 目的을 完成標準하고 나온 바는 잘 알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탄이란 對峠陣下에서 人類歷史는 勝敗의 한 路程으로 最後勝利는 善者로 하여 反復하여 왔다. 하나님께 屬하여야 할 人間이 사탄을 따라 合하면은 그것은 어떠한 發達된 世界라 할 지라도 그 末路의 한 關門에 逢着하였다는 바도 잘 알 줄 안다. 사람 中心하고 하나님 便으로 向하여 合하여서 惡의 對한 더럽힘이 蕩減되면 하나님은 다시금 攝理하여서 뜻을 세우시곤 하신 바다. 왜냐 하면은 사탄에게 屬하였던 그 自體에 흔적 없는 터를 잡고야 만이 始作하여야 다시금 사탄의 侵入을 防止하는 同時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바이므로 하나님은 不順, 不信, 不侍의 百姓을 對하여서 그 限界를 두고는 반드시 그 惡을 淸算하는 것으로 되니 人類歷史는 繼續하여 勝敗하는 戰爭歷史의 反復은 避할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人類歷史는 戰爭歷史라는 것으로 裝飾되는 바는 善과 惡이 對立되어 있기에 戰爭歷史 展開를 避할 수 없었던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人類歷史 全部는 하나님의 攝理 中心으로 되는 基督敎歷史와 符合하여서 한 目的으로 終局을 完成하는 樣으로 發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結論도 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 以上 宇宙歷史 卽 人類歷史는 하나님의 支配下에서 움직여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될 原理로 되어있다. 하나님의 뜻 成事에 한 表示的 證據로서 歷史發展은 하여 왔던 바도 事實이다. 사람 없으면 歷史도 없을 것이고 歷史 없으면 그 歷史의 本 路程의 方向에 대한 觀察을 할 수 없는 바이다. 世界歷史는 全部가 善惡神의 싸움의 한 表示的 原理가 卽 人類歷史다. 그런데 언제나 世上에는 惡이 먼저 始作하였으니 惡의 世上에는 먼츰 하나님의 根本 創造原理 法理上으로 繼續 發展하여 왔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歷史를 通하여 이 惡을 敗할 한 對峠陣을 取한 것이 人類歷史始作 이다. 그런고로 이와 같이 惡이란 非原理 存在인 한 形體를 가진 惡의 主權歷史와 對 하나님의 復歸攝理하는 主權回復歷史와 서로 對立을 보아왔다. 사람이 하나님 便으로 되면 惡主權은 敗하고 한 新主權으로 反復하여서 人類世界에 惡을 除外하고 善의 勝利하는 樣으로 發展하여 왔다. 그런고로 歷史過程은
惡淸算 過程期間이라는 것이 事實로 되어있다. 惡을 除하여 善의 始作의 터를 넓혀서 온 바가 즉 人類歷史이다. 그런고로 乃終에는 善만이 남는 主權世界를 造成하여서 하나님의 뜻 成事하고자 하는 바가 根本이니 歷史의 흐름은 必要的으로 對立된 戰爭의 한 勝敗의 歷史로 되어 있다. 그런고로 世上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나온 世界라면은 戰爭이란 不要인 것이었는데 사람 墮落으로 因하여서 이와 같은 終末論的 歷史發展이란 서러움의 한 場面이다.
萬若 하나님 便권에 속하여 온 中에서 歷史發達이 되어 왔다면 한 國家면 國家가 敗하는 것이란 名詞는 關係없는 바이었는데 惡에 處한 그 發達된 文明社會나 國家라도 餘地없이 한 末期를 避할 수 없게 한 顚覆의 末路를 밟게 한바는 終局으로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여 自覺할수 있게 攝理하심을 밝히는 바이다. 이와같이 우리 人類先祖들은 하나님의 根本뜻을 아지 못하고 나아왔다. 또 人間이 根本에 對한 原理를 알지 못하고 나왔음으로 하나님 對한 反逆의 始作과 同時에 한 審判에 處하여 왔다. 이 모든 歷史를 볼적에 우리는 하날 對하여서 말할수 없는 罪悚한 心情을 갖고 探知하여온 歷史家가 몇 名이나 되는가! 果然 하나님의 心情에 對한 슬픔의 歷史의 한 表示가 過去歷史中 文明의 趾跡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하고 攝理함은 사람들 中에 對하여서 反對攝理하여왔다. 하나님이 建設하려면 惡은 破하는 工作하고 사탄이 建設한다면 하나님은 破하는 工作 이와같이 서로 뜻 세우고저 하는데는 反對工作이니 世界歷史는 始作하였다가 綜하고 綜하였다가 始作하고 이와같이 하여 긴 歷史를 거듭 反復하여왔다. 이 事實로되니 人類社會에도 善人나면 惡人나서 破하고 惡人나면 善人나서 勝하여 또 始作하였으나 또 다시금 뜻을 받들지 못하여서 또 敗하는 양으로 나오는 歷史의 歪曲이야 果然 쓸쓸한 슬픔의 發露라 할 수 있는 歷史路程이었다. 個人으로 社會로 國家로서 나가 全部가 이와같은 한 公式과 같은 原理를 表示하여서 發展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世界歷史는 한 하나님만이 全世界가 占有되는 時는 戰爭이란 것은 必然的으로 終局을 完成할바다.
이 戰爭의 歷史 없는 時代 全世界的으로 完成할 時代가 오면 하나님의 뜻 成事의 始作한 基礎完成時期라는 것을 알 수 있다. 歷史의 흐름은 無戰爭 平和理想 時期가 目的의 終局이면서 한 兄弟로서 全世界가 하나되는 時代가
卽 其 時代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끝까지 놓지않고 이 目的 向하여 攝理하여 오는 바다. 사탄은 이에 反對하여온 바다. 사탄이 먼츰 歷史에 始作하였으니 世上에는 참것 오기 前에 거짓것이 먼츰온다. 거짓것이 참이라고 먼츰 서둘르는 바를 아러야 한다. 못한 者가 먼츰 발뺌하는 것은 墮落本性받은 人間임을 表證하는 事實이다. 世上眞理도 惡한 것이 善樣으로 먼츰 始作과 表示하여 그 眞理本體를 對峠하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攝理하는 內部까지도 사탄의 한 工作이 있음에 이와같은 傾向이 많아지는 바가 至今 末世時期가 가까워오는데로 많이 보여진다. 그런고로 참건이 참것같은 거짓것한데 犧牲當하는 事實을 歷史를 通하여서 많이 볼수 있다. 예수는 그 時代에 있어서는 한 非原理에 對像 取扱當하였고 참 眞理者들은 바리새 敎人과 書記官이었다고 그 時代는 全部가 알았기에 眞理本體 예수까지 十字架로 넘겨준바가 아니었든가. 眞理는 最後勝利니 歷史를 보내놓고야 그 自體의 根本을 만들어서 무엇하랴.
至今 世上에서 많이 虛侍받는 곳에는 한 眞理에 가까운 距離에 서 있다는 것을 이 原理로 살펴서도 알수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歷史的으로 考察하면은 이와같은 記事의 記錄이 卽 歷史發展 歷史로 되어 있다. 그러면 至今 世界 上에 極한 두 陣營을 標準하고 發達하는 原理도 이와같은 두 神格 存在가 有하는 攝理下에 處하여있는 人類世界는 不可避한 結實의 路線이다. 이것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으로 屬하여 人類世界가 左右하는 한 時期는 반드시 온다. 卽 至今 世界上 두 潮流는 極反對니 하나가 되어야 한다. 唯心(神)과 唯物이란 對峠陳이 卽 그 表示되는 하나님 對 사탄 對하여 사람과 萬宇宙를 서로 所有하고저 하는 原理으로 된다. 人類歷史가 存在느는 以上 그 目的은 全部가 理想을 標準하고 歷史는 움직여나왔다. 그런고로 至今 人類歷史上 六千年 歷史의 한 結實 的 表示가 至今 이 두 陣營이다. 이 두 陣營은 歷史의 열매이다. 歷史的으로 發展하는데 있어서 眞理의 한 路程을 通하여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事實이다. 그 發達의 目的은 卽 歷史目的한 眞理世界가 標準이니 그 곳 向하여 나오는 바는 틀림없다. 그런고로 眞理가 成立하는 한 過程段階는 蘇生時代, 長成時代, 完成時代로서 한 攝理的 發展史를 두고 나온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至今까지 이 두 主義 陣營이 되기 爲하여서 여러 主義者가 많았으나 그들 主義者는 한 時代的 蘇生的 力活이든가 長成의 力活이든가를 하여왔다는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와같이 至今이 世界上에 한 潮流도 없어서는 안되는 原理上에서 있는 바다. 그러니 歷史的 眞理의 本體는 누구인가. 그 中心 基点은 卽 하나님께 屬하는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眞理는 그 要素的으로 본다면 唯一이 되는 同時에 不變이야되며 永遠이야되는 바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基点으로
한 眞理世界란 唯一의 主義世界요 不變의 主義世界요 永遠主義世界가 歷史的 最終局의 眞理인 理想의 終點이다. 이와같이 되는 世界가 되면은 우리 人類全部는 創造 本原理世界로 돌아가는 바는 神(하나님)과 同居하는 그 目的世界 無窮世界에로 向하는 神에 대한 質疑없는 本創造根本路程出發을 볼바가 하나님이 人類 對한 攝理의 根本뜻이다. 그런고로 世界上이 至今 두 主義니 하나되어야만이 되는 바다. 赤白의 表示 赤(左)은 사탄이요 白(右)은 하나님이다. 이로 왜 白, 赤(右,左)가 아니고 赤白(左,右) 된 理由는 사탄이 먼츰 始作한 바를 表示한은 歷史的 根本意義가 있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赤이란 사탄이 警戒한 根本存在다. 그 赤은 반드시 亡한다. 그런고로 第三次 戰爭 有無는 根本的으로 보아 어찌되는가 하는가는 各自의 推測으로 맏긴들 明白한 事實의 한 結論點上을 누구나 離脫하지 못할 것이다. 萬若 三次 大戰없다면 赤이 自然屈服하여야 하는데 아직 미련 있으니 世界 對하여 自己 野慾 充足시켜 보려고 그 거짓 本性을 如實히 發揮하는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三次戰 以後는 國際聯合的으로 하날뜻 標準으로 움지겨지게 될바다. 그런고로 그 時代가 卽 하나님 直接時代라. 그런고로 再臨成事時代다. 그리하여 至今까지 갖고 나오는 國際的 成援國家들이 갖이고 나온 主義도 아닌 新主義가 出現하여야 한다. 이 主義는 創世前理想의 한 主義인 同時에 다시는 戰爭없는 하날과 땅 合하는 主義로서 出發을 하게 된다. 그 主義는 唯一의 主義요 不變의 主義요 永遠의 主義이다.
이 時代까지 歷史上으로 發展하여온 歷史的 分路의 中心攝理하신 辨證的 事實을 表示하여보자. 하나님을 中心하고 世界는 左右하여오니 그 歷史는 基督敎 聖書上을 떠날 수 없는 것이 事實이다. 하나님은 모시는 곳이나 그 目的을 協助하여야 할 宗敎가 卽 基督敎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基督을 中心하고 그 目的達成을 地上에 예수를 보내인 後부터 始作하여 端緖를 잡은바는 事實이다. 基督와 現代世界와는 歷史的으로 同一한 路線上에 屬하여서 攝理하였다. 基督敎는 世界歷史發展上 모든 한 志向으로 되었으나 宗敎없는 國家는 敗한바도 歷史가 證明하는 事實은 宇宙主管主人 하나님은 宗敎를 通하여서 사람과 合할려고 攝理하였기에 어느 宗敎라도 善을 標準한 것이면 하날 屬하는 것이 原理로 되어있다. 惡은 善을 標準한곳을 絶對로 主管할수 없다. 善은 어데나 하날쪽으로 屬하니 하나님은 人類世界의 宗敎를 通하여 目的한바는 終局目的 所有를 바라서 宗敎로써 東西洋 世界를 攝理하였다. 그 中 第一中心의 本部가 卽 基督敎이다. 그런고로 最終局에도 어느 宗敎라도 하나님에게로 基因한다. 世界一면 宗敎는 勿論으로서 누구나 그 生活舞臺上에서 이와같은 基点上을 떠나서는 살수 없을 때가 卽 理想時代다. 卽 宗敎統一은 人間
이 局極의 事實이 明白하여지면은 다 하나로 基因된다. 基督敎는 말하면 하나님의 直系政府와 같은 것이고 그 外 宗敎는 한 社會團體와 같은 것이다. 그런고로 全部 合하여서 完成할수 있으니 여러 宗敎가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最終에는 어느 宗敎나 바라지 않는바다. 어느 宗敎理念에도 하나님의 要求하는 한 中心點이다. 이와같이 基督敎 歷史와 世界發展歷史와는 反對되는 한 敵과 같은 歷史路程은 어느 時代라도 如實하게 明示되고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유대 民族은 世界 歷史上에 원수 對象하여 나오는 바도 原理가 있는 바이다.
또 하나님의 目的達成할려니 全部를 유대민족을 世界發展上에서 없어서는 안될 重要位置에 두심과 全世界의 經濟力을 갖게 함은 하나님의 目的을 達成하는데 한 터가 되겠으니 至今과 같은 現世가 成立됨이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國家들은 유대민족과 合하여 뜻 協助하여 最高理想成事치 않으면 안될 重大責任이 있는바이다. 그런고로 理想世界에는 종교와 과학과 經濟가 한 基臺우에서 움직이는 時期이다.
第二 章 歷史發展 限界를 復歸로 본 辨證
하나님이 뜻한 世界에 뜻 아닌 世界의 展開라는 것이 始作되었으니 하나님이 다시금 찾으여야 할 基本原理가 始作되게 되었다. 하나님께 屬한 善한 터우에 惡의 始作을 보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基本 뜻에 合意하게 되어 있지 않음은 事實이다. 사탄의 侵入으로 인하여 全 땅은 더렵혀서 하나님의 뜻 成事할수 없는 不淨이 全體로 되어졌다. 그런고로 다시금 찾고저 할 때에 이 世界를 다시금 淸算하여서 하나님의 뜻에 合意할 수 있는 處斷을 取한 것이 卽 노아 審判이다. 이 審判과 同時에 하나님은 뜻의 한 始作을 볼려한바는 事實이다. 人生 第二 祖上되는 노아 子息 함으로 因하여 그 目的成事의 한 基礎를 잡지 못하고 아브라함까지 期待려서 始作케 하심이었다. 그렇다면 歷史的으로 보면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約二千年 歷史를 갖게 되었다. 아브라함을 擇함도 根本理想世界를 다시금 찾고저하여 始作의 터가 卽 아브라함 擇함이다. 아브라함 擇함은 歷史的으로 흐린 全部를 다시금 맑히어야 할 責任的 使命이 付與되었든바다. 萬一 아브라함이 失手하지 않고 뜻을 侍應케 되었으면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復歸攝理의 한터를 始作하는 舊約歷史始作 以上에 더 理想的으로 始作하였겠는데 아브라함의 失手로 因하여 애급 四百年이란 時期가 하나님으로부터 付與하여주워 失手의 根本代價를 要求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 四百年이란 年數는 무엇때문에인가 하는 根本問題를 아러
야 한다. 그것은 어데서부터 始作된 原因의 年代인가 하면은 하나님은 사탄한데 더렵힌 터우에다가 始作코저 함이 本意안이었다. 結局은 아브라함 擇한바도 왜 아브라함이 信의 祖上으로 約束받게 되었는가 하면은 노아 子息부터 失手하여 다시금 그 子息들에게 사탄 侵入을 보게됨으로 하나님은 노아부터 攝理始作할려고 하는 바를 아브라함께 延長하신바다. 根本은 노아가 아브라함의 뜻 繼承者가 되어야 할 바가 이와같이 延長하였다.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는 그 年代數로 보면은 約 四百年 年代이었다. 이 延長은 노아 子息으로 因하여 不順祖上 사탄을 誘引케 하는 行動으로 因하여 始作 보았으니 아브라함 擇한 바는 이 侵入 사탄 防止코저하여 擇함에 約束한 祭物失手로 因하여 다시금 사탄을 實體子息까지 하나님의 攝理年代를 延長본 四百年의 한 期間까지 더럽힌바를 淸算하여야만이 그 資格成事할 수 있는 한 蕩減時期가 卽 四百年期間이었다. 이 期間에 하나님은 한 蕩減의 數 차기를 苦待하여 모세를 세워서 蘇生에 着手工作인 하나님的 責任使命時期에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애급 四百年以後 約 千六百年에 예수가 온바이다. 그 千六百年 期間은 아담부터 노아 時期的 年數의 期間이다.
그리하여 이 根本時代까지 이 百姓들을 完成한 蕩減을 歷史的 時期를 두고 蕩減하게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아담부터 아브라함 時期까지 약 二千年 年代로 經過 中 더럽힌 經過니 아브라함이 失手없었으면은 이와같은 期間은 한 限界로 될 터인데 다시금 사탄 侵入보니 노아 審判하지 않은바와 같은 原因으로 되었으니 四百年과 모세 以後 千六百年 年代가 蕩減時期로 消耗되는 한 원통한 歷史的 延長이 始作되었다. 그런고로 예수와서는 다시금 舊約完成과 同時에 노아 以前까지 完全히 蕩減되어 完成하여야할 歷史的 蕩減責任分擔이란 路程에 서게되었다. 예수는 舊約完成인 同時에 사탄 防備의 한 中心自體이었다. 그런데 노아부터 아브라함 時代까지는 하나님은 사탄 對한 放棄時期 四百年間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十字架으로 因하여서 그 歷史的 모든 未蕩減根本 사탄 대한 한 防備의 길은 닦아 놓고 가게 되었다. 예수부터 至今時代까지 約 二千年 歷史의 間隔을 두어 나왔다.
그런데 예수께 있어서는 復歸의 한 實踐路程의 本路程으로 올라가는 歷史的 復歸時期를 잡고 始作하게 되었다. 예수가 모세부터 千六百年間이니 이 以上 四百年間은 蕩減時期였으니 其 以上 四百年間 卽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四百年은 사탄 對한 放棄時期였으니 예수의 한 路程에도 이와같은 歷史的 復歸路程의 反復의 路程을 보게되는 바다.
예수 以後 六千年間은 사탄 對한 惡 對한 聖徒들 合하여 歷史的 蕩減時代였으나 四百年間 時期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時期는 예수에게 있어서 한 사탄 對한 하나님의 放棄時期였기에 예수 앞에도 이와같은 한 自由롭게 사탄 對한 自由權으로 取하는 期間 內으로 드러서게 되었다. 그런고로 역사적으로 보면 至今부터 約 四百年前부터는 예수의 한 自由向上으로 基因한 理念出發을 본바는 이와같은 歷史復歸的 根本原因이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 中心한 國家와 勢力 氏族들의 歷史는 四百年 期間內에서부터 始作됨이 있는 큰 根本意義를 아러야 한다. 至今 世界에서 發達된 英,米의 國家도 以期間內에 發達한 國家이다. 그리하여서 勝利할수 있는 한 勢力基臺를 造成하여 至今까지 나오는 途中에서 예수 便 中心한 英米를 중심한 國家들은 自由舞臺로 하나님이 直接支配하는 國家로 되어왔다. 그리하여서 사탄과 한 對立國家陳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經濟와 科學과 宗敎 理想을 中心하고 經濟的으로나 科學的으로나 發達하여오면서 하나님을 모시러 나아왔다. 이 時期는 하나님 便으로 勝利의 한 터를 잡아가지고 國家對的으로 同盟國家體系를 造成하여서 英,米는 合하여 하나님의 뜻한 表示成事할 國家의 責任國家로서 發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中心한 國家體系가 成立과 對比하여 사탄 國家 한 對比로 서게 되었다. 그것이 第一次 陣營으로 取한바가 獨逸이었다. 그런고로 世界大戰이란 名0 밑에서 第一次 하나님의 뜻의 成事의 한 存立을 保障하는 時라는 것이 事實이다.
그런고로 하날 對한 사탄이 歷史上 먼츰 하날의 한 흉내의 展開의 樣으로 態勢를 取케 하여나선 存在가 卽 카에지루(에도카르 八世)의 그 存在였다. 世界에 한 王이 있어야하며 한 統治가 있어야 된다고 主權을 세워 나옴이 事實이다. 이 카이제루의 出現은 사탄의 한 代身으로 되어 世界를 自己의 手中에 넣어보겠다고 하여 主掌하여 準備와 함께 第一次 世界大戰을 招來케 하였다. 이와같은 存在가 世界的으로 나오는 바는 하날的으로 이와같은 存在가 始作하여 地上에 始作될 한 豫定의 表示이다. 이 第一次大戰과 함께 하나님은 全世界 對한 勝利圈內로 第一步를 始作한 바이다. 이리하여서 하나님의 根本理想世界에로 展開하고저 하는 目的이다. 이와같은 하날 世界主權者는 이 時代를 中心하고 勝利하여진 터우에다 이 宇宙理想 主人公의 地上誕生과 同時에 하나님의 뜻의 基臺를 잡게 되는 時代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하날 對하여서 사탄은 第一 아담 과 第二 아담 예수를 敗케 하였으니 이런
사탄 主權者를 세우심은 第一次 아담格 代身者 흉내와 같은 存在니 하나님은 第一次 아담을 사탄이가 敗케 한것과 같은 것이 復讐的 態勢가 卽 에드가도 八世- 카이제루를 敗케 한 原因의 存在였다. 그리고 第二次 大戰까지 不過 二十餘年間에 다시금 獨逸이 發達되는 原因은 첫 아담 뿌리를 中心하고 第二次 아담 예수까지 사탄이 犯하여 敗하는 樣으로 나갔으니 하나님은 이 復讐的 對像者로서 敗케 한바가 있는바이다. 이것이 卽 힛트라와 그 外 三國同盟國 日,伊이었다. 이와같이 第三次大戰은 相對格을 要求시켜 놓고 나왔다. 그 同盟國家內에는 日本과 같은 나라는 女性的 國家였다. 獨逸은 男性的 國家이었다. 伊國은 天使長國家이었다. 이와같이 되는 同時에 日本은 女神國家였든바다. 이와같이 神과 人이 合하여서 이와같은 國家形體 合하여 自己들의 理想을 展開코저 함은 이와같은 存在로 되었든 第三 아담 格 예수의 한 目的 相對國家로 되어왔었다. 이리하여 敗하는 同時에 하날의 한 根本存在되는 自體가 世界를 統一한다는 한 事實의 始作이 前在 表示國家體系이었다. 그런고로 힛트라는 聖經改造와 하나님 代身者라고 日本天皇은 現人神이라고 그와같은 한 表示的 象徵의 事實体가 出現한바는 하날的 再臨主 實體가 이와같은 樣으로 오는 事實을 豫證하여 왔다간 者들이다. 그런고로 힛트라 存在가 未分明은 예수 무덤 없는 바와같이 獨身으로 있다간것조차 不知로 되는 이와같은 하날뜻 路程에 한 蕩減復讐로 展開하여 왔다. 그리하여 사탄은 歷史를 두고 갈곳 없으니 乃終은 蘇聯을 爲始로 한 成援國家들을 造成하여서 共産主義라는 國家體系를 갖고 나타나서 世界의 太陽이란 한 國際의 主權者格으로 吽音하여 全世界를 直接 右左하는 存在로 되는 바는 卽 사탄이 하날의 眞理存在인 再臨主의 權限의 한 表示的 象徵으로 나타나서 第三次的으로 全世界를 決判짓는 者의 貌樣의 僞證者가 出現한 原理를 아러야 한다.
이와같이하여 旣必코 사탄은 금번 蘇聯 스타린을 中心하고 三十餘年 歷史로 終局은 敗하는 段階로 드러가는바가 한 原理로 되는 바이다. 이와같이 하여 近三十餘年內에 第一次 第二次 第三次로 全世界에 大戰이 始作되는 바는 이 三十餘年內에 벌써 하날이 根本存在가 地上에 出現을 보았기에 이 時期에 하날의 根本 뜻을 成事할 수 있는 그 自體가 出現할려니 이한 存在중에는 사탄의 全歷史를 두고 하날 對한 役事의 全部의 完成体이면서 未成事部分의 成事体이니 이 三十餘年內에 第一次 아담 第二次아담 第三次 아담 格 양으로 失敗한 全 淸算 表示的 期間
이다. 이 三十餘年間이란 時代內에 世界는 사람 國家 合하여 하나님 뜻 成事하여야 할 責任成事의 터를 닦는 時期인 것이다. 그런고로 第三次 大戰 없으면 안될 歷史的 條件들이 如何히 되나보라. 사탄은 거짓과 背信者 父며 破壞者의 父인 自體는 언제나 그 暴惡性을 表示하여 最後 發惡을 하여서만이 敗하는 것이다. 거짓 第三次 아담格者를 地球上에서 追放과 同時에 根本하날 三次 아담主를 地上에 맞을 時期는 되었다.
그런고로 三次戰 問題나는 이때에 벌써 면양과 산양과 같이 分立하여 審判段階에 드러가 있으니 再臨主는 成熟하여있는 바는 事實이다. 世界淸算과 함께 그 自體의 年齡은 三十餘 靑年으로 世上에 와서 있는 바를 아러야 한다. 이와같이 歷史의 中心도 하날 中心하고 사탄 對하니 三次戰 問題 端緖도 主 오신 나라로부터 始作한다. 그 나라를 中心하고 世界는 싸우는 나라라는 것은 하날에서 中心하는 나라니 世上에서도 싸움 中心 나라되는 바는 惡과 善의 總中心 解結 中心地니 그 國家 通하여 世界는 싸운다. 그런고로 至今보면은 世界의 全注目을 받는 나라는 韓國이니 韓國사람 中心하고 再臨主는 올바를 이와같이 原理的 表示로도 짐작하여야 한다.
地上에서 問題國이니 信仰界도 問題國이니 그 뜻 깊은 事實을 아러야 한다. 이와같이 하여 하나님 뜻 成事의 한 時期는 오는 바는 感謝한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 國家는 모든 것으로 보아도 全宇宙의 中心地가 될것이 韓國 歷史的豫言書 中 鄭鑑錄 上에도 明白히 記錄된 그 存在 卽 義의 王인 存在면서 世界의 理想存在란 그 분을 約束한 豫言이다. 그 분이 누구냐하면은 再臨主 第三次 아담 在降臨이라는 것이 歷史的 結論으로 合하는 한분의 攝理가 나타나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리하여 노아 時期와 兼 아담 時期에 한 根本復歸目的達成으로 始作을 볼바다. 이렇듯이 歷史는 根本이 點으로 復歸하여 올라가는 歷史가 至今의 歷史다. 그런고로 이 世界上에 이와같은 主義國家体陳이 生起는 것은 全部가 元始時代로 도라가는 貌樣으로 되는바는 原理로된 하나님의 攝理가 있기에라는 바는 事實이다. 그러니 歷史는 한 基点을 向하여 흘러나려왔다는 것은 事實이다.
例圖로 表示하면은 다음과 같은 樣으로 展開되어 나려왔다. 그러면 圖面으로써 밝히자. 原理는 無墮落이면 A, O, B 線間을 中心하고 平衡으로 되는 同時에 1. A, O, B, 2 線間까지 延長하여 平衡을 取할것이었는데 墮落됨으로 A, O, B 線間以下으로 人類歷史向線이란 B, O´線의 始作을 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탄의 人類歷史向線을 갖이고 싸우기 始作하였다.
1, A, A´, 1´,(A´), (1´)= 하날 表示 2, B, 2´, B´,(2´), (B´)= 사탄 表示 O= 歷史的 基点
2 (1´) 1´
아담 B (A´) 生靈 A´
1600 가 生命
未 노아 아브라함 모세 나 靈形体 理
O 400 400 1600 예수 (O´) 義向線 O´ 想
成 다 線
事 사람 역사 向線
A (B´) B´
1 (2´) 2´
墮落됨으로 사람을 中心하고 歷史는 始作하는데는 하나님이 먼츰이 아니고 사탄 便되는 B가 上이되고 하날便 A가 下이 되어서 始作하였다. 始作보았으니 하나님이 다시금 찾고저 하여 歷史的 基点 O´점을 向하여 全滅하고 完全復歸코저 하심이 攝理路程이다. A 하날은 本位置上으로 向하는 同時에 B 존재란 O´, B´, 2´線上으로 向하게 하여 하나님의 創造世界圈外로 追放코저 하시어서 攝理하신바가 人類歷史다. 그런고로 歷史는 基点 O´점능 向하여 反復하면서 사탄 追放하는 路程으로 나왔다. 그런데 歷史를 움직여 나오는데 그 中心線은 O O´義向線을 取하여 하날과 사탄이와 分岐向線으로 取하였다. 義면 하날 不義면 사탄이란 樣으로 나오면서 役事하였다.
B를 O´2´線上 無限線으로 追放할려니 直接對峠陳을 取하기 始作한 것이 아브라함 擇함과 예수 降臨과 再臨이란 바로써 對峠을 取하였다. 예수 한 自體와서 過去 사탄 侵入한 터를 全部 淸算하기 爲하여서 十字架까지 지셨다. 예수 全 四千年 歷史를 完成 成事하기 爲한 同時에 사탄 屈服의 길로 向하여야 하게되었다. 예수는 人類 四千年 歷史의 한 結實의 自體면서 하나님께서 第一 貴한 存在다. 그래 예수 죽어 惡血을 善血로 맑히는 길을 열고 復活하여 勝利路上을 始作하여 나서게 되었다. 圖面上 나 点으로 始作하니 歷史的으로는 가 点과 B点間의 全部를 回復하여야 하는 同時에 하나님의 본 잡아준 舊約歷史의 再完成을 하여서 나아왔다. 그러면 도라가는 路程으로 始作하니 六千年間은 聖徒合하여 全人類와 合하기 爲한 사탄 對한 歷史면서 그 後 段階부터는 優勢로서 四百年間 至今까지 發展 始作하여왔다. 그런고로 사탄이는 自己의 本基点 O´点 向하여 急速度로 向하면서 自己의 全力 다하여서 사람 놓치지 않으려고 指向하였다. 그러나 非原理存在의 父인 사탄 亦是 그 本鄕은 原理世界된곳 어느곳이든지 容納하지 않는 時期를 向하여 오는 歷史經路를 보게 되었다. 萬一 아브라함이 失手없었으면은 가 点을 中心하고 가, (A´)点으로 向하려고 하였든 바이었다. 그리하여 사탄이 上 黑線은 가 点을 中心하고 가, (2´) 点으로 向하는 것이 될것이었는데 失手로 因하여 다시금 사탄은 가 点에서 나 点을 向하여 黑線을 取하여 다시 始作하
게 되니 예수의 歷史는 困難을 가져온 바이다. 예수와서 사람 全部와 合하였으면 하나님은 B O´線 下點線이 나 点을 中心하고 사탄은 나 (2´) 黑線으로 향하게 할터인데 다시금 예수 對하여서 對立으로 取하니 하나님 點線은 B O´ 線上에 黑線 사탄과 合하여 싸우는 本段階 始作을 잡게 되어 舊約蘇生에서 新約長成에 한 길로 向하였다.
그리하여 近 千六百年 이란 長期間을 두고 싸워서 다 点을 中心하고 사탄 對하여 다, (2´)線外로 向하게 하여 나아왔다. 점점 사탄은 終點을 向하여 오니 사탄은 最後 發惡하여 하나님의 本 뜻 全部를 取하여 먼츰 成事하려고 하였으나 벌써 原理 基点을 빼앗긴 사탄은 自己의 基点 向하지 않을 수 없는 終點에 到達하게 되어 敗하여 나왔다. 그런고로 사탄은 하나님의 뜻의 흉내로 全部 한 成事를 보고자 하나 하나님이 勝利하니 其 表示的 事實들이 世界戰爭을 通하여 發表되었다. 그런고로 至今 世界上 戰爭歷史를 볼적에 먼츰 사탄 便的 國家가 먼츰 攻勢를 取하였으나 벌써 하나님은 基本 뜻 成事할 基本國家陣營을 優勢하게 하였기에 사탄은 乃終 敗하는 末路를 밟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다, (A´) 点을 向하여 本復歸 根本点을 向하여 도라오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예수는 自己가 찾고저하는 全人類를 끌어서 目的地까지 가저 옮기는 卽 (A´)点까지 옮기는 歷史가 二千年 歷史였다. 其 外 (A´), (1´) 間은 아담 해와의 墮落前 未及部分인 生靈世界級이다. 이 生靈世界級 始作이 卽, 理想始作이다. 이 部分은 再臨主 降臨하여 擔當할 部分인 完成時期되는 成約時代다. 그런고로 再臨成事하면은 歷史向線과 같은 A´, B´, 1´, 2´이란 곳에서 始作함이 아니고 O´点 基点과 함께 始作함은 基本点 復歸니 卽 未墮落部分上点이니 (1´), (2´) 線 상에서 始作함은 사실이다. 이리하여 다시는 分岐도 合함도 없는 永遠 平衡으로 取하여 나아가되 義向線을 中心하고 上 下로 한 回路를 中心하면서 繼續케 하고저 하는바가 하나님의 뜻이다. 上은 하날이요 땅은 下이매 주고 받는 理想相對로 나아가 對象理想의 成事를 目的으로 주고 받는 完全을 標準하고 나아간다. 이것이 理想原理인데 나종 論하기에 여기는 約한다.
사탄은 이와같이 우리 사람을 놓지 않으려고 發惡하고 나아왔다. 사탄이가 全部 敗하면은 善의 主權時代다. 其 때는 善者만이 또 뜻 合意者만이 出世할수 있는 時代다. 卽 理想時代다.
第三 章 歷史로 본 惡이 善 對하여 勝利한 原理的 辨證
歷史上에는 本來가 惡의 始作이 없어야 하는데 惡의 出發과 함께 人類는 全
部가 惡의 全主管下에서 먼츰 出發하였다. 卽 惡의 主權區域內에 處하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사탄이 出發한 뒤를 이어 빼앗는 經路를 取하여왔다. 다시 全部를 빼앗은 後래야만이 惡이 敗하겠으니 至今까지 이 人類歷史는 全部가 惡의 主權區域內에 屬하였기에 惡者만이 勝하여서 歷史를 通하여 善하고저 하는 者와 良心的인 人物과 社會는 敗하는 制壓을 避할수 없는 原理的段階 期間이다.
이와같이 良心的 善한 人士들이 社會的 矛盾에 反하여 善義를 세우기 爲하여 努力하여왔으나 其 當時에는 大衆 앞에 反對를 받아 被害를 당한 後 時代에 와서 그 自體들이 善義에 屈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바를 歷史를 通하여 많이 찾아볼수 있는 바다.
그 原因은 惡의 時代가 먼츰이므로 善義에 對하야 直接 破壞工作을 할 수 있는 權限時代매 그 結果的 行動을 맞춘 후에야 하나님은 먼츰 善義의 人士들이 取하든 本意를 나타낼 수 있는 比準을 세워서 大衆 앞에 그 善義를 認定 시킬수 있는 바로 되는 것은 사탄이 먼츰 出發하여 破하는 工作을 하나님은 뒤를 이어 세우는 工作의 事實을 歷史的으로 나타난 善人들의 犧牲과 그 當時 當然한 일로 取扱됨은 사탄과 하나님의 先後的 時期를 表示한바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歷史를 通하여 사탄의 主權 빼앗기 爲하여 나종 態勢를 取하면서 나왔다. 그리하여 예수와서 勝利權內를 세울때까지는 全部가 惡의 支配下에 善과 良心的 人士들은 犧牲하여 나왔다.
이것은 原理로 되는 惡主權時代이니 그리하였다. 그러기에 善人과 良心的 人士는 어느 時代나 出世하여 오지 못하였다. 全人類 歷史를 살펴볼적에 世界上에 어느 階級이나 다 出世하였다. 사탄이가 먼츰은 才能者와 財國家를 中心하고 主權을 잡고 나왔기에 그것 빼앗는 役事로하여 하나님은 한 對象國을 세어 그 目的達成을 防止함이 第一次 大戰 以上 歷史였다.
다음은 軍國時代로 들어온다. 그것은 하나님은 第二次 大戰으로 取케하고 다음은 사탄이는 地球上 다시 取할수 있는 舞臺의 한 階級을 잡으려니 上되는 級 사람들은 다 빼앗기게 되니 取할바 밖에 없는 勞動者 農民이란 末端級을 取하여 하나님을 對峠하여 나온바다. 이리하여 始作하는바가 共産主義이다. 이 級이 사탄이는 最終末点이다. 그러니 다시금 하나님 한테 빼앗기면 自己의 갈곳없는 곳으로 追放當하게 되었다. 그러니 至今까지 自己가 侍奉 받든 人類全部를 하나님便으로 옮겨지겠으니 自己의 便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侍奉하겠으니 사탄이는 이길을 막고저 하니 自己도 모심을 못받는 同時에 하나님까지 侍奉받지 못하게 하고저 하여서 부르짓는 것이 紳이 없다는 唯物思想이다.
이와같이 사탄은 末端에와서 하나님 對하여 人類歷史를 가진 手段으로 取하여 나온바는 事實이다. 이 本
部体 蘇聯은 自然히 한 末路는 地球上에서 容恕할수 없는 원수의 主義國家이다. 하나님까지 없다고 하여 사람들의 길을 막고저하는 唯物思想을 어찌 容納할수 있으랴. 이렇듯이 어느 時代나 사탄의 主權으로 勝級者들은 대개가 그 사탄 뜻 잘 받드는 者들이었다는 바는 事實이니 善者와 良心者들은 出世못하였다. 歷史를 보면 良心的 出世를 부른 時代가 없다. 그것은 惡의 支配區域圈內에 處하였기에 없었다.
이제부터 이 時代는 善者와 良心的 人士가 出世할수 있는 主權時代가 하나님만이 主權主管時代다. 그것은 歷史基点이 終局과 함께 理想出現時代의 第一要求存在들이다. 그런고로 善은 最後 勝利가 있으니 歷史를 通하여 善하라 義로워라하여 그 敎養目的으로 한바다. 이리하여 良心的 人士 中心한 主權 時代는 누구나 要求하는 時代다. 階級이 問題가 아닌 良心的 存在가 出世할 수 있는 世界가 되어야 한다. 이 時代와 世界는 再臨主 主管時代다. 이런 基礎가 있기에 예수도 貧者에 福音을 傳한다 하라한 原理가 있다. 그리하여 이런 存在를 基礎로 하여 至今과 같은 長成을 나오게 하였다.
이제는 富者가 하날쪽이니 良心的 사람의 自由權限의 터를 惡 對하여 하나님은 取하여 노았다. 그리하여 사람과 萬物 全部를 찾어야 하는 目的成事를 하는바다. 이 터우에 뜻하고 하나님은 良心的 人士를 높여서 어느 時代의 사람한테지지 않는 出世를 하게 하고저 하는 時代가 우리 理想時代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六千年 歷史를 通하여 가진 苦痛을 하여서 戰爭歷史로 回復의한 目的地으로 옮겨옴이다. 여기에 戰爭에 對한 罪라는 것은 國家的으로 義가 되며 個人的으로는 罪가된다는 이유도 사탄 對한 戰爭國이니 義도 個人的으로 빼앗고 죽이는 것이 罪됨은 사탄 侵入 防止할려니 罪라한다. 이런 社會的 矛盾과 같은 表示는 勿論 있어야한다는 것이 原理로 始作된바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와같은 根本 뜻을 알지 못하매 至今까지 全人類는 呻吟하여 오면서 그저 無目的者 모양으로 動作하여 나왔다. 歷史發展은 目的을 向하여 나오는데 사람은 無目的한 生涯로 나오는 其 人生은 누구 때문에 이와같이 無知者로 나왔나 하면은 그것은 두말할것없이 全部가 사탄 때문이다. 이와같은 事實을 안 人類는 本格的으로 하나님의 根本目的 向하여 무엇 아낌없이 뜻 成事를 侍奉하여야 할것이 事實이다. 그런고로 다시금 뜻 反對하는 者는 社會的으로나 個人的으로나 家族的으로나 어느곳에서라도 누구에게나 責望받는 時期가 온다. 그 時代가 良心主權時代다. 卽 善한 것 取하여만이 進步면서 出世할수 있는 時가 卽 理想時代이다. (51. 6. 28 記)
第四 章 復歸歷史로 된 人類發展歷史
墮落됨으로 人類發展歷史上에는 두 對立的 位置로서 對峙하여 나온바는 事實이다. 하나님은 原理創造理想을 찾고저 함이고 사탄은 非原理世界를 그냥 創造世界에 維持코저 함이 始作부터 歷史를 通하여 그 本體들이 左右하는 目的으로 向하여서 나아왔다. 그러나 사탄은 非原理存在며 宇宙에 非原理 사람의 生命의 根本이며 사랑의 根本이며 理想의 根本이며 그 自體와 하나되는 것이 크나큰 目的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絶對的으로 信, 順, 侍가 全目的되는 原理였다. 信從, 順從, 侍從하면은 原理에 立脚되는바니 사탄은 原理的 存在는 主管할수 없으며 하나님은 原理로 될 信從과 順從과 侍從을 通하여서 原理에 세워서 自己所有로 하게 하기 爲한 것이 人類對한 攝理와 同時에 사탄을 分立시키고저함의 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찾고저 하는바는 墮落 傳 時代가 要求이다. 그리하여 直接主管目的成事가 아바지가 創造하신 根本目的이면서 그것이 한 理想이다. 그러므로 墮落된 人間들 對하여서 하날的으로 取하여 세우고저 함의 時代가 卽 舊約時代다. 이 時代가 復歸의 한터가 되어 하나님의 復歸役事할 相對時代이다. 이 時代 以下가 要求하는 目的은 墮落前 時代로 도라가고저 하기 爲한 것이 목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攝理의 한 蘇生時代의 始作이다. 그 蘇生의 터를 中心하고 예수와서 直接 그 復歸目的을 하고저 하였으나 長成 部分만이고 한 完成目的을 남겨두고 役事한 것이 新約時代다. 그 長成되었으나 完成하여서 全天宙가 하나님을 中心하고 그 復歸理想을 完成하여야 할 時期가 卽 完成時期 再臨主 役事時期로다. 이와같은 歷史를 두고 至今 그 目的時代를 向하여 왔다. 그런고로 그 經路를 回顧하여 보면은 하나님의 復歸攝理前 時代가 있었든 바는 事實이다. 그 時期는 아담부터 노아 時代까지이다. 그 期間은 어떤 時期인가 하면은 惡 對한 하나님의 분별시대이었다. 그 時代로부터 노아 以後 아브라함으로 모세로 예수로 再臨主로서 復歸目的完成하고저 하나님은 人類歷史를 經過케 하여 나오신 바다. 이 歷史의 全目的은 어느 時代를 標準하고 하나님은 攝理하나 하면은 墮落前 아담 해와 時代이다.
그러면 그 時代의 社會와 하나님과의 어떤 體系를 갖인 形體의 社會였는가가 지금 復歸完成을 바라는 우리 現世界사람들이 바라는 根本目的이다. 이 目的이 앞날 新時期의 理想社會라는 것은 事實이다. 本來 하나님을 中心하고 나왔다면은 모두가 한 兄弟면서 한 子女이란 것은 勿論이다. 그런고로 全部가 한 아바지 뜻 中心하고 全 生涯를 完成하여 自己의 理想生活 肉身生活 永遠理想生活의 延長이란 目的으로 通하여 하날과 合한 理想國家 認識社會가
될바는 論할바 없는 事實인바다. 그런고로 人類는 찾어 올라가나 그 時代는 이 根本墮落前 時代 理想으로 表示되면서 世界 歷史上에 發露됨은 事實이다.
지금의 世界潮流도 全部가 眞理理想世界를 찾어 드러가는 한 關門 앞에 當到하여지는 時代가 卽 至今 時代다. 世界上에서 自然的으로 그 發展을 보아서도 그 目的 時代를 推測할수 있다. 그러니 歷史發展은 復歸 歷史發展이다. 歷史는 發展段階를 取하여 나온바이다. 卽 蘇生段階로부터 長成段階로 長成段階로부터 完成段階에로 나왔다. 그러면 至今은 어떤 段階時代나하면은 長成段階로부터 完成段階로 넘어가는 焦點時代다. 卽 이 時代는 墮落하는 時期段階까지 復歸된바를 表示하는 時代다. 즉 長成時期 예수를 中心한 國家들이 合하여 世界統一陣營成事時代다. 그런고로 우리가 아러서 한 目的과 世界政見을 가진다면은 하나님의 復歸理想을 알바가 至今 以後의 큰 中心點이다. 그것은 復歸라는 攝理가 있는 바를 確認할진대 今後 世界觀은 自然的 理解할바다. 墮落前 時代는 하나님을 基盤으로 한 父母를 中心한 子女兄弟時代이니 한 家庭을 中心한 世界인 同時에 하나님의 뜻을 어디나 侍시지 않음이 없는 世界란 바로 事實이다. 한 兄弟이니 또한 家庭이니 한 子女이니 또 아바지는 한 血統이면서 한몸이니 그야말로 差別을 두어 對할수 없는 家庭的을 中心한 社會制度라는 바도 안다. 여기에는 마음 通하여 아바지와 合하게 努力하면서 나가는 時代이니 物質이란 것이 相通이면서 共同所有라는 各自가 立場을 가치한 世界로 된다. 그런고로 그 世界는 有物相通時代요 하나님 뜻 合하여 幸福喜樂時代란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그야말로 理想共産主義時代가 墮落 없었든 世界理想임은 事實이다. 俗된 世上말로 하면은 理想共産時代가 其 時代였다.
그런고로 世界發展은 한 表示로서 이와같은 主義가 나온바도 사탄이 그 큰 目的을 前提로 證據한 表示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歷史를 두고 墮落한 段階까지 全世界를 復歸케 할려하는 것이 目的이다. 예수의 根本主義는 지금 理想主義를 갖고 始作한바다. 本來 創造世界에는 全主人은 아바지라는 것은 事實이다. 所有權이란 名詞가 積極性을 갖고 나온바는 墮落世界였기에 卽 사탄을 區分할려니 하나님은 사람, 사람사이에 所有權이란 것을 세운바이다. 全所有主人公은 하나님이시다. 또 人間의 아바지이시다. 이와같은 根本理想을 두었기에 앞 理想時代는 아바지 所有인 同時에 우리집 所有면서 우리집 所有니 즉 自己所有라는 目的을 두게 될 것
이다. 그런고로 問題는 眞正한 子女로 다시금 復歸되어 아바지 몸을 받아 血系를 完成하여 그 뜻을 取하여 나아가는 子女에게는 世界는 境界없는 自由家庭으로써 理想生活을 各自가 始作할바다. 그 生活이 直接永遠의 始作이니 良心아닌 善 外 것으로는 取할수 없는바가 事實이다. 그 世界가 卽 理想世界다.
1) 個性完成復歸時代
2) 自由理想復歸時代
3) 사랑 理想復歸時代
1) 하나님 天宙所有主人復歸時代
2) 根本父母를 復歸하여 侍시는 時代
3) 兄弟도로 찾어 共義共生으로 한 大家族建設時代
4) 하나님 子女찾어 사랑하며 同居時代
이 모든 것을 찾는 世界에는 主義가 없는 世界다. 卽 根本하나니 對立되는 무엇이 없는 共一 同一한 世界이므로 主義없는 世界라 할수 있다. 主義라는 것은 眞理를 찾어 나오는데 한 지팽이와 같은 것이다. 그 眞理体에 合하여 그저 眞理란 世界가 되는 時代다. 이 目的이 全世界的으로 展開하기 前에는 主義樣으로 나아가는 事實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繼續攝理하여서 온 六千年 歷史는 너무나 긴 時代였다.
그 過程을 다시금 歷史的으로 回顧하여보자.
아담 — 노아 — 아브라함 時代는
原始分別時代인 同時에 原始共生主義時代
이 시대는 勿論 하나님을 멀리하여 사탄과 合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잡으려하나 잡지 못한 時代다. 아브라함 보아도 希望없는 世界였다. 그런데 그 時代는 墮落하여 나려왔음으로 그 社會形體는 共産主義時代였다. 自由營農時代면서 自由遊牧時代였다. 集團共生体를 갖인 共産主義時代였다. 그런고로 이 時代를 한 限界를 두어 하나님은 淸算하는 審判을 하심이었다. 그것이 즉 노아 審判이었다. 그리하여서 다시금 찾어 세우려고 하는 바는 根本自由理想世界가 目的이니 審判後 부터는 分別하여 擇한 氏族을 中心하고 復歸할려고 하여 노아를 擇하였다. 그러나 뜻 合意보지 못하여 아브라함부터 첫 工作始作하심이 아브라함 擇함이다. 다시 發展段階를 區別하여 表示하여 보면
原始共生主義時代(分別時代)
氏族- 民族 - 국가 (蘇生舊約時代)
國家- 同盟國- 國際(長成新約時代)
國際- 하날 世界- 天宙(完成成約時代)
하나님이 다시금 根本 뜻을 復歸하고저하니 아브라함을 中心하고 뜻의 始作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氏族을 中心하고 繁殖케 하여서 한 系族體系로부터 民族을 造成하기 始作하였다. 그리하여서 사탄의 對立을 세워 나가게 되었다. 本來 氏族을 擇하여 直接 根本으로 復歸할 수 없고 對敵되는 사탄 支配國 對하여 설수 있는 한 體系를 갖게 되었다. 아브라함 擇한 後 벌써 사탄의 支配國家體系를 造成하여 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한 國家를 세울수 있는 氏族으로 繁殖케 하였다. 그러면서 애급 四百年 蕩減時代를 通하여 가면서 氏族의 한 部族으로 造成케 되게 하여서는 그와 兼하여 財物이란 것을 所有케하는 것이 始作하였다. 그것은 사탄 所有世界를 빼앗으야겠으니 部族으로 卽 民族으로 造成하여서 애급을 出發한 後부터 全生活은 墮落前 基本形体이란 表示的 段階를 取하여 共生主義인 生活樣式을 中心하고 하나님을 中心케 하심이었다. 그 當時 뜻에 合意치 않는 外 사람은 罰한바는 사탄 侵入하니 直決處分하였든 바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民族들은 가나안 땅을 向하여 찾어들게 될 때는 벌써 土地나 모든 所有할수 있는 財物이란 것은 共生理念 밑에서 分配하는 그 樣式을 갖게 한바다. 그 理由는 全世界를 復歸코저하는 그 時代의 한 蘇生時代이니 國家造成하여서 惡 對立하여 나왔다. 그런고로 蘇生時代의 한 完成을 보기 爲하여서 氏族부터 民族으로 國家으로 한 段階發展하여서 한뜻의 成事의 터를 잡은 바를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사탄이 對立이 되니 人間社會에서도 支配로 하여 虐待하여 온바다. 그 對立的 被支配者인 사람 世界에는 奴隸時代와 같은 非原理時代가 出生하는바다. 먼츰은 擇함 받은 氏族 아브라함 子孫이 애급에서 奴隸生活을 하였다. 또 이스라엘 百姓한테도 사탄 對 國家면 國家 民族이면 民族 사이에는 敗하면 奴隸的 支配時代가 生起는 非原理時代이었음이었다. 이리하여 歷史的으로보면은 이 奴隸的 時代는 주로 資本을 주로하여 歷史發展史上에 표시로 된다. 그 理由는 勝하면은 資本을 取하는 것이고 敗하면은 그에 對한 拘束을 받음으로 奴隸的 始作과 同時에 긴 歷史로 흘러온 이 傾向이 社會的 한 風習化하여서 同族間에도 이와같은 傾向이 歷史를 보게 되는 바다. 이 모두가 그 反對되는 非原理存在가 있었기에 이런 始作이 歷史上 必然的한 産物로 보여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民族이 한 國家를 造成하게됨에 그 本目的은 國家資本을 蓄積하게 하여 神 對한 支配國家間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 理由는 世界의 全部를 찾고저하여 所有限界를 定하여서 나왔다. 여기에 侵略이란 原因이 始作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百姓을 中心하고 한 國家를 造成하여서 한 뜻의 基臺를 잡고 그 基臺우에 理想復歸
實踐者로서 예수가 오게 되었다. 예수 온바는 그 한 國家를 뜻 中心한 國家造成할 수 있도록 하여서 하고저 하심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한 國家 蘇生基臺우에 長成使命과 完成使命을 兼하여 成事하고저 하였으나 사람이 不信, 不順, 不侍이니 原理아닌 目的國家體系로 서게되니 十字架로 因하여 그 目的을 向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百姓은 根本目的은 破한 百姓이니 擇한 者지만 예수 죽인 罪와 歷史的 罪에 대한 蕩減期間을 긴 歷史를 두고 始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百姓은 全世界에 虐待받는 民族으로 國民으로써 各地에 헤져서 그 蕩減使命과 同時에 그때를 채워서 다시금 뜻을 繼承한 信仰國家들과 合하여서 한 國家를 始作하게 하여서 全예수의 目的에 合한 國家를 中心하고도 사탄 對하여 攻勢를 取하는 한편 勝利的으로 보기 爲하여 各 國家들은 두 陣營으로 同盟이란 名稱으로 合國으로 나와 한 相對國들을 對하게 하였다.
그런고로 이 한 國家로부터 딴 國家를 合하려니 主義國家가 生起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 中心한 國家主義國과 그 對 陣營은 歷史上에 必然的 表示로 展開한바다. 그 結果로서 對立으로 보는 陣營으로 나왔다. 하나님便에 屬하면 原理的이니 自然그 發展과 함께 資本蓄積은 自然富大한 것으로 始作되었다. 그런고로 지금 보면은 유대 百姓과 米英人들은 本來 하나님의 支配하는 한 百姓들이다. 그런고로 사탄은 漸漸 그 末路를 當하여서 지금에는 最終点上으로서 그 位置를 세울수 없게 될 때가 멀지 않어온다. 그리하여서 長成時代가 完成을 볼바다. 그런고로 사탄을 中心한 共産國家는 自然的으로 敗亡한다는 것이 事實이다. 그런데 예수오면서 言語에 對한 區分을 破하는 方言 말하는 弟子의 役事도 벌써 바벨塔부터 言語不通이든 것이 그 本意義는 破하는 表示면서 뜻의 한 始作이면서 全世界的 再創造 始作의 攝理라는 事實의 表證함을 故하는바다.
이와같이 예수의 最高目的도 終局 共生共義主義理想이니 이런 貌樣으로 나온바다. 그런고로 예수로 因하여 長成時期가 가까워오니 共産主義者들이 먼츰 흉내 體系로 나타남은 그 原理的 事實이다. 그런고로 예수로 因한 理想世界가 卽 再臨主時代이다. 이와같이 歷史는 復歸路程을 따라 하나님의 攝理下에서 움지겨온바 보아도 앞 理想世界를 알수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한 社會主義國家時代를 지나 共義共生主義時代로 드러가게 하는바가 지금 以後時代의 要求目的이다. 卽 하날과 땅이 하나되는 理想丹和世界가 된다. 丹和世界란 것은 하날과 땅 어데나
和合하여 한 丹形体를 完成하여 다시는 衝突없는 自由라는 뜻이다. 온 天宙가 和하여 丹一하는 其 世界가 丹和世界다. 또 이 世界를 天宙主義世界라고도 한다. 이 世界를 造成하기 爲한 目的이 하나님의 創造目的이면서 復歸目的이다. 丹和世界는 全世界가 一되는 때이다. 그 段階까지 나아가는데는 共義主義라고 하여 나아가 丹和世界로 完成을 볼바다. 이 目的達成이 完成時代 卽 再臨主時代다. 이 時代는 無戰爭時代이다. 사람에 鬪爭이 있었음은 三原理로 基因하여 生起였다.
1. 原理基本에 背馳되는 存在 有함으로 —–神對
2. 主義相異함으로 ——————— 人對 統一하는 것이
3. 生活相異 함으로 ——————– 物對 人類의 使命
以上과 같은 基本原理에 對比되는 딴 存在가 있었기에 人類歷史上 戰爭의 자적을 보게 되었다. 그러든 그 原理基本背馳存在는 없어지니 主義相異케하는 者없으니 生活相異한 貌樣도 없게 되니 그 時代는 必然的으로 無戰爭時代가 되는바이다. 이런 事實을 알고는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되는바는 各自에게 있어 누구보담도 全天宙에 남어진 充當使命을 다하여야 된다. 그리하여 永遠家庭建設을 天宙에 達成하여야 한다. 至今 世界를 보면 自由를 찾기 爲하여서 싸우며 그리하야 自由찾은 後면 사랑 理想 찾으여야 하며 그 後에는 個性理想完成키 爲한 名位(個性 尊重) 세우기 爲한 樣으로 至今世界는 움지겨지는 바는 全部가 未來의 뜻 成事의 한 表示的 象徵이다. 지금 自由國家 最高位에 가 있는 國家들은 벌써 이와같은 方向으로 나가는 것은 事實이다. 이리하여야 人間이 根本을 찾는 것이다. 사람 한 自體에게는 自由理想이 있고 사랑 理想이 있고 個性完成할 侍가 가까워오는 復歸路程에 서 있으니 必然的 逢着인 바는 事實이다. 萬一 過渡段階에 處하여 그 使命을 빨리하여야할 自由國家들의 使命이 重大한바다. 그리하여 全世界는 再臨主를 中心하고 먼츰 生活統一 主義統一 宇宙統一 天宙統一 그 중 사탄으로 因한 分岐된 言語統一로 이와같은 根本基一世界로 되어야 하는바가 世界人類의 歷史的 理想終點이다.
하나로부터 始作한 것이 靈數로 多數로 單位 合하여 基一点으로 起動作用하는 바가 創造根本目的이다. 이 目的을 反하는 者는 어떤 者라는바는 잘알바는 永生生活世界를 破하는 者라는 바는 勿論이다. 이런 者는 個人으로도 勿論 國家的 世界的으로 對 罰받으어야 한다. 그러면
唯物論者들이 말하는 社會發展原因과 發展歷史를 두고 하날 攝理的 使命으로 批判하여보자.
唯物論者들은 社會發展 原因에 對하여 正, 反, 合 論理로 주로 하고 있다. 그러면은 世界上에는 原理的으로 본다면 그 路程은 原理에는 변함없이 그 存在位置를 取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世界를 보면 어느 것이 참 原理的 立場인지 確實하게 보여지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것은 아직까지 世界上에 참 原理가 나와있지 않음을 證據하는 事實이다. 지금 有物史觀은 現世界에 있어서 크나큰 前程에 대한 人生에게 큰 難關門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은 唯物史觀의 目的하는 人類歷史發展은 어떤 곳으로 向하고 있는가 하면은 그것 亦是 原始時代形을 向하여 發展段階를 取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社會는 勿論 發展한다. 發展은 完成을 目標하는 同時에 理想을 紹介하는 바는 事實일터인데 그 發展最高地는 原始時代形으로 歸結하는가. 여기에 큰 疑心이 生起는 問題이다. 그들이 말하는 正, 反, 合 發展理論은 根本的으로 그 目的標準에 있어서 原始時代形으로 도라간다는 것은 다시금 退步하는 原理를 찾는다는 結論을 보니 그것 發展目的은 未完成形으로 된다. 반드시 發展할려면 正을 對하여 反이란 存在位置에서 始作을본다면은 正에 對하여 왜 反은 生起는 가는 未知이다. 그러면 왜 合하여 나가는가 그 나가는데는 必然的 終的 目的을 向하여 나아간다. 그런 終點 目的은 딴 것으로 나타나서 正, 反, 合 論理의 理想型을 完成하여야 하는바인데 最終点에는 다시금 始作한 基点으로 歸結하니 그 發展論理에는 發展이 아닌 破壞形路를 取하였다는 結論이 된다. 그러면 正과 反이란 名詞를 세운바는 그 原理로 보면 果然 有한바다. 本來 天地創造부터 正이란 存在에게는 反이란 名詞는 없는바이다. 正이라면은 그 正中에는 蘇生으로부터 長成으로 長成으로부터 完成으로 하는 眞理路程을 갖고 移變形을 보여주나 根本的으로는 變함이 아닌 完成路中에 서 있음을 보여줌에 不過하다. 또 反이란 存在가 有하다면은 그 反이란 存在는 本來부터 있을 수 없는 바도된다. 이 反이란 名詞가 第一重要点으로 되어서 人類는 至今까지 未知의 中心을 잡게 하는 起源이된바이다. 原理를 中心한 世界에 反이란 存在할수 없음이다. 그런데 反이란 存在가 生起는 것은 非原理로부터 始作이다. 이것의 主人公이 卽 사탄인바다.
그러면 唯物論者들이 말하는 正, 反, 合 論理는 正이 먼츰 할바가 아니고 反이 먼츰 始作한것이기에 正으로 되기 爲하여는 路程이 人類發展歷史면서 發展原因인바다. 本來 世界上에는 正이먼츰 始作본바가 아니고 反이 始作하였기에 正으로 할려니 歷史는 原點地인 原始時代形으로 나가고저 하는 바는 基本 正으로 出發본바와 같이하여 찾어 맞추기 爲하는바다. 그러니 唯物論者들이 發展사를 말하려면 正을 먼츰 세우지말고 反을 먼츰 始作으로
잡아야 한다. 本來부터 世界는 原理世界이니 反이란 存在는 完成路程을 取할 수 없는 것은 對像目的을 爲한 世界의 根本인바다. 그러니 反은 未完成이다. 卽 破壞를 造成하여 준다. 그러니 發展하는 以上 存在한다면 正을 돕기 爲한 中間時期에는 認定허나 目的時期에는 그 動向을 無로 하고마는 것이 原理世界의 現象인바다.
그런고로 反이 먼츰 始作함을 對하여 正으로 回復할려는 結論으로 되니 歷史發展은 反이 始作보기 前 原始時代로 도라간다. 그런고로 正反合 論理는 根本的으로 보면 反, 正, 合 論理로서 되어야 하는바가 根本인바다. 反對되는 것이 나타났으니 이 原理世界에서는 있을 수 없으나 正으로 向하는 路程이 人類發展史인 바이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적 便으로서 原理的 立場에서 視察하니 反, 正, 合 論理가 하나님편 쪽으로는 그 根本的 事實을 밝히는 바이다. 여기에 反이란 存在는 사탄이요 이것은 破壞形 無를 造成하니 그 目的을 막고 完全繼續할려니 正이란 位置으로 넘겨받은 路程이 人類發展史인바이다. 그리하여 反은 正을 成事하는 한 本과 같이 보여지나 本來부터 그 自體는 根本아니고 根本으로 表現化 하는 것이니 正의 位置를 定한다. 그러니 本來는 正되어야 할것이 反이 되었으니 지금까지 큰 難事의 始作을 繼續하였다.
그러면 反이란 存在가 繼續할수 있는 限界는 原始時代形으로 도라가 完全 正 하나님 便쪽에서 만이 反은 晶體를 中止할바이다. 그러니 이 反이란 存在를 處置코저하여 根本正이 끝까지 찾어 올라온 것이 人類發展歷史이다. 그런고로 反, 正, 合 論理의 結末은 本來부터 唯物論者들이 말하는 理想論理로 하지만 그 末点에 가서는 破壞라는 結論点을 逢着하는 것으로 된다. 그것은 發展하는 바는 向進인데 原始時代形으로 도라가는 것이 發展史라는 相衝하는 論理인바이다. 그러면 唯物論者들이 말하는 社會發展論理는 根本的으로 이런 根本中心點을 未解決이니 그것은 勿論인바이다. 그런고로 여기에 그네들이 말하는 正, 反, 合 論理에 對하여서는 우리는 根本的 視察로서 그 末路를 決定하는 바이다. 그러니 反에 對立한 正만이 남는 것이 天宙天理인바다. 이 正이란 곳은 墮落前이닌 卽 始作点으로 되는 바니 人類歷史는 始作点을 찾어 올라가지 않으면 造物主가 게시지 않는 結論이 成立된다. 그러니 正이란 存在가 正으로써 出發할려고 하는 바의 目的이 造物主의 目的인바다. 그러니 歷史의 끝을 正이라고 結論한다. 그러니 最高文明世界는 正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便쪽이란 完成을 結論한다. 그러니 지금 世界를 正이 主管하여야 하는 바가 原理的 目的이니 하나님 便 正과 사탄 便 反과 對하는 끝에는 正만이 남는다. 그러니 正이 主管하는 世界이니 이 世界는 하나님이 主管하는
基督理想으로 歸結하여야 한다.
그러니 現信仰者들은 動員하여 反에 對한 正에 설 主管世界를 造成할바가 지금 世界의 基督敎의 使命인바이다. 그러니 그 方策은 自然히 하날뜻을 合하여야 하는 바이다. 이 根本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사탄 對하여서 總突擊하여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바이다.
所謂 唯物論者들이 말하는 人類歷史發展을 段階로써 記錄하여서 하나님적 復歸歷史로 된 人類發展歷史와 比하여 보자. 하나님이 계시니 이런 發展을 본다.
唯物論的 發展史 段階 卽 1. 原始共産主義時代 2. 氏族社會主義時代 3. 奴隸主義時代 4. 封建主義時代 5. 資本主義時代 6. 帝國主義時代 7. 社會主義時代 8. 共産主義時代
이와같이 歷史發展을 잡고 있다. 果然 그들이 이런 人類發展歷史를 잡고 있지만 왜 이런 發展을 하는가는 根本問題는 未知이다.
왜 原始共産主義時代에서 氏族社會主義時代로 떠러지는가 하는 基本原因은 未知인바다. 이런 發展眞狀을 보여주는 바는 내가 論하는 反이 먼츰 始作함으로 論한데서 始作이란바를 다들 알줄안다. 다시 그 段階를 잡아 밝혀보면은 原始共産主義時代에서 氏族社會主義時代로 되는 바는 사탄 對한 하나님 便쪽 對策으로 因한바이다. 卽 分立하려니 氏族主義로서 全部가 通할수 없는 分岐를 正하니 自然的 世界上에는 이런 形狀을 보여주는 것으로 내려온다. 또 氏族社會가 變하여서 奴隸主義時代로 드러가는 것은 하나님과 사탄은 사람 中心하고 빼앗는 役事를 하니 하날便쪽 사람과 사탄 便쪽 사람과는 원수니 反을 對하여 正이 反을 支配하여 그 財物을 取하여지게되니 이런 時代로 드러간다. 이러하여 하날은 사람과 財物을 取할려니 自然的 膳物로서 긴 役事로서 風習化한 時代로 되니 이런 時代가 보여짐이다.
그러면서 奴隸主義로부터 封建主義時代로 나타나는바는 서로 사람을 自己편으로 保守하여 分立을 보려니 서로 서로 通하는 길을 막으려니 이런 傾向이 表現化 하여지니 이런 封建主義時代로서 사탄은 自己의 存在維持를 圖謀한바이다. 그리하여서 이 封建時代를 넘어서는 資本主義時代로 나타나는 바는 이도 亦是 하날편과 사탄편이 서로 世界를 찾고저 하는 目的으로 하니 資本을 먼츰 取하게 되는 바이다. 이 資本의 始作은 奴隸時代로부터 封建時代로서 또 이 以上時代로 중심은 資本을 中心하고 모든 方向은 始作된다. 그러면 資本을 中心하고 旺盛하여 그 勢力은 自然히 帝國主義라는 目的으로 向하는 바이다. 그러니 資本갖고 나라까지 主管하여 世界까지 左右하는 時代로 나타난다. 그 다음은 무슨 時代나 하면은 社會主義時代가 온다. 그 다음은 共産主義
時代가 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 事實은 果然 하나님의 뜻이 成事할 未來에 對한 目的으로 하고 있기에 歷史도 이런 방향으로 나오는 바다. 그러니 지금까지 보면 現世界는 所謂 唯物論者들이 말하는 社會主義時代라고 하여 共産主義時代를 向할려는 始作時代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正을 中心으로 하여 하나님은 歷史發展을 支配하여오니 自然的으로 그 歷史上에는 反이 먼츰 始作하였으니 먼츰 사탄이 흉내내여 나타나서 正으로 引繼하여 주는바가 原理인데 그러면 今後世界는 自然히 이런 路程으로 方向을 行한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종적으로 完成할려니 基督社會主義世界를 目的으로 하여 惡 對하고 다음은 全世界全部를 合하여 基督共産主義時代로 目的하는 바이다. 그러니 世界는 果然 原始時代形으로 도라가는 바가 事實인바는 하나님의 基本出發 基点으로 向하게 하니 必然的 路程으로 보여주어 原始時代形으로 도로가는 樣으로 보여준바다.
그러면 現基督敎를 中心한 國家는 언제나 그 目的에 있어서는 안될 時代를 보는바다. 그런고로 나는 여기에 이런 原理的 視察을 보아서 이 基督社會主義時代와 基督共産主義時代를 中心한 곳으로 나아가는 歷史의 指向을 밝혀서 하나님의 뜻을 中心한 世界를 基督理想化를 本하여서 發表한바가 卽 原理的共生共義主義로 하여 丹和世界로서 發表한바다. 하나님이 계시는 以上에는 반드시 이런 發展路程은 必然的 路程이니 사탄도 結局 하나님의 길 돕는 格으로 原理目的하여서 하나님 편에 屈服을 要하여서 나오는 바이다. 그러니 지금 三次戰을 말하는 比時여 世界基督敎信仰界는 統一戰線을 取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本하여 再臨主를 對하기 爲한 準備를 完成하였는가 하는 立場에 있음을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이런 目的을 原理的으로 實行하는 時代가 再臨理想時代이다. 이 理想時代가 가까워 오니 그 反面 사탄은 强制로써 하날 흉내를 먼츰 하는 것이 그 基本眞狀이니 全基督敎主義 中心한 “UN"은 斷呼한 對策을 取하여야 한다. 이 唯物論者들이 말하는 發展史도 한 一理있는 거짓 흉내者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便的 復歸歷史發展段階를 中心하고 그 限界를 比較하여 보면 이러하다.
正 反
原始共産主義時代—(分別時代) — 原始共産時代, 氏族社會主義時代
氏族→民族→國家—(蘇生, 舊約時代)–奴隸主義時代, 封建主義時代
國家→同盟國→國際–(長成, 新約時代)–資本主義時代, 帝國主義時代
國際→하날세계→천주-(完成, 成約時代)-社會主義時代, 共産主義時代
이와같이 正과 反의 發展史로 보면 한 目的으로 合하는 歷史는 發展하여 나온바이다. 그러니 지금 潮流는 이 두 陣營이 對峠하여서 勝敗를 結하는 潮流時代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있는 以上에는 이 勝敗하기 前에는 平和는 없는바이다. 그러니 지금 基督理想을 中斷하여 成事하여야 할 國際聯合에 使命은 重大하면서 앞날 現基督理想을 中心으로 한 米, 英을 中心한 U.N 機構는 特히 使命이 큰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米英 猶大 그 外 基督理想을 갖인 國家들에게 祝福한바도 끝날 뜻 速進化를 爲하여서 祝福한바이다. 그러니 全部는 合하여 예수의 最高理想인 唯物相通世界를 地球上에 建設코저 하는바가 目的인바이다. 이것 爲하여 예수는 再臨하는 바다. 그러니 뜻 合하여서 再臨主를 中心하고 뜻 侍奉으로 根本復歸를 完成하는데 全部 合하여 動員하여야 하는 時代는 왔다. 무엇이나 뜻 못바뜨는 者는 自然的으로 하나님은 全世界를 中心하고 그 存在位置를 달리하여서 對할바는 事實이다.
그러니 復歸路程을 바뜨러 地上天國의 建設로서 新出發하여 한 原理的 家庭으로 하는 父母없는 子息의 立場을 變하여 父母를 世界的으로 復歸하여 잃어버렸든 全世界 人類는 한 兄弟로써 大家庭인 丹和的 理想을 建設할려니 하나님은 現今 基督敎 對하여서 分立을 보게하여 自然的으로 現基督敎界는 이런 傾向線을 보게할바가 하나님이 계시는 以上 나타나는바이다. 그러니 이런 根本을 알고 기버서 하날 子女의 立場을 復歸하여 빨리 사탄 對하여서 集結하게 할 責任이 基督敎의 使命課業인바다. 그리하여 이 目的으로 全世界에 分立본 基督敎는 統一로써 볼바이면서 世界統一을 中心한 基督敎의 最高目的을 完遂할바가 하나님이 바라는 目的인 바이다. 그렇지 않으면 惡사탄은우리를 向하여 繼續되는 對立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根本 뜻을 延長하는 두려운 結果를 招來하는 바이다.
그러니 現今 基督敎는 全世界를 中心한 中心國家들을 주로하여 合하여야 할 責任이 重한바이다. 그러므로 우리 信者는 하날 中心하고 하나되어 國境을 넘고 民族을 超越하여서 合同한 統一戰線으로 하여 사탄의 餘命을 根絶하여 全世界 各自가 한 目的으로 向하여야 할바가 目的으로 된다. 그런고로 基督敎는 現社會를 움지기는 中心動力으로 하여서 모든 未及的 部分을 完成에로 하여 하나님의 目的을 達成하여야 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永遠한 永遠主義를 建設하여서 地上天國을 達成하여 再臨主와 合하여 하날 全體와 合하는 直接同居時代로 向하여야 하는 바이다. 이것이 人類가 바라든 理想이요 歷史的 目的이요 造物主와 예수의 目的이면서 사탄 根本追放成事를 完成
하는 바이다.
이런 重大한 立場을 아지 못하고 現社會를 抛棄하여 온 現基督敎信者는 果然 하날的으로 기버하는 立場이라고는 할수 없는 바는 事實이다. 이제는 알았으니 抽象的 信仰觀念의 잠을 깨뜨리고 新아침의 新消息에 合하여 全世界를 하날 主管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되는 바이다. 그러니 過去未知였든 立場의 不足을 容納하여 全世界 人類는 앎의 兄弟로서 國境을 넘어 하날나라 國際를 目的하고 活動하여 全人類에 對한 平和建設을 國際的으로 하면서 國際統治目的으로 하나의 根本目的을 完遂하여야 基本創造目的이 完成되는 바이다. 그러니 내가 이런 것을 發表함을 보고 疑心되는 者는 眞心으로 하날 對하여 事實 如何를 問議하여 解決받음으로서 最高位信者는 한곳으로 合함을 바라는 使命을 받들어 全世界 信仰界에 對하여 傳하는 바이다. 그러니 앞날은 國際統治時代가 반드시 온다. 그리하여 再臨理想을 地球上 한 中心地로부터 始作하여 하나로부터 全體로서 國際와 連하는 目的을 完成하게 하고저 하는바가 하나님이 攝理하시는 目的인바이다.
第八 章 四十日 復歸코저한 攝理路程의 根本意義
人間世界에 해와로 因하여 墮落이 始作하여지니 그때부터 人間世界에는 非原理存在에 屬하여 나오는 反面에 하나님은 原理的 復歸코저 態勢를 取하여 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中心하고 原理的으로 直系의 血代는 至今까지 攝理의 한 所望으로 남어지고 그 直系的 血系는 非原理的으로 始作한바는 事實이다. 이런 根本 뜻은 다시금 찾어 根本血系를 始作하는 것이 하나님의 創造本意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墮落된 人間일망정 抛棄하지 못하고 原理的 復歸原則을 바라보면서 至今까지 繼續되는 歷史를 본바는 論한바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子女 中 가인 아벨의 대한 祭物받는 根本 뜻도 알줄안다. 가인은 사탄의 初血系 表示者요 아벨은 아담의 나종적으로 해와 對한 表示的 者이매 根本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者임으로 하나님은 다시금 찾고저 할 때에 첫 生産者보담 다음 者 아벨을 사랑적으로 對한 原因은 알바이다. 聖經에도 하나님이 아벨 祭物받게되는 理由는 未知으로 나타나 써있다. 그것은 그 時代的으로 먼츰 알수 없는 原理復歸코저하는 歷史的 뜻의 成事를 볼바가 되지 못함으로 至今까지 未知로 되었다.
아담 해와 中心하고 찾고저 하나님은 하지 못한바도 非原理 存在가 먼츰 한 主人格 相對로서 있기에 한 主人 相對로 原理로된 創造的 原理가 있기에 아담 해와로 因한 復歸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서 二性分立을 보아 順從과 不順從을 作定케 하는 表示物이 卽 아담 두 아들의 祭物인바다. 왜 가인 祭物 안받는 바는 사탄적 生産血系의 結實存在 였으므로 가인 祭物 보담 아벨의 祭物을 받음이었다. 아벨이러 誠心 다하였다는 바는 聖經에도 없는 바이다. 이 根本的 原理가 이런 原理로 되어있는 原理라는 바를 알게 될 때에 根本 墮落에 對한 내 發表가 정론임을 알바다. 가인도 아벨 對한 反擊이 없었으면은 다시금 기쁜 復歸로 될바이었으나 하날의 뜻 아지 못하고 하날 對하는 反擊의 始作이 있으니 하날 뜻 破壞를 始作하게하는 基源點을 始作한바이다. 만일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품으로 찾어드렸으면은 사탄 所有物이란 分立을 防止하였을 것이다. 그런 立場에 서 있는 가인 한 自體의 行動이야 人間의 第一 슬픔의 始作의 基点을 짓게 되었다.
그로 因하여 아벨 죽이니 하나님은 아벨 代身 셋을 wdj서 攝理를 다시금 세우고저 하였다. 셋을 주어서 歷史를 經過하는 途中에 셋 子孫 亦是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가인 子孫이 좋아하는 사탄
便 짝으로 全人類는 사탄 所有란 非原理 世界를 造成한 셈이다. 그러니 이를 淸算하고 뜻의 사람 擇함이 노아이었다. 노아는 그 時代的으로 하나님의 所望의 存在이면서 그 時代世界人類보담 貴한 所望存在이었다.
노아를 中心하고 하나님은 뜻의 人間을 造成하고저 하니 全世界에 全部를 分立하는 하날便족으로 分別시키고저 하는 것이 目的이니 사탄 所有物 不順者 合하여 全滅케 하는 바이었다. 그 目的은 不順者 所有物을 世界上에서 追放하고저 함이 始作이였으니 根本的으로 하나님은 自己의 所有物만 世界上에 始作보고저 함에서 對策 取함이 노아 審判이다. 이 審判은 무슨 意味냐 하면은 創造하였든 根本原理的 立場을 復歸하고저 함에서 始作이라는 바는 事實이다. 먼츰 사탄 侵入받은 아담 해와로 因한 萬物은 사탄 血로 因하여 하나님과 떠난 것이므로 全部를 淸算한바이다.
노아를 擇하심은 全部를 다시금 찾어세우는 모양으로 노아의 方舟에 모든 生物을 노아에게 준바이다. 이것은 第二 創造理想 始作이 目的이었다. 이 노아가 하나님의 뜻 成事하여야 할 義務的 立場이란 바는 말할바 없는 바이었다. 그런 노아도 人間 第二 祖上으로 繼代를 잡고저 하는 基盤工作은 어찌되었나하면은 함의 行動으로 사탄이 하나님 앞에 自己의 血系的 證據格으로 서니 하나님 앞에 自己의 血族이 있음을 세워서 다시금 侵入하여 取케 되니 함이 가나안의 父로 되는 바이다. 그것은 아버지 裸體로 因한 行動으로 始作함이다. 이것이 至今 본다면 좋은 行動 같은데 왜 하나님이 第一 미워하는 行動이 되며 하나님과 怨讐된다는 行動인가는 두말할바 없이 해와의 墮落 根本을 表徵한 事實인 根本과 合하는 血緣的 關係로 表示하였기에 사탄 侵入을 또다시 가나안 父格으로 함을 通하여 始作본바가 根本이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이 審判한 目的은 第二次的으로는 根本始作을 보아 出發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있어서 찾고저 하는 全目的을 잃어버린 反對目的이 結果된 셈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審判은 하였으나 審判하기 前과 같은 始作點을 본 것으로 되니 하나님은 根本目的의 要求를 다시금 찾어야 하게 되었다. 卽 審判할적에 하나님은 四十晝夜를 두고 審判하였다. 이 四十日은 하나님의 뜻 成事의 始作잡은 基本을 作定하는 期間임은 사실이다. 이 四十日에 對한 目的은 사탄 全部를 追放하는 것이 目的이다. 이 사탄 追放目的은 함으로 因하여 다시금 侵入基臺를 잡고 하나님의 根
本 뜻을 未成事로 始作을 본셈이다. 하나님의 四十日 審判은 無效果로 되어지었다. 四十日을 뜻맞게 찾으면은 根本目的 成事를 볼바이었는데 四十日을 未成事한양으로 나아가니 四十日의 目的의 全部가 잃어버린 目的으로 始作을 본바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四十日을 잃어버린것과 같은 것이 되었으니 다시금 뜻 세우는 길에는 四十日이라는 根本目的成事가 最高目的이면서 이것 찾어 세우여야만 뜻 成事란 目的完成이니 이 四十日을 中心하고 사탄 分立을 作定키 위한바이다.
이 四十日을 사탄 對하여 찾어 세우여야하는 한 分岐點으로 남어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四十日을 中心하고 攝理의 始作은 언제나 問題로 나타나고 있다. 노아의 四十日 期間이 卽 審判의 全目的이니 四十日 끝났을때의 行事로 하나님이 創造하든 完成을 標準한때와 한가지로 出發코저 하시었다. 노아는 四十日 지난 後에는 鴉를 내보냄이었다. 이것은 創造 받은 世界에 사탄이 먼츰 始作하였든 바를 다시금 찾어 成事할 表示의 象徵이었다. 卽 鴉를 내보내였으나 돌아들어오지 않았다. 창세기 八章 七節에 보면 鴉는 世上의 水이 마르기까지 往來하는지라하시었다. 먼츰 내보낸 鴉는 왜 노아한테 돌아 드러오지 못하고 이 모양으로 行하는가 하면은 먼츰 사탄이 이와같이 되어서 行한다 하는 表示로서 鴉를 내보내심이었다. 사탄이 물로 審判받은 水上을 다니면서 쉬일곳 찾고 있다는 한 表示로됨이 鴉 내보내심의 象徵이었다.
다음에는 鴿를 내보내였으나 鴿은 地面의 水로 因하여 발부치지 못하고 다시금 노아 方舟로 도라오니 노아가 手를 내미려 受入하고(창8/8/12) 七日을 기다려서 鴿을 내놓으니 夕時에 鴿가 橄欖樹葉을 口에 물고 드러오난지라. 그 後 또 七日을 지내서 鴿을 놓아주니 다시금 도라오지 않았다. 이는 鴿로 因하여 三次나 보내서만이 비로소 完全히 地上을 찾어서 繁殖할수 있는 船없이 直接 살수 있다는 한 表示로 되어있다. 이 表示도 무엇이냐하면 墮落時부터 眞理全部에 대한 復歸의 한 表示로 되어있다. 첫 번 鴿은 第一次 아담의 始作을 보려고 하였으나 鴿 水로 因하여 돌아온것과 같이 그 靈이 하나님 앞에 도라온바와 한가지고 卽 노아가 손을 내미려 鴿을 받아들이심과 같이 아담 靈을 받아드리심이었다. 鴿을 方舟로 받아드린것과 같이 그 方舟는 하늘 全部의 表示였다. 卽 三層天 表示로 된바이었다. 方舟도 上, 中, 下로 된바도 하날 三層天 表示로서 基因한바다. 다음 鴿는 二次 아담, 예수를 表示함인데 예수는 아담 靈이 보내심을 받아 땅을 찾어 繁殖 生이 地를 찾고저
하였으나 橄欖樹葉만 물고 왔다 하는바는 예수와서 뜻 成事할려고 하였으나 땅이 아직 받을 수 있는 땅이 못됨으로 찾을 수 있는 約束을 세워서 基臺成事한 表示로 된바며 三次 鴿는 完全히 뜻 成事 始作을 完成하신다는 한 表示的 內容을 보여주심이다. 故로 眞理復歸에는 蘇生부터 長生으로 完成으로 한 目的達成한다는 萬宇宙 創造原理를 標準하였기에 이렇게 表示된바이다. 하나님이 七日間隔둔 바는 첫 번도 完成할려고 한 것이 延長되니 卽 七日 理想延長되니 이런 間隔을 두어 役事함이다. 第一次는 한 期間을 두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뜻을 第一次 鴿的으로 成事코저 하였으나 땅을 死之圈에 잠기었기에 도라왔고 第二次 成事할려고 하였으나 땅이 받지 못하여서 도라오고 第三次 만에는 아무리 하여도 成事한다는 한 限界를 表示함이다. 그런고로 成事치 못한바는 하나님이 未成事케 한바가 아니고 땅들이 받들지 못함으로 延長된다는 한 表示로서 第一次 第二次 第三次로 延長된다는 바를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아담 墮落으로 因하여 鴿가 도라온바와 한가지로 第二次 아담 完成者로 오신 예수는 땅이 받지 못하여 約束만 成事하고 도라오고 完成 第三 아담 와서 完成된다는 뜻이므로 鴿 三次는 도라오지 않음은 뜻 完成할바를 보여주심이다. 이리하여 노아는 鴿 도라오지 않음으로 自身의 몸이 地上에서 生活할수 있는것과 한가지로 하나님도 三次 아담 再臨主로 因하여 地上에서 創造理想生活을 始作하여 直系的 世界를 造成할바를 表示되는바가 目的으로 되었다. 그런 目的이 根本인데 노아 아들 함으로 因하여 다시금 目的破壞를 始作하는 非原理存在를 誘引하니 하나님은 根本四十日 審判目的은 不成事로 되어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攝理하는 血系代에 사탄 侵入 不成事로 되어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攝理하는 血系代에 사탄 侵入의 踪蹟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四百年 延長을 보는바다.
그 根本 뜻은 四十日을 中心하고 사탄 對立의 成事를 始作하였으니 基本 四十數가 基因을 갖이게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四十日數를 基本復歸하여 다시금 成事할려고 하니 四十日 갖이고는 아니되고 四十年 가지고서도 안되겠으니 四百年으로 延長시켜서 四百年 後에야 根本的으로 第二 人間祖上의 成事할 信 基本成事인 노아의 信完成基臺를 아브라함 擇함으로 始作하였다. 이 信을 세우
심은 아담의 不信으로 因한바므로 다시금 基臺를 찾어세우여야 사탄 代할 수 있는 基本이니 信祖上 아브라함은 노아의 根本뜻 信繼承完成者로 擇한 바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信祖上되는 根本意義가 있는바다. 왜 아브라함을 擇하였나 하면은 노아 家庭으로 擇함에서 失手하였으니 아브라함 한 自體로서 始作코저함이 目的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信의 基本을 세울 수 있는대까지는 어떤 經路롤 밟았는가 하면은 아브라함이 凶年을 當하여서 아브라함은 애급으로 내려가난지라. 그 當時에 아브라함의 妻 사라는 아름다우매 念慮하여서 男妹로 된다는 約束과 同時에 애급에 감이었다. 이 사라는 아브라함의 妻로 妹의 立場에 서게 됨도 아담 해와 立場인 原理的 事實을 찾어 세우고저 함에서다. 그것은 애급은 사탄 代身國인데 그 國王 바로는 아브라함의 妻를 自己가 取하여 妻로 하고저 하였으나 하나님이 바로 對하여 아브라함에게로 찾어주니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所有物을 주어서 돌리심은 하나님으로 因한 緣故이었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이 뜻 成事하는 路中에 第一問題는 애급가서 妻를 所有한바와같이 하나님은 根本 한 해와가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빼앗으려 한바를 다시 찾는다는 한 表示를 보여 그 後 가나안에 돌아와서 始作한바와 같이 怨讐의 謀略中에서 하나님은 해와를 찾어서 復歸 땅에서부터 뜻 成事함의 基臺를 造成한바와 같이 하나님도 하신다는 根本뜻이 있음이었다.
그 後 아브라함이 애급서 가지고 온 所有를 基本으로 하여서 뜻 基本을 삼아서 하나님의 뜻이 成事할 基本을 잡았다. 이것은 萬物全部를 取하여 뜻 基臺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다음은 롯이 잡아간 원수를 對하여 勝利한 後에야 아브라함은 뜻 成事의 始作이 決定받게 되는바다. 이것은 擇한 者 全部를 復歸한다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은 사탄 所有의 貴한 者와 같은 데라의 子을 빼앗아 내였음으로 사탄은 아브라함이 뜻하는 하나님 對하여서 아브라함의 무엇이나가 不順된 무엇이 所有만되면 所有코져하여 아브라함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아브라함과 하나님과는 重大 約束 成立을 始作케 되니 사탄에게 있어서 큰 問題가 될 터를 始作함으로 이때 하나님 對하여 사탄은 對立하여 서게 되었다.
萬一 아브라함이 全的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祭物을 드렸으면은 아브라함부터 基本基臺를 잡아 四百年 歷史的 延長生活인 애급 生活은 없고 直接 하나님 責任分擔 使命으로 볼바이었다. 이 目的은 무슨 目的이냐하면 아브라함만 完全히 뜻 成事하면은 사탄 對한 根本
追放을 始作하여 四十日에 對한 그의 審判하였든 基本目的은 完成되어서 出發을 볼바이었다. 아브라함이 失手하고나니 四十日에 對한 뜻은 아직 完成的 基臺를 잡지 못하고 그의 延長的 四百年이 蕩減時代므로 始作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四百年이란 年代는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延長보아 사탄이 侵入본대니 이 四百年代 蕩減하여야만이 노아的 時代立場에 立脚함으로 아브라함에게 四百年 延長을 보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子孫에 남어지는 바는 四十數가 남어있는 樣으로 되니 四十數가 萬事를 解決하는 뜻 成事의 完成點으로 남어지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섰든 아브라함은 뜻의 未成事로 因하여 子孫이 四百年 苦役生活을 봄이 크나큰 禍根으로 되는 期間이다.
아브라함의 失手를 淸算하여서 사탄 侵入防止코저하니 祭物表示는 되었든 實體者로 因하여서 祭物代身찾아 세우고저하니 이삭을 모리아山의 祭物로서 獻祭를 命令하심이었다. 이뜻을 아브라함이 三日期間을 두고 獻祭함에 合意 봄으로 하나님이 攝理하는 路程에 사탄을 防止하였으나 사탄 亦是 이삭에 對하여 先有 所有物 될수 있는 祭物所有로 因하여 미련을 가지고 對하게 되니 이삭 子息中 二性品的 表示的 子息으로 分立하여서 하나님은 뜻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야곱이 母親과 合하여 에서의 基業을 빼앗아 넘기는 뜻이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腹中에서부터 서로 싸우므로 리브가는 하나님께 아뢰니 여호와 하나님이 言하여 曰 二國이 네 腹中에 있음이여 二民族이 爾腹中으로부터 分하리라. 此民族이 被民族보다 强함이며 大者가 小者를 섬기리라. 하시었다.(창25/23-24) 이것을 보아도 아브라함이 失手한 根本을 다시금 하나님은 뜻하시어서 分立케하는 야곱은 다음번임으로 하나님의 뜻 中에서 사탄이 뜻하였든 所有物 全部를 빼앗음을 表示하기에 이와같은 對立을 보게한 바이다. 이것이 卽 後日의 예수의 한 役事의 本되는 事實들로 되는것도 알줄안다. 이와같이 하는 바는 사탄이 아브라함 子息에게 미련 남기지 않게하기 爲한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뜻 成事를 볼려고 하든 것이 이삭으로 通하여서 비로서 成事하게되니 아브라함을 對하였든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으로서 야곱까지와서 첫아브라함 對한 하나님 뜻 成事를 보니 여기에 하나님은 三人을 相對하여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는 延長을 본바의 根本原理를 가지게 되는 바이다. 그러니 이 三人의 하나님으로 因한 名詞가 지금까지 좋은 名詞로 된듯하고 現 信仰者는 알고 있지만 크나큰 誤解로 아러야 한다.
그런 歷史的 하나님便的으로 原理를 中心하고 있다는 바를 確實히 아러야 한다. 이런 原理로 全部는 사탄 侵入防止키 爲한 目的인 同時에 根本 墮落始作의 復歸를 爲하여라는 바를 아러야 한다.
여기에 야곱부터 애급 出發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本 뜻 四百年 蕩減路程 出發이 始作함이다. 왜 이삭부터 안되었는가 하면은 이삭은 아담과 같이 二主人 相對存在였기에 이삭부터 애급 四百年 始作은 못한바는 論한바다. 야곱이 始作하였다는 바는 야곱은 根本 뜻 成事를 잡은 者니 야곱이 애급 出發하는 바의 根本原因이 있음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뜻 成事한 完成存在 못됨으로 애급을 向할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삭 子息에 에서라는 存在는 사탄 相對者라는 서러움이 始作된바이다. 어데 失手없었으면 아브라함 子息에는 에서라는 存在는 없이 根本 뜻 始作이 볼바이었다. 그러기에 이삭 自體로서도 四十을 中心하고 리브가를 取하여 妻를 擇함이었다.(창 23/20) 이리하여서 하나님의 뜻의 始作을 봄이었다. 야곱도 四十를 中心하고 에서의 에서의 基業을 빼앗는 基本役事를 始作할바가 原理로서 짐작하여야 한다. 창세기에 야곱이 四十數는 없으나 짐작키는 에서가 四十세에 햇 族屬의 딸을 妻로 取하여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하더라 하는 것 보면(창26/34) 야곱 年代도 四十세를 中心하고 攝理하여야할 바가 原理로 되어있다. 이런 四十年代를 中心하고 하나님의 뜻을 始作할수 있다는 基本을 잡으심은 基本노아 審判 四十日數 復歸할 基本 數로 因하여서 이와같이 始作한 歷史的 起源으로 因한바다. 야곱이 死後에 그 몸에 防腐劑를 四十日 바르심은 야곱의 몸은 하나님의 뜻 完成者이므로 이 한 存在는 死亡하여서도 四十日 期間과 같은 사탄 對한 四十日 審判을 받아 死亡한 者와 같은 死亡이 아니고 四十日을 完成한 成事者로서 하날 뜻 四十日 期間우에 處하여 死한 者라는 表示로 四十日 防腐劑를 바르게한 뜻이 있음이다. 이리하여 四十日되는 死亡期를 防止한 中心 存在가 된바라는 根本意義로서 四十日을 바르게 한바이다. 四十日은 卽 사탄 追放期間이면서 生命蘇生期間이다. 여기에 至今 야곱까지 延長보아서 애급 出發하게 되어 한 하나님의 基臺를 잡아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란 延長은 우리는 生覺하면 원통한 期間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 期間을 두고 하나님은 約束祭物에 失手한 全部를 淸算하여서 사탄 分立을 成事할 때까지는 어느
곳까지나 하면은 야곱의 食口가 밧담, 아람, 라반에게서 얻은 所有를 가지고 가나안 땅에 돌아온 後에 뜻 成事의 始作을 하는바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이삭부터 야곱이란 三代란것도 하나님이 뜻하는 約束祭物 中에 三祭物 表示로 된바는 蘇生부터 長成으로 長成부터 完成으로라도 眞理段階를 보여주는 바이었으니 아브라함이 뜻 合意에 成事하였으면은 三代 없었든바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失手로 因하여 三代後에 完成한바도 全하나님의 뜻을 이 三代 卽 段階로서 찾고저 하는 歷史的 眞理路程 全部로 表示함이 始作하였다. 그는 失手로 因하여 分立보아서 아브라함으롭터 이삭으로 이삭으로부터 야곱으로 하여 뜻 成事할려는 眞理路程에 對한 基本的 表示로 展開를 보게 되었다. 卽 아브라함은 아담 象徵으로이삭은 예수의 한 象徵으로 야곱은 完成象徵으로 됨이었다. 예수는 이삭과 같은 立場임에 人만 믿었으면 주검없이 야곱의 뜻 合할수 있는 것이 目的이었다. 이삭도 주검 免함은 뜻을 세우심으로 免한바와 같이 될바이었다. 그러나 그 뜻 잡지 못하니 未成事 할 수 있는 表示的 一代 復歸 歷史와 모세로 因하여 民族復歸路程 失手로 因하여 十字架까지 關聯을 가진바이다. 그런고로 뜻 完成者는 야곱이었다. 야곱이 뜻 成事하기 爲하여서는 第一 次 가나안을 떠나는 生活이 야곱 앞에 있었다. 卽 長子 基業을 取하고는 야곱은 基業成事할 者로 라반 집을 찾어가게 되었다. 여기에 야곱 앞에 展開된 全部가 後日에 예수가 할 使命的 表示로 되는 바는 한 뜻 基臺成事는 야곱이므로 야곱은 뜻 基臺完成이 있어야겠으니 야곱은 하란 生活의 始作을 보는 바이다. 여기서 가나안 福地까지는 全部가 이스라엘이 나아가야 할 表示的 路程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의 基臺가 되어야 하겠으니 一代에서 하나님의 뜻의 全部를 表示한 歷史로 展開할 意義로 보는 바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三大祭物은 아브라함을 蘇生으로하고 사탄 對하여 長成的 이삭의 始作을 보고 야곱의 始作으로 路程 完成이니 이 歷史的 三大祖上은 人類 對한 하나님의 歷史的 全部를 表示하는 바로 展開를 보여주심이다. 그것은 祭物의 全部는 全人類 對한 하나님의 攝理임으로 失手復歸는 全人類 對한 한 表徵的 事實로 展開를 보아야 되는 바이다. 그러기에 야곱이 一代 가나안 復歸까지의 全部는 가나안 떠난 이스라엘 百姓이 애급 四百年 生活과 相對되는 基本一代復歸歷史다. 이 야곱의 가나안 復歸路程은 이스라엘 全民族이 가나안 復歸路
程의 本되는 路程이다. 이라하야 야곱은 復歸路程에 야곱의 뜻을 成事케 하는 에서가 있었다는 바는 아담 子 가인과는 反對로 야곱 對함의 始作보니 基本 가인과 아벨적 根本뜻을 合意 본셈임으로 根本 아담 두 아들 가인 아벨이 뜻에 屬한 것과 같은 完成을 보니 뜻 成事를 보는 바이다. 야곱은 가나안 땅을 찾아들게 되는 바이었다. 그 때 에서가 야곱을 對하여 反對하여 원수 視 하였다면은 하나님의 뜻 成事에 큰 問題가 될바이었으나 에서가 야곱을 歡迎하며 에서도 後日에 하나님 對하여 順從의 한 間接的 基本을 찾아세우심이었다. 그런고로 에서의 後孫은 가나안 땅에서 怨讐 對立이 안되고 가나안 땅에서 基業地를 所有 繼續한 原因을 세우심의 基臺가 에서가 야곱 대하여 歡迎한 結果로 가저온 바이다. 그러니 야곱 가나안 復歸는 이스라엘 民族이 애급 生活로부터 가나안 福地로 오는 한 本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야곱이 하란 生活路程에서 對하는 라반이란 存在는 사탄의 對象存在로서 야곱의 全部를 貪하여 自己의 慾望充當을 세우려고 하는 者이었다. 라반은 하나님께 屬하지 않고 偶像崇拜者였다.(창 21/19) 이리하여 하란 生活에서 財物을 취하여 가지고 가나안 땅을 向할려고 할 때에 라반이 對하여 야곱이 取할수 있는 自由三日이 있었든 바라. 이 三日間을 中心하고 라반에게서 얻은 全所有를 分立케 하여 所有權으로 세우신바이다. 그리하여 라반은 三日 後에야 길느앗山에 對하였으나 하나님의 許하지 않음으로 自己 뜻을 成事 못하고 自己의 偶像을 가져간 것을 찾다가 라헬이 그 父에게 말하기를 自己는 偶像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駱駄鞍下에 두고는 지금 딸은 脛水가 摘出하야 이러나 歡迎치 못한다 하여서 偶像을 라반이 찾지 못함에 뜻을 보지 못하고 도리혀 야곱한테 攻擊을 본바이었다. 야곱에게는 레아, 라헬 二妻가 있었다. 그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對하고저 하는 뜻 中에는 하나님의 二女性이 있다함을 보여줌이었다. 야곱의 뜻 아닌 라아적 女性과 야곱의 뜻의 中心인 라헬的 女性이 있다는 表示로서 보여줌이었다. 여기에는 根本해와의 잃어버린 것을 찾어야 할 根本的 女性이 있다는 바라는 것의 表示였다. 그것은 라반의 뜻 이룬 레아의 存在와 한가지 表示였다. 이것은 먼츰 잃어버린 全人類 對한 墮落 始作 본 母 해와로 表示한 바이다.
라반이 레아를 주고는 七日 期間을 채운후에 라헬을 妻로 삼게 하시었다. 이 七日 期間(창세기 二十九章 二十八節 참조) 日數는 卽 노아가 鴿을 내보내듯 한 攝理完成的 日數로 되는 바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뜻 成事하고야 가나안 땅으로 歸還하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라헬 찾는바는 하나님이 後日에 잃버버린 해와를 찾어
根本 뜻 成事할 目的을 表示한바이었다. 그런고로 레아 子과 아헬 子 合하여 뜻 成事를 標準한다는 全世界 人間을 찾어야할 根本目的을 表示한바이었다. 또 여기에 라반이 行한바와 같이 하나님이 사탄 世界의 不信으로 因하면은 이와같이 야곱의 目的이 두 번만에 成事한 것과같이 예순느 이와같은 한 完成을 成事할바의 뜻을 表示한바이었다. 그리하여 야곱과 合하여서 父 하반을 對하여선 妻 라헬의 態度와 같이 하여야만이 後日에 하나님의 뜻이 完成 본다는 한 表示로 되었다. 라헬이 萬一 偶像을 父한테 보였으면은 야곱과 全部는 큰 未成事를 가저오는 問題로 되는 바이니 라헬의 한 勝利를 가저온 中心은 脛水로 因하여서 偶像을 없게 한가바와 같이 後日 하나님 뜻 路程에 이와같은 女子의 脛水로서 사탄 全部를 勝利하는 基臺가 始作한다하는 內容을 表示한바이다. 이것은 라헬의 態度와 같이 第二次 해와로 因하여 사탄을 屈服시켜 뜻 完成한다는 한 勝利的 表示이었다.
이 야곱의 一代의 展開가 예수의 路程으로 始作된다는 것도 한 表示로 된바이다. 이 야곱의 全目的 成事는 애급 路程上에 다시금 始作의 本으로 나타나서 하나님도 사탄 對하게 하는 根本이 있는 바이다. 그러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全하나님의 表示的 存在들로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아담 失手한 것을 이삭으로 復歸와 같은 예수 祭物表示로 不信하니 十字架로 始作하고 야곱과 같은 再臨主格 成事로 完成되는 한 表示로 된 者들이기에 하나님 對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對像者의 뜻의 攝理를 표시한 存在들이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延長된 後日의 全部를 表示한 基本들이니 信이 基本되는바가 成立되니 信의 祖上이라는 基本意義가 있는 바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뜻 路程은 舊約歷史에 全部 表示하여 맞추고저 함이 根本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은 야곱 成事부터 할바가 모세부터 始作한바다. 모세는 야곱의 根本目的 完成하여야 할 表示的 路程으로서 後日 예수의 第二 責任路程을 表示로 하면서 하나님의 直接 責任 基臺 잡는 路程의 始作을 보는 바다. 그러므로 모세 亦是 야곱 繼承的 成事로서 出發하심이 출애급 路程이다.
모세= 아브라함 + 子孫 = 祭物찾음 = 하나님 取하여 役事
그리하여 예수의 本되는 路程을 하나님과 合하여 成事하여 놓았다. 그런고로 야곱 나간 것이 모세의 完成의 本으로 모세는 出發하게 되었다. 이 本될수 있는 路程이 完成을 始作하였기에 信의 祖上들로 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예수 앞에도 이와같은 完成目的가고 나아가여야할 表示의
路程으로 모세도 出發을 보는바이다.
이와같이 攝理하는 바의 根本意義는 사탄 對한 四十日 完全 復歸 問題로 基因하는 바이다. 이 모든 어려운 役事始作의 延長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였기에다. 그런고로 모세도 애급 바로 宮中에서 자라게 하는 것도 擇한 百姓을 第二次로 노아 以後에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사탄한테 주었다가 다시금 사탄 對하여 反對路程을 세우려니 모세 亦是 四十年時를 바로 宮中에 있다가 四十才가 되매 하나님의 百姓으로 出發케 함도 이 根本 四十數가 始作의 如何가 根本 뜻 成事目的였었기에 모세 亦是 四十才에 애급 對하여 反對하는 바이다. 모세가 四十才를 바로 宮中에서 全部를 잘 보낸 後에(사도행전 七章 二十三節 참조) 하나님은 擇하여 또 四十年間을 두었다가 役事하게 되는 바이다. 모세가 바로 對한 出發時는 八十才이었다.(출애급기 七章 七節 참조) 이와같이 四十數를 두고 役事한 것은 四十日數를 잃어버린것과 같이 되었든 것을 찾어서 蕩減을 定할려니 四十才에 擇하는 攝理를 始作케하여서 八十才에 成事로서 모세를 세워서 役事시킨바이다.
이리하여 再出發하는 모세는 勝利路程을 잡고 나아간바는 四十日 復歸의 目的完成이니 四十年後 四十年 하날뜻 準備期間으로 對케 한바이다. 그러니 이 모세 四十年 애급의 바로한테 준바는 全이스라엘 百姓을 바로가 支配하니 基本 四十日을 잃어버린 것으로 因하여 四百年이란 年數로 보았으니 모세는 이 四十日을 사탄으로부터 하날 四十으로 찾아 세우여야겠으니 애급 四十을 주었다가 하날 四十으로 蕩減하여 하날의 基本 四十日數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잡고 나서는 樣이니 애급 出發이라는 始作을 보는 바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百姓은 四十日을 全體的 完成을 하여야 하는 바는 이스라엘 全部가 四十日 完成 하여야만이 노아 審判 根本 目的達成한 하날 百姓으로 보는 바겠으니 卽 根本 하나님이 創造本意인 말삼을 復歸하겠으니 모세는 이스라엘 民族을 中心하여 놓고 根本 뜻 成事의 基本言 成事의 約束을 받게 되는 바이다. 卽 四十日 晝夜로 通하여 禁食하여서라도 成事할 目的으로되니 모세는 四十日을 完成할려니 禁食하여 四十日 審判 根本目的 復歸가 目的이니 四十日로 因하여 言에 對한 二石板 받음이다. 이것은 무엇이나 四十日의 完成이 다시금 成事한 基盤되는 아담 해와의 成事를 完成한 本이라는 것이 始作을 보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全百姓은 言과 하나되어야만이 뜻 完成이라는 곳으로 나아갈 바가 根本인데 나아가지 못하게 되매 四十日에 對한 第二次 完成도 다시금 未完成을 본바와 같이 되니 이스라엘 百姓에는 다시금 苦痛수 四十數로 남아지게 되었다.
四十數 未完成은 再創造 復歸 未完成數인데 이스라엘 百姓이 가나안땅을 앞에 놓고 偵探軍이가서 偵探한날 四十日이 最後의 이스라엘 百姓이 全 뜻 成事냐 未成事냐 하는 間隔을 둔 對峠日數가 四十日이었다. 이 四十日을 두고 한 全部를 믿고 나아가면은 根本 四十日은 勝利의 基臺 될 날이 있는데 이 偵探期 四十日을 잘 믿고 넘지못함과 같은 結果로 나타나니 曠野 四十年의 苦難의
始作을 본바이었다. (민수기 十四章 三十節에서 三十四節) 이리하여 四十日 基本은 完成 못하고 四十日 完成으로 바라보는 全百姓 代表者는 다시금 사탄 所有物이 되어 曠野에서 四十年間에 死亡하는바가 始作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뜻 路程에서 四十日의 勝利的 目的을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 百姓이 찾어 세우여야 하는 重大期間으로서 남어지게 되었다.
四十日 세우는 날이면 사탄 追放의 날이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四十日이라는 날짜는 이스라엘 百姓앞에 찾아세우여야 하는 날이다. 이것을 蕩減과 동시에 完成할것이 攝理路程의 한뜻으로 되었다. 모세 四十日 目的 未完成하여서 사탄은 如前하게 侵入하여 全目的 파괴로 나아가니 하나님은 다시금 엘리야를 세우심이었다.
엘리야는 사탄 全滅시키기 爲한 代表的 存在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알神 八白餘를 滅하고는 四十晝夜로 호렙山까지 가는 것도 무엇이냐하면 모세 四十日에 對한 勝利點을 完決짓는 한 表示로서 엘리야 호랩산까지 四十日 期間이 있음이었다. 이리하여 엘리야로부터 노아 審判 四十日을 完成하는 同時에 하나님의 基本出發할수 있는 터를 造成하기 위한 總決戰者가 엘리야였다. 그것도 百姓이 不信, 不順, 不侍로 因하여서 사탄을 侵入延長을 보아서 메시야 前까지 當到하겠으니 하나님은 四十數 十眞培數 年數로써 四百年 期間인 四十數 延長으로 因한 메시야 時까지 侵入하여 役事하겠으니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여서 目的成事를 豫告함이었다. 이 엘리야라는 存在는 세례요한으로 始作하여 사탄 全滅目的 完成하여야 할 엘리야的 目的達成 못한 셈이로이니 예수 앞에까지 四十日에 對한 歷史的 蕩減課業이 延長을 본바이다. 그런고로 이것을 蕩減하기 爲한 總決算期가 예수 四十日 禁食期間인 曠野生活이다. 이리하여 勝利함으로 審判目的은 完成할 基臺는 잘있으나 사람이 合하여야만이(누가복음 4/13 참조) 成事란 結果로 因하니 四十日에 對한 未成事를 본바와 한가지로 되었다. 그리하여 十字架로 因하여 사탄 對한 勝利를 目的케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敗한 듯 하나 四十日間을 찾을 수 있다는 目的을 完成할 수 있다는 바는 十字架後로 因하여 예수 앞에 復歸되면서 基本完成의 터를 始作하여서 出發의 榮光을 본바다. 이 成立을 보아서 하나님의 基本 四十日 노아 根本 사탄 追放目的을 成立하여 놓은바가 根本目的으로 하나님의 攝理路程에 四十日 期間이 問題로 되어왔든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歷史的 모든 完成者로 뜻 出發 中心存在로 되는 바이다.(51. 10. 26 記)
第 五 編 理想攝理
第一 章 創造性 復歸로 된 理想論
本來 하나님이 天地創造할때에 어느 存在物이라든지 全部는 相對할수 있는 存在를 對케 하여 지으심이었다. 被造物중에 相對할수 없는 格없이 지은 것은 없다. 直接으로 對한은 相對格이라든가 間接的이라는 相對라든가 全部 어떠한 相對位置를 잡고 있는 同時에 그 相對들로 因하여 自我의 한 完全造成을 補充하는 作用인 聯關性으로 天宙의 存在物들은 서로 相對를 要케 되었다. 그 相對를 잡으면 그로 因하여 自我를 中心하고 全要求의 한 目的成事를 始作하여서 自我아닌 他自我格으로 對象 存在格으로 造成하고저 그 目的의 作用을 始作케 된다. 그런고로 相對가 나타나면 그 相對는 나의 한 對象될수 있는 한 資格을 追窮하게 된다. 相對는 始作이고 對象은 自我를 中心하고 한 目的過程을 經過한 成事格이 卽 對象이다.
어떤 存在든가 全部는 自我의 幸福을 標準하고 對象格을 要케 된다. 相對없는 者는 存在의 價値기 없게 된다. 相對로부터 對象을 完成하면 할사록 그 價値와 幸福世界를 展開하는바다. 그런고로 天宙萬相은 全部가 對象格 體系內에서 完全對象의 한 始作을 보아야만이 理想이란 世界를 보는바가 事實이다.
어느 社會나 國家라든가 그 目的達成할 수 있는 對象境을 떠나서는 發達도 없고 理想도 없는 바이다. 그런고로 存在하는 그 自體는 理想境의 한 影体的 한 本理想体에서 보는 位置를 要하는 바는 必然的要求이다. 그런고로 我와 理想과는 하나면서 한 動作形線을 떠날 수 없는 同格 應할수 있는 한 要求的 立場에 處하는 바는 事實이다. 그 要求를 充當하여야 하는 우리의 使命이 每日 生의 한 課業이다.
이런 課業을 하게하며 達成케 할려니 나로 하여금 그 理想에 對하는 向心인 刺戟과 衝動心이라는 維持가 第一重要問題이다. 이 마음 없다면 理想과 나와는 벌써 成事할수 있는 길을 앓어버린바와 한가지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한 對象格位에 있어 그 理想을 成事할려는 衝動心이 作用을 갖게하는 것이 있어서만이 그 理想과 我와는 應線上格으로 되는 바는 事實이다.
그러니 우리 人間에는 언제나 向上을 標準하고 理想을 마음으로 自己도 아지 못하게 더 要求되는 存在格에 있다는 바를 否認못한다. 그런 그 作用心要素의 始作과 刺戟과 衝動의 始作을 至今나와 關係上에 있어 한 附合應線을 取하여지는 한 不可避한 立場을 體得하게 될 때 나는 벌써 더 높을 수 있는 한 要求에 應하는 第二 存在格에 處함은 事實이다. 그러니 要求에 應할수 있는 길을 잡고 나아간다면 그는 벌써 幸福과 함께한
理想의 興味를 體得할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여기에는 벌써 人間은 創造的 原理로 完全을 標準하고 지었든 그 原理的 힘이 나와 聯하여 있기에 이 힘의 要求에 對象價値追窮이 人間이 理想을 生覺케하는 原因인바다. 이런 關聯된 自我라는 存在를 示定하는 곳에는 한 對象格 完成을 要케하는 位置와 立場을 떠나서는 그 根本原理와 配置로 된다. 그런 造化로 지음받은 人間이니 이 對象理想을 充當할 目的과 配置되는 立場에 處하면 自然的 原理 性品되는 良心的 追窮은 必然的으로 나에게 强하게 作用한다. 그것은 原理脫線이니 이를 保障하기 爲할려는 作用이 良心作用이다.
그런고로 우리 人生은 벌써 나아닌 한 本體를 中心하고 한 對象格 達成이 남어진 한 課業으로 아러야 한다. 이 對象格 完成이 卽 理想의 길인 同時에 幸福이 基本인바다. 나는 하날 對하여서 한 對象格存在로 基本하고 創造받았다. 그런고로 하날 對한 完全對象格 價値者로서 되었기에 하날의 要求하는 原理的 要求이다. 이 要求는 根本 힘의 作用과 共通하니 어느곳이나 通할수 있는 原理要素로 被造物世界는 共히 通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나 한 完全格 對象目的을 共通히 갖고 있는 바는 事實이다. 이 對象格을 하날 對하여 나 自體가 完全하는 同時에 現實界에 있어서는 相對格을 取하여서 그 目的을 한 回路的 路線格인한 딴 對象体를 成立하여야만이 本 하날의 對象價値와 合할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我는 하날 對하여 對象完成하는 同時에 相對性의 한 對象을 完全成事하여야 만이 根本과 合하는 三位一體格 한 回路를 造成코저함이 創造原性인바다.
그러니 良心的으로는 몸이 指向을 받고 다음에는 이와함께 우리는 相對性을 取하여 完全하나되는 對象格性 存在를 合體하여야만이 基本原理上線이 비로서 설수 있는 바이다. 그러한 곳에는 根本 하나님은 居할수 있는 創造原理的 基臺이다. 이런고로 이 基臺造成하는 것이 人間의 最高理想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人間은 흔히 말하는 理想의 곳은 어디나 하면은 良心理想要求本體와 合하는 곳이다. 卽 이 点은 모든 完成된 原理上点이니 幸福이나 喜樂이나가 全部가 始作하는 根據地다. 그런고로 基本理想은 卽 하나님과 同居하여 한 原理上에서 萬事를 바라볼 그때가 人間에게는 最高기쁨이다. 이곳에 處하면 지금까지 찾어올라온 한 絶頂上에서 處하여 昔日의 下部分 向하여 볼수 있는 그곳을 알게 될 때 모든 새 始作이 生活境地로 한 付與를 始作하니 卽 理想世界다. 그야말로 幸福世界다. 問題는 이 根本始作을 하여야 할 使命的 存在에 處하니 良心은 나를 因하여 完成에로 再促하는바다. 이것이 良心과 肉身이 相衝形體를 取케하는 原因
인바다. 我 하나를 中心하고 보아도 幸福할려면 먼츰 마음과 몸이 하나되는 그 基点을 離脫하면 벌써 不滿이 始作한다. 이 角度가 甚할수록 苦痛이 甚하다. 이 角度 合하여서 한 目的基点上에 뜻 成事를 볼적에는 幸福이란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本來人間은 내가 마음과 몸이 完全 하나되어 良心要求를 肉體가 完全히 채워줄수있다면은 그곳은 벌써 原理成事이니 그곳은 卽 하나님이 지으신 根本形이니 이곳에는 하나님이 계실수 있는 時間이다. 이 時間이 長期間 維持할수 있는 生活形體가 理想生活이다. 그런 生活體를 取한곳이 卽 線한 곳이다. 線한 곳에는 하나님이 같이하면서 根本幸福要素와 合할수 있는 始作이다. 이곳을 人生은 잃어버렸든바다. 이곳을 다시금 찾어서 채우여야할 存在이니 어찌 良心的으로 그 目的達成을 追窮받지 않으랴.
그러면 하날의 要求成事가 始作하니 나도 또 하날이 줄바를 받을 수 있는바니 이곳이 卽 하날 對한 對像格 完成位置이니 그야말로 原理的인 곳이니 幸福이다. 사람은 本來 이와같은 理想原理上点에서부터 始作함이 根本目的으로 되었든바다. 그것이 墮落으로 因하여 이 基本原理点上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와같이 한 根本体에 對하여 한 對像格 存在의 本路線인 根本原理를 復歸하여야 할 重要한 責任이 누구로 因하여 生起었나 하면은 그는 두말할 것 없이 非原理存在인 한 惡의 主人公 사탄으로 因한바다. 이 사탄 對하여 지금 우리는 아지 못하고 그저 自身自體의 不足과 未洽함에 嘆息을 하게되는 바도 사탄으로 因하여 너머 蹂躪받은 自體가 되어 感覺하지 못하는바다. 이와같이 根本對像的 位置를 잃어버린 人間이지만 그 根本良心은 우리로 하여금 根本 位置에 對한 要求를 始作하여 주기를 要하는 바다.
어떤 사람이나 全部가 自己가 第一이라는 한 個性要求를 세우고저 한다. 그것은 누가 갖지 못한 個性眞理体인고로 그 要性性品을 어느곳에서라도 한 相對되는 位置를 잡아 完全한 對像格 成事를 要케하고저 하는 第一原理本體와 合할려하는 第一基点을 잡고저 함에서 始作한다. 이와같이 根本 한 個性을 中心하고 한 相對始作의 完成인 對像格 存在性으로 完成만 하면은 그 基臺上에는 한 對像格 完成으로 原理路線上을 成事하는 原理的目的을 造成하니 그곳은 벌써 根本 創造原理로 나타난 바이니 線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通性을 取할수 있는 幸福의 한 基点位置인바다. 그런고로 人生世界에는 누구나 自己中心 第一主義로 나아가는 바는 自己로 因하여서 根本基点上 原理位置를 取하는데는 第一가까운 距離를 自己가 누구보다더 가까운 바이므로 他中心하고 成事보담 自己中心하고 個性理想을 成事코저 하여서 自己 第一主義로 取케 하는바는 事實이다. 이것이 蘇生 長成 完成하여 한 目
的達成하면은 그 다음은 第二次的 對像位置를 널리하여 全體 基本目的으로 延長되는 바다. 그런고로 第一 自己부터 始作하여 全體에로 完成理想을 協助하게끔 本來 人間은 되어있다. 그런고로 사람이 本來 이러한 基本原理上에서 지었기에 墮落은 되었을 망정 自我中心을 주로 하는 바는 사실이다. 純粹한 良心的으로 善으로 나아가는 곳이라면 누구나가 그 한 自體들 合하여 나아가면 언제든지 그 基本点上 善을 合하게 되는 바이다. 이러니 우리가 相對를 要케될 때 相對된다든가 相對안된다든가 하는 곳은 벌써 善한 理想이 始作인가 아닌가의 決定的 解決의 表示로서 보여주는 事實을 證據하는 바다. 相對된다 하면은 벌써 對像格位置인 한곳을 所望케 하여 주는 바는 事實이다.
그러면 善과 理想成事니 我에게 큰 기쁨의 始作이니 自己를 中心하고 이런 決斷을 짖게 하는 바다. 이런고로 사람은 自己를 닮아라 하는 相對格 存在를 占有할수 있어야 한다. 그러야만이 對像成事를 잡을 수 있다. 全人間은 善한 者를 對像하고저 하는 바는 自己의 한 目的達成을 速進시키려고 하는 바는 原理로 된 바다. 사람이 根本的으로 自己를 세워서 大衆의 한 中心되고자 하는 그 本心 마음은 我自身이 根本的으로 善하다는 한 根本体다하는 宣言의 表示인바다.
그런고로 이런 것보아도 나 닮아라하는 要求를 세우고저 하는바는 나는 本來 한 善한 標準上 存在라는 것을 宣布하는 것은 事實이다. 나와 合하면은 善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보아도 벌써 自己는 第一存在善境의 한 表示的 力活을 주어서 相對를 잡아 對像을 세워서 그 善을 直接 自己와 連結 짓고저 하는 第二存在 善을 目標하는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自我란 存在는 第二存在며 그 目的은 第一存在의 한 對像格의 存在로 되어야 된다는 바도 原理的으로 感觸받는 바는 事實이다. 이 事實만을 알게 된다면은 하나님에 對한 問題도 問題 外로 되게 된다.
第一存在 善 + 第二 存在善 = 하나님 + 我 = 하나님 + 對像 = 하나님 +自己(我+對像)라는 表示로 規定도힌다. 第一 먼츰 問題는 自己다 내가 먼츰 第一存在의 完全 對像者 成事할 것, 卽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善하여지는 基本点上 自己를 造成할 것이다. 다음은 이런 自己를 中心하고 第二自我格 對像格者 完成할 것이다. 이것이 始作하면 創造性이 完成된다. 卽 이곳은 男子면 女子가 要求된다. 相對로부터 對像追窮을 要케 된다. 다음은 이것이 基本的 創造性 第二 對像存在다. 하나님과 사람은 한몸이니깐 이런 基本原理로 되어 있다. 그런고로 獨身生活이란 바는 非原理가 存在하는 惡에 屬한 世界니 그런 것은 있을 수 있으나 理想時代가 되면
基本原理背馳行動이란 結論이 나온다. 다음은 大衆 對하여서도 한 相對로부터 그 어떤 目的完成할수 있는 이와같이 나의 한 相對로서 對像格的 態度로 對하여서 그 事業 目的인바다. 이러한 目的으로 한 相對로 하나님은 人生 對하여 對像 繁殖을 要求하고 第一存在의 善을 事業體와 自己 對하는 어데나 善한 것으로 하날과 合할수 있는 길을 造成하는 것이다. 이러여야만이 全天宙도 根本부터 사람과 하나되면 사람은 萬物世界上까지 하나되게 하믄 目的達成하여야만이 하나님이 善히 계시는 발등상이 되는 바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根本 善理想展開를 第一은 사람이 重要한 位置에서 上으로는 하날 下으로는 萬物 右로는 家庭 左로는 社會 또 크게 보면 丹和世界에로서 根本創造理想造成이 目的인바다. 그런고로 我를 中心하고 自我 善으로부터 家庭善으로 事業善으로 이것이 第一責任完成함의 하나님의 創造한 對像善 目的인바다. 이와같이 全人類에게 要求하는 하날 第一世界의 要求이다. 즉 하나님의 要求目的이다. 世界 떠난 하나님은 世界上에 쓸대 없는 바다.
하나님= 全天宙= ①되는 世界가 善世界이다. 善은 하나님이시다. 善에는 性分別始作으로부터 個性完成으로 相對個性完成이 合하여서 한 回路의 造成으로 要求하는 根本存在다. 善은 對像位置確保가 要求條件이다. 이와같이 天宙는 相對性으로 對像으로 單位하고 全天宙까지 善을 造成하고저 함이 사람 創造면서 天宙創造이다. 사람은 天宙中心이다. 사람 中心하고 第一存在 하나님 사람 中心하고 第三存在 萬物이다. 하나님은 사람 通하여 善 繁殖始作하며 그 善을 사람은 個性善으로 萬物善까지 造成하여 善의 主管路線을 세우는 바다. 그러니 사람없는 하날 없고 사람없는 萬物없다. 사람이 天宙中心이니 사람 墮落하니 하날 嘆息이 生起고 사람 墮落하니 萬物嘆息生起였다.(롬8/18 참조) 이것 復歸事業의 目的이 하나님의 攝理이다. 至今 以上과 같은 原理를 보아서 우리 사람은 相對 될수 있는 第一資格成事가 무엇 보담도 貴한바다. 내가 하날 對하여 第二存在로써 第一 存在의 한 對像의 要求가 全目的됨은 事實이다. 그러니 相對할수 있는 位置를 取하여야 하겠다.
이런 立場을 取하는 것은 사람은 第一存在의 利用物인가 生覺하여서는 안된다. 이 相對의 要求는 第一存在目的 達成하기 爲함은 勿論이나 나로서는 完成하는 基
本 完成이란 目的으로 되어 結局은 나 때문이라는 바는 事實이다. 하날의 要求하는 바의 目的은 주기 爲한 目的이고 나는 받기 爲한 目的이 卽 내가 하날 對한 相對始作으로 對像完成을 爲한 바다. 그런고로 하날은 주고저 하나 줄수 있는 相對없으니 그 얼마나 서러우랴 서러움이 生起는 것은 주고받고 할 存在가 없게 되는 것에서 始作이다. 이런고로 참주고 받고 하는 者의 要求로서 對像이 要求되는 바이다. 내가 줄적에 第二 나에게 준다면 거기에 벌써 기쁨이다. 그런고로 子女 對한 사람은 여기서부터고 男便 對한 사람도 여기서부터고 社會(事業體) 사람은 여기서부터고 하날 對한 사람도 여기서부터다.
이와같이 貴한 根本上 自我가 되면 참 받을수 있는 者이다. 上으로는 참주는 者를 갖고 下으로는 참 줄者를 갖었다. 이얼마나 幸福이라 아니하겠는가. 참주고 받을 곳을 所有한 者는 언제나 기쁨의 動力이 躍動하는 바다. 그 表示가 子女 對하여 주고싶고 夫婦는 서로 사랑하고 받고 하는 根本原理인 表示다. 이 모두가 完成은 하날과 合하여야 되는 바다. 하날은 發電所고 우리는 配電所와 充電所와 같고 만물은 需給所와 같은 것이다. 發電所 있는 配電所 需給地는 原理이나 이 中間 우리되는 配電所, 變電所 없으면 모두가 生命使命이 中斷인바다. 이와같이 주고받은 變電所 配電所의 位置가 卽 우리 人生이며 나이다. 이런 原因으로 받고 주는데 原理消耗없는 것을 바란다. 電氣로 말하면 損失없는 것을 要하는바와 한가지다. 損失이 많으면은 基本 電氣가 消耗된다. 損失은 그 導線物質로 因하여 右左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物質의 力되는 電氣를 잡아먹는 作用이 生起게 하는 敵 作用의 始作은 電氣要素를 反하는 作用을 갖고 있는 存在니 그런 損失을 갖어오는 것과 同一하게 우리는 電線과 같은 肉身을 갖고 있는 그 自體와 良心과 合하여서 完全하나되면은 良導體作用하는 것과 한가지고 그렇지못하면 不良導體와 같은 副作用 損失을 生起게 하게 하는 것과 한가지다. 그런고로 우리는 完全히 주고 받는 對像을 連續的으로 어떤 方面으로 한다면은 그는 다시금 主人에게 돌리는데도 損失없는 原理復歸가 成立하는바와 한가지다. 이와같이 完全히 받고 完全히 주워 돌리수 있다는 것이 第一要求目的인 同時에 善繼續이다.
電氣가 잘되게 하는 것이 電線類에 있는것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잘 成事케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바이다. 그러나 잘받으려니 잘 接觸하여 完全導體가 되어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한 生命의 中心地이며 喜樂의 中心地이다. 生命中心과 喜樂中心은 하나님이시다. 하날 喜樂도 幸福도 모두가 하날사랑 받을 때에 始作이니 第一 要求가 하날사랑 받는 것이 目的이다. 하날 사랑 받으면은 幸福도 喜樂도 始作이다. 完全하날 사랑
받으려면 완전히 받을 수 있는 資格의 成立이 要求되는데 사랑받으려면 받을 수 있는 美가 있어야만 완전 사랑을 줄수 있는 바다. 하날은 주고저 하니 愛이요 사람은 받으려니 美이다. 이와같은 相對要求成事條件이 始作은 愛였다면 美가 있어야 한다. 愛를 +라고 한다면 美는 -라는 相對存在다. 이것이 完全히 주고받는 것이 善이다.
善=愛+美+(義)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지금까지 찾고저 하는바는 美의 한 存在이다. 예수는 사람 中心인 同時에 하날 사람 代身者이다. 예수 보내심은 完全 하날 사람을 人間들한테 줄수 있는 基礎工作을 始作키 爲하여서다.
예수 愛+ 我 = 善되어야 한다.
그런고로 하날 對한 對像格完成 我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我는 하날 사랑 對하여 받을 수 있는 美가 要求條件이다. 完全 사랑 對하여서 完全 美를 相對하여 始作을 보아 完全히 주고받는 一로 되는 對像存在가 손이다. 義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相對를 決定하여 對像始作을 보아서 이루어 나가는 한 路程敵 要素가 義라한다. 예수도 義人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하심은 自己自身이 義를 세울 수 있는 한 相對者 始作을 보지 못함을 表示한바다. 그런고로 지금 天宙는 善을 完成할려니 사랑과 美가 生起여 義의 한 路程을 지어야만이 하나님이 理想始作이다. 우리가 하날 對하여서 美로워야 하겠다. 그러니 먼츰 原理로 돌라서는 것이 基本目的이다.
그런고로 良心理想存在 位置位까지 必要하다. 그러니 良心的이어야 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한다. 我는 하날 對하여 美여야 한다. 그러면 自然的으로 사랑을 始作한다. 電氣의 한 原理와 같은 것이다. 完全 (-)가 되면은 자연적으로 (+)는 生起는 것과 한가지다. 原理的으로 美가 完全히 造成되면은 하날 사랑은 나와 하나되는 作用이 始作한다. 이 作用이 始作하여 繼續하는 것이 한 義이다. 이 作用이 繼續하여 完全 合하는 것이 善이다. 作用繼續하는데는 副作用을 이겨야 한다. 이것이 義의 使命位置이다. 義는 善한 路程을 結實하게 하는 要素이다. 例로 表示하면은 善할려고 하기 爲하여 사랑으로 美로 義로가 經過 合하여 一 되는 바다. 하날 對한 사랑 받으려니 아름다워야하는데는 여기에 良心 對하여서 몸을 그 良心에 中心하게 한 維持繼續하게 하는 것이 卽 義다. 그러니 하날은 第一存在 良心을 第二存在 몸을 第三 存在으로 하면은 義는 第一存在 사랑에 對하여 第二存在 良心과 合하게 하는 第三存在몸이 있는 바이니 이 몸을 良心要求되로
繼續維持하여 完全 美를 갖게 되어 完全 사랑을 받아 合하게 하는 其 第三 存在를 第一 存在까지 合하게 하는 要求가 義다. 이와같이 하날 사랑 받으려면 良心만으로 아니되고 몸이 合하여야만이 始作되는 바다. 이렇게 우리 사람에게는 三位要素 位를 세워서 一로 되는 原理 創造性이 있다. 義라는 것은 第三 存在 位置를 第一存在位를 屬하게 하는 基本工作의 實果이라는 바는 事實이다.
義는 몸에서 良心 合하게 하는 要素가 義다. 나를 中心하면은 한 對像을 對하여서 義하면 其 對像이 나와 같이 설수 있는 位置를 造成하여야 義다. 事業을 對하여서 亦是 나를 第二存在 位置 두면 第三 位置는 事業이니 이 第三 存在位置가 나와 하나의 位置繼續 取케하는 바가 義다. 義없는 곳에는 하날의 美를 造成 못한다. 그러니 하날이 나를 對하여서는 對像本體니 사랑이고 나는 美敵이고 나를 中心하고 對像格者에 對하여서는 내가 사랑이고 對像位置가 美이다. 義는 對像美를 造成하게 하는 平衡要素다. 그러니 義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維持하는 生活이 要求되는 重要生活이다. 義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第三存在가 完成造成이 되어야 되는 한 分立性 對像 造成目的으로 因하여 必要한 바다.
人間社會에서 義가 第一 나와 直接的 關係의 位置에 있는 바다. 나도 먼츰 마음 中心하고는 몸 自身 中心하고는 對像으로 對像中心하고는 萬物世界로 이와같이 關係的 因緣을 中媒하여 주는 그 自身은 義라는 存在다. 義는 完全美를 造成하는 한 基本에 向하여 移動하는 長成要素이다. 그런고로 完全 사랑과 完全美가 造成되면은 完全義는 造成되는 바면서 善은 完成된다. 例를 들면은 10 사랑을 줄려고 할적에 10 美를 보고 주어야 한다. 10 사랑 받고 10 美를 돌리는 完全 一되는 한 回路를 造成하여야만이 善인 것이다. 義는 完全 사랑에 對하여 完全美를 維持하게 하는 過程이 義의 分擔過程이다. 그런고로 美의 位置는 加減的 움직임이 있는 바이다. 義와 不義와는 한 境界線上에 서 있다. 그런고로 對像格 右左如何로 사랑과 合하여 善成事右左하는 重要位置가 美的 位置이다.
그러니 義는 한 基本善中心体 모양과 같은 것으로 나에게서는 作用한다. 줄래도 對比되는 美를 보지 못하고 주는 하날 存在는 不義인 行動으로 된다. 그런고로 하날 사랑 받는 者라면은 주는 것도 하날化하는 基臺線上에 서서 만이 된다. 그런고로 우리 人生앞에 舊約時代는 行義로 新約時代는 信義로 成約時代는 侍義로서 한 人類生心中心으로 되었다.
例圖를 보면 사랑 線과 美線과는 對像되어 한 回路를 造成한다. 義는 한 中心 B 点이 되어 A, C를 連結한다. 이와같이 한 線上에서 설때에 善이
A ㄱ 愛
B ㄴ 義
C ㄷ ㄹ 美
成立된다. 한 目的 對像 取하면은 義를 中心하여야 始作된다. 한가지 目的을 이루면은 其目的 終結을 짓는다. 卽 圖面 A, B, C 線을 중심한 한 回路는 造成되어 善成事한다. 다음은 딴 目的物 對할때도 전번 義를 基臺로 하여 美를 찾게 된다. 그런고로 전번 義와는 繼續하여야만이 따른 뜻 成事美로 이룰수 있는 連結線을 造成한다. 圖示 ㄱ, ㄴ, ㄷ 線 善 回路完成하고는 ㄱ, ㄴ, ㄷ 線으로 他에로 始作하여 언제나 永遠 標準 善 完成 目的을 要求하는 回路를 永遠繼續하고저 하는바가 人生 生涯의 目的이다. 이와같이 하날 對하여 美로 始作成事가 始作되어야 다른 相對를 取하여 사랑격으로 對할 수 있는 바이다. 그것은 하날 사랑과 合하는 美를 찾었든 資格者니 善 所有者라는 立場을 復歸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對像格者를 나로 因하여 세우면 理想始作이다. 그곳에서 하날 사람 代身 사랑으로 夫婦 사랑 子女사랑을 取할 수 있는 資格者다. 그리여야만이 하날 기뻐하고 나 기뻐하고 對像者 기뻐하는 第一 第二 第三 存在 全部가 기뻐할 수 있는 한 目的 回路線上을 完成하게 될 때에 善한 家庭이라 하는바다.
善한 我 中心한 善한 家庭으로부터 善한 社會始作이니 여기에는 義의 事業이 要求케된다. 그런고로 我中心하고 그 事業을 한 美로서 보면서 한 對像格的 善을 造成하여야 하는 한몸 代身的 마음으로 對하여 한 美의 對像格 事業 始作이 造成하여야 만이 義의 事業이다. 그런고로 한 代身 나의 事業의 結果를 가져온다. 그 事業은 그 사람이 代身이니 한 連結된 義를 中心한 한 目的上에서 있기에 義와 善을 標準하고는 하나라고 表示하여지는 것이므로 事業은 그 本人代身이라는 바다. 그려면은 온 天宙는 한몸과 같은 構造로써 되어 있다. 物質世界로 한 하날의 表示体이니 하나님의 한 솜털과 같은 것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事業을 通하여 生活을 始作하여 사랑 成事目的과 理想合하븐 그 理想을 세우는 것이 우리 生活上 中心이다.
그러니 義의 事業이 美를 造成하는 것이며 善을 造成하는 中心도 된다. 내가 中心도 되고 事業이 中心도 되고 하날이 中心도 된다. 이것은 한 回路잡고 되어있기에 始作하면 善이나 義로만이 始作하니 그 線上에서 어데나 同姓要素를 感覺하니 그 中心도 各位置한데로 表示도 된다.
① ② ③ 이와같이 自由基臺線上을 어데를 脫線하여도 우리 良心苛責이 始作된다. 家庭이나 社會나 나혼자나 全部가 한 回路
線上에 있다는 結論的 存在니 그 自然法理와 같다. 그런고로 理想家庭을 生覺하기 前에 理想 사랑 받으라. 다음에는 理想事業하여라. 그러면 理想家庭도 必然的으로 維持하는바다.
人間世上에는 먼츰은 理想같은 것이 漸漸가다가 中斷되나 하면은 基本原理를 脫線하는 行動으로 因하여 基本理想 向上 要素가 그 良心 苛責으로 因하여 長成하지 못하고 中斷됨으로 始作이라는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 根本原理上에서면은 始作과 同時에 永遠標準理想하고 나아가는 바다. 그런곳은 사랑이면 永遠이고 義면 永遠 標準한 義로서 繼續하고저 함이 根本이다. 그런고로 하날뜻 合한 사랑부터 理想家庭復歸로 理想事業復歸로 第一段階를 天宙之間 始作보고저 함이 하나님께서 創造하신 創造目的이다. 이곳이 自由理想世界다.
사람은 하날 對하여서 愛로 對하여 주기를 바라서 사람을 中心으로 온 天宙 和動하는 作用 始作이 理想論의 結實目的地다. 그리하여 온 天宙는 하나의 뜻으로 始作하여 乃終으로 또 始作으로 하여 알파와 오메가的 原理成立을 보는 同時에 萬世前 理想實現인바다. 하나님은 이 目的을 人間들 向하여 바라는 바를 알고 成事하여야 한다. 이 크나큰 理想의 根本을 사람 對하여 付與하였고 땅에서부터 하날로 延長으로 永遠生活始作하는 者가 되어지는 幸福의 創造攝理를 누가 感謝치 않으랴. 이와같은 生活하는 자라면 하날은 我를 中心하고 敎示하면서 모든 것을 指導하는 한 目的이 始作한다. 그런고로 이 原理 上 理想은 하날의 中心存在인 한 存在 再臨主 中心하고 始作을 보는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再臨主와 合하여 뜻 成事하는 世界子女가 되어지는 것이 하날의 한 所望인바다. (51. 6. 30)
第二 章 再臨主는 理想論 完成의 基本存在
人間이 바라든 再臨主라는 한 存在는 天地創造로부터 하나님도 또한 바라든 한 存在라는 것은 事實이다. 하나님은 이 한 存在가 다시금 地上에서 찾어지어야만이 創造的 本뜻 成事의 第一步를 볼바이므로 이 한 存在가 全 中心的 目標로 되어왔다. 그는 卽 自己의 몸인 同時에 天宙의 한 中心이겠으니 이 自體를 사랑하는 理由로 되어왔다. 再臨主는 無墮落時의 한 存在야 되는 바는 事實이다. 이 存在로 因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全部가 完成을 始作하는 同時에 地上에 對하여서는 하나님이 사랑하되 再臨主를 中心하고야만이 사랑할 수 있는 世界로 展開하게 된다. 그는 卽 再臨主는 世上사랑하든 中心目的인 存在며 基本存在이므로 이 存在가 하나님이 地上 사랑하든 한 總結實存在니 그 存在가 오면은 하나님의 全사랑은 天宙 어데 무엇보담 再臨主이므로 이곳으로 始作하여 根本 創造的 사랑을 始作하게 되는 바이다. 卽 其存在가 出現하면은 하나님이 世界 사랑하든 全部를 合하여서 再臨主와 하나되게 하는 것과 한가지다. 그러니 再臨主 떠난 곳에는 하날 사랑이 없음은 事實이다. 하나님의 사랑 떠난 곳이 苦痛의 곳이라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사랑 圈內인 地上이 되면은 그곳은 再臨主를 中心하고 되는 곳이니 하나님의 사랑하는 곳이다. 卽 하나님의 사랑받는 곳은 生命은 勿論이면서 幸福과 喜樂과 滿足이 始作되는 世界라는 事實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完成的 原理본債이므로 그 世界는 原理復歸의 世界이니 地上天國의 한 基本을 始作하는 世界이다. 再臨主 前까지는 사랑하여 온바는 全部가 蘇生시켜서 再臨主에게 合하게하는 本意이었다. 그러니 再臨主 現顯하면은 天宙는 하나님이 바라든 사랑 中心体인 再臨主와 合하여야 할 터인데 合하지 못하면은 그는 한 審判하여오든 對像의 貌樣으로 되니 그곳 向하여서는 斷乎한 無慈悲한 審判樣으로 對할 時期라는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예수로 因하여 사랑을 주어서 無條件 사랑을 주었음은 再臨主로 因하여 全部 合한 天宙사랑 復歸코저 함에서다. 그런고로 주었으니 그 價値追窮과 거두우기 爲한 存在가 再臨主이다. 再臨主는 사랑을 거두시는 存在이므로 再臨主 오신 後부터는 하나님의 사랑 받으려는 者는 再臨主 품에 와야만 다시금 創造 根本性인 사랑 理想資格을 받을 수 있는 바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만치 再臨主를 通하여 돌려 드려야 할 責任이 있음으로 再臨主를 사랑하며 한
回路的 對像을 成立시키지 않으면 안될바가 끝날에 處한 사람들의 義務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報酬的 사랑이라고 하여서도 아니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完成的사랑이다. 즉 我를 中心하고 받고 주어야 創造原理를 完成하는 바이므로 再臨主를 通하여 사랑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는 바이다. 再臨主를 다시금 사랑하면은 根本的 創造理想全部가 始作을 보아서 自己로 因하여 完成을 지어 根本理想 生을 保障하는 터가 되는 原理를 세우려고하니 再臨 外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없는 時期이다.
그런고로 사랑을 예수로 因하여 온 天宙에 뿌려서 天宙를 蘇生케 하여서 再臨主로 因하여서 거두심이 目的이니 이 目的 外에 處하는 者도 하나님의 미움의 者라는 바는 두말할바 없는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至今까지 貴한 사랑을 주어 온바는 더 높은 사랑을 目標하였기에라는 것은 事實이다. 하나님이 사랑한바는 예수로 因하여 사랑을 繁殖코저 함이 目的이었다. 예수 하나로 因하여 많은 사랑이 完成하여서 사랑을 始作케 하였다. 始作하였으니 그 結末은 있지 않겠는가? 이 사랑을 거두는 時가 卽 再臨主를 中心点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사랑하였으니 사랑받으여야 하는 時代가 된다. 卽 再臨時代부터 始作한다. 그러면 原理復歸가 始作된다. 卽 하나님의 사랑은 다시금 사람으로 通하여서 再臨主에로 回路를 지어 한 一體的 사랑 理想을 完成한다. 卽 創造理想的 한 주고받고하는 回路를 造成하여 根本原理復歸 世界로 展開를 보는바다. 다시 말하면 再創造 理想이 始作되는 바이다. 하나님은 歷史를 두고 至今까지 사람을 사랑하여 왔지만 再臨主以後는 사랑치 않는 者를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는 바이다. 하나님이 사랑치 않는 者를 위하여 사랑하면은 사탄 짝하는 두려운 한 行動의 出現을 보는 바이다. 그런고로 사랑을 주기 위한 예수 以後에는 敵까지 사랑하여 왔든바도 敵에 屬한 사람을 對하여 사랑 주므로써 사랑의 蘇生을 보아 繁殖케 할려니 敵을 對하여 사랑하라고 한 것이 예수의 根本目的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는 왼뺨을 치면 오른뺨까지 돌리는 根本目的이 있었든 바이다. 그것은 사탄보다 더 높은 사랑을 주어 사탄 對한 사랑 받는 者없게 하기 위하여서고 또 사람은 사랑을 根本生命으로 하고 있기에 사탄의 사랑 以後의 사랑을 주어 蘇生시켜 全人類를 빼앗아 넘길려니 또 惡 繁殖을 防止하여 速히 結實하게 할려니 이런 사랑을 取하여든 바이다. 그러니 再臨主 옴으로 사탄이는 敗하고 사람은 再臨主를 中心하고 根本原理完成하여겠으니
사람은 하나님에 對하여서 받은 사랑에 代身 사랑을 주어야만이 하날과 나와는 創造理想을 完成하는 한 善을 造成하여지는 根本이 됨으로 하나님에 對하여 사랑하여 돌리는 回路를 造成하여 永遠 生을 維持하여야만이 墮落前 世界를 造成하는바이다. 하나님은 再臨主를 中心하고 사랑을 주는 길을 돌려서 찾는 回路를 잡고저 하는 바는 善하게 하고저 하는 바가 根本이니 그래야 全部가 살수 있겠으니 이런 目的으로 되는 것이기에 理想論을 完成하게 하는 바이다.
再臨主오면은 그곳 侍奉者는 昔日에 사랑줄 時代와 反對 方向으로 우리는 態勢를 取하지 않으면 안될 時代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줄때는 뿌리일 때요 再臨主 나타난 後에는 사랑의 結實을 거두는 때니 再臨主 품 外에 있는 者를 사랑하면은 거두는 때에 뿌리는 것과 한가지니 하날의 사랑이 無效果됨을 正하는 時代이다. 다시말하면 하날 存在들이 하날 存在아닌 者한테 왼뺨 맞으면 愛으로 對하지 않고 오른뺨까지 처서라도 하날의 義를 세우지 않으면 안될 時代이다. 다시 말하면 아벨적 하날 存在가 가인적 하날 存在 아닌 者 對하여 하나님이 取할 수 있는 順從者로 하여 根本 復歸해 세우여야 하는 時代이다. 그런고로 時代的으로도 自然히 이러한 傾向으로 歷史는 흐르고 있는 바는 이 根本 뜻이 完成하려는 時期가 가까워 오는 것을 보여주는 바이다. 그러나 再臨主를 侍奉하는 者들에게 있어서는 各自 各自가 하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分體로서 完成하여야 할 存在들이므로 함부로 손을 들어 칠수 없는 바이다. 뜻안에 있는 者를 치면 하날의 아버지 djhajsla의 몸을 犯하는 結果를 招來하는 바이므로 사랑을 中心하고 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卽 한 兄弟면서 한몸임으로 예수가 傳하는 사랑을 갖고 對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萬一 뜻에 反하는 者가 있어 뜻을 세우려하기 위하여 忠告를 받게 될 때에는 順應하여 뜻을 세우여야 할 義務가 있는 同時에 自身으로 하여금 代身感謝의 表示로서 뜻 繁殖에 努力하지 않으면 아니될 責任이 있는바이다.
至今까지 歷史를 두고 惡 支配下에 屬하여 있든 聖徒들은 가진 수모와 壓制와 업수히 여김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 蘇生시켜 長成시키기 位하여서 사랑 中心으로 讓步하여 왔든 바이다. 再臨主 以後에는 善 支配를 세우는 同時에 사랑을 찾아 建設하기 位한 歷史的 收穫時期이다. 再臨主 모시는 者들은 收穫과 同時에 建設을 推進시켜 나가여야 할 義務를 各自가 갖고 있음으로 再臨主의 뜻을 中心하여야 만이 相對를 對해서 사랑을 주며 또 받으여야 하는 바다. 第三者를 對하여 서로 함부로 줄수 없고 함부로 받을 수 없다. 오직 뜻의 保障을 中心하고야 주고 받고 할 수 있는 바는 事實이다. 이것은 善成事하려니 이런 創造原理를 要求케되는 바이다. 이리하여야 하날의 善의 곳이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날을 侵犯하는 行動으로 되는 바이다. 그러니 우리는 確固한 立場을 定하고 뜻밖에 屬하는 惡 對하여서 無慈悲한 分別時代가 再臨主를 中心하고 卽 理想時代이다. 그러니 良心的 善을 中心하고 나가여야 한다. 그리하여 自我 善 完成하여서 相對를 잡아 對像 善으로 始作하여 하날 善을 中心하고 나가여야 한다. 그리하여 自我善 完成하여서 相對를 잡아 對像善으로 始作하여 하날 善에 合하여야만이 비로서 創造原理를 成事한 善으로 始作하는 同時에 하날과 合한 理想善으로 社會와 連結지어 온 天宙에 理想善과 合하는 基本原理点이 始作하게 될 때에 天宙는 기쁨이 나로 因하여 始作하게 되니 創造로부터 付與받았든 原理的 重大課業은 完成을 보게 되는 바이다.
完全히 주고 받고 하려니 우리는 再臨主를 中心하고 하날 對한 사랑으로 하날 父母를 모셔야 된다. 이것이 創造理想 善 完成의 根本 뿌리이다. 이 하날 父母와 하나되어야 創造理想 善을 始作한다. 그러니 하나님과 合하려니 하날 父母 품으로 合意를 보아야 한다. 그러면 創造理想 原理完成이니 理想善이다. 또 그 外에 우리 사람은 肉身이 있나니 하날 父母를 第一位로 하는 影像인 肉身父母가 있는 바이다. 이 肉身父母가 하날 父母를 侍시는 뜻에 서서 完全히 侍奉하는 父母면은 그 父母로 因하여서 肉身받은 子息은 한몸과 같이 되어야 할바가 根本創造原理上点이다. 그러니 하날 父母를 侍奉하는 代身 尊奉하여야하는 創造原理가 있기에 孝道하지 않으면 아니될 原理를 갖고 있는 것이기에 孝道하라는 儒敎의 起源이 있는 바이다.
또 나라 적으로 對할적에는 再臨主를 王으로 侍奉하여야 하며 또 至今까지 의 未知의 根本을 敎示한것으로는 師으로 侍奉하여야 하는 바가 創造的 原理上点임으로 孔子를 通하여 三綱이란 原則을 세워서 歷史를 始作하게 한바다. 그 目的은 至今 創造原理点 完成을 돕게 하기 위하여서 歷史上에 남어지게 한바이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날 사랑을 繼代로 받아 繁殖하여야 하겠는데는 먼츰 하날 父母의 뜻에 하나되기 位하여 努力할것이며 世上父母 爲하여 뜻 合하게 努力할것이며 그 다음은 내 對像 存在로 하나 되어서 全體가 하나로 完成하여야 할바가 人生의 第一責任인 바다.
卽 하날 父母 + 肉身父母 + 夫婦(子女) 合하여서 하나되어 分立 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創造性相對로 對像理想型을 展開케 한바가 根本創造原理이었다. 이것이 하나로 하날뜻 成事한
者라면 再臨主를 侍奉하는데 完全 資格인 第一責任은 完成하는 바이다. 그러니 孝子 忠臣이 되어서 하날 父母를 侍奉하여야 自己를 完成하고 하날 對하여 完全仲介的 立場을 取할수 있는바다.
特히 世上에 父母된 立場은 어떤 立場인가. 理想論으로 보아 살펴 볼때에 卽 我를 例로써 잡는다 하면은 我는 肉身的 位置이고 父母는 마음적 位置이므로 하날 對해서 完全한 影像으로 되어 子息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될 相對位置를 갖고 있는바이다. 그러기에 父母는 子息 對하여서 마음이 몸을 支配하듯이 父母는 子息에게 하날의 한 模型의 本이 되어 나타나서 뜻 成事에 努力하여야 하는 責任的 義務가 있는 바이다. 그렇지 못하면은 하날 뜻 成事하기 爲하여서는 몸이 마음을 支配하여서라도 完全을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으니 즉 子息d; 父母에 대하여서 뜻을 잘못 行함이 있다하면은 是定할 責任이 있는바이다. 그러므로 再臨主를 모시는 者는 나를 中心하고 먼츰 家庭을 完成하여 理想論 三位格 影像을 完全히 造成하는 것이 第一責任인바다.
그리하여 第二責任部分인 事業과 社會를 뜻 合意者로서 對할 수 있는 資格이 成立하는 바이다. 第一責任部分을 完成한 자라면 第二責任 對像인 事業으로 社會를 對하여 나가는데 資格이 있는 同時에 그 뜻 未推進者 對하여서 무엇이나 忠告할수 있는 바이며 指導할수 있는 資格者가 되는 바이다.
그러니 이곳에 昨今 問題 보담도 뜻 中心하고 完成者는 指導할수 있는 資格이 어느 곳에든지 있는바이다. 이것이 原理的 責任이면서 善繁殖擬中心이되는 바이다. 그러니 再臨主를 侍奉하는 世界는 이 理想을 標準한 世界이므로 家庭에서나 社會에서나 國家에서나 世界 어느곳에서나 原理아닌 곳을 責望하여 定義로 培養할 使命적 連結이 各自에게 負擔되어 있는 바이다. 萬一 萬義를 그냥 두면은 그 存在 역시 뜻 未成事의 한 相對 決定者 立場이 되니 不義라는 墮落 相對 根本을 보는 바이다. 이러니 누구나 다 하날 뜻 成事를 標準하고 地上에서 不義에 대한 防衛態勢를 取하는 것이 再臨主 以後에 處하는 우리 人生 生涯의 맡겨진 한 使命이다. 이 完成된 時代에 屬하게 되면은 사람들은 하날 子女의 始作을 보는 바는 勿論이며 또 그 時代의 夫婦도 永遠한 夫婦로서 하날 父母의 한 代身分體로서 永遠한 理想夫婦로 始作하는 同時에 하날에 가 있는 靈人들이 땅에서 完成하여야할 未完成部分까지 充當하여 채우는 役割을 하여야한다. 즉 各自는 地上의 自我를 完成하는
同時에 하날에 가 있는 食口 있으니 그 어찌 重大한 責任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地上에 있는 나 自體로 因하여 地上完成이면서 代身天國完成이라는 뜻 完成하여 根本 解放始作을 보는 바이다. 그러니 天國靈人들은 우리 地上 사람과 合하여야 自己들이 地上에서 完成하여야 할 未完成 部分을 完成하겠으니 이 時代(再臨主)를 하날 靈人까지 苦待하는 바이다.
이리하여 自由家庭始作과 同時에 天國完成의 第一步를 始作하는 바이다. 하날은 理想論으로는 나에게 第一對像本體요 夫婦들은 各自에게는 第二對像存在이다. 그러니 創造原理善을 合하여 完成할 義務가 있는 바이다. 男便된 者여 그 義務는 하날 對하여 사랑 받으려니 아름다움의 自體로서야 할것이며 그리하여 사랑을 받고 美를 돌려서 善을 完成하면 하날 代身 사랑을 가진 하날 代身아버지 格으로 第二對像者 妻를 對하여 사랑으로 나타나라. 그리하여만이 原理人 男子인 主管資格者다. 그런 男便을 對하는 婦人은 美로 나타나서 하날 어머니 代身分體로서 第二善을 사랑 一體로 因하여 完成하여서 基本 善의 한 回路를 찾어 세우여야만 理想善을 造成하는 바이다. 그러니 夫婦는 하날 아버지 어머니의 代身資格者들이므로 至極히 貴한 對像位에 서 있기에 各自는 하날 父母 代身 서로 尊奉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繁殖된 子女들은 하날 子女이라는 榮光을 보는 바이다. 이 子女는 하날 아버지 어머니의 한 本體인 表示 存在들이다. 즉 아버지 어머니의 한 表示로서 사랑하여야한다는 證據도 된 者가 子女이다. 그러니 그 自體는 貴한 自體이다. 父母는 이 貴한 子女에게 對하여서 사랑하니만치 하날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여야 한다는 表示的 存在가 子女이란 存在들이다. 그러니 하날 사랑의 眞珠를 알려주는 바가 父母의 子女 對한 사랑이다.
父母는 子女에게 마음 있는 바와 같이 하날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이와같이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體得케 하는 證據이다. 子女 생각하듯이 하날 사랑하는 者라면은 그는 모든 것을 完成할 本 되는 者라는 것을 보여주는 바이다. 그러니 우리 人間은 먼츰 하날 사랑이 第一位로서 세우여야 夫婦대한 사랑이 第二位로서 보며 子女대한 사랑이 第三位로서 나타나 分立된 듯 하나 하나의 사랑으로서 歸結되어야 함이 하날 사랑인 同時에 理想始作이 되는 바이다.
이런 創造原理를 中心하고 되었기에 墮落되었으나 나타난 家庭組織의 根本原因으로 되었다.
그러기에 父母는 子女를 사랑할줄 알고 子女는 父母의 사랑에 대하여 感謝하는 맘으로 아름답게 나타나게 될 때 父母 기뻐하고 子女들은 滿足하여 原理的 善을 造成하게 되는 바이다.
이런 原理를 가졌기에 子女된 者로서는 孝道하여야만이 原理人 子女로서 설수 있겠기에 人間 世上에서 墮落되었을 망정 父母에게 孝道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되어왔다. 子女가 完全히 父母의 사랑에 對像으로 서면 創造性 原理를 完成하는 것이므로 하날 사랑에 對하여 하나될 수 있는 理想善을 찾아 세우게 되는바이다. 그러니 사람들을 中心하고 善 繁殖을 完成하는 立場에 서 있으니 얼마나 貴한 存在들이면서 하날의 理想實現을 完成할수 있는 立場에 사람들이 아니랴? 그런고로 완성된 사람들을 再臨主를 찾아 根本原理復歸하여야겠으니 먼츰 어머니를 찾어 父母를 始作하여서 子女찾어 家庭建設의 始作을 보아야 하며 社會찾어 國家로 國家 찾아 世界로 世界찾어 온 天宙를 찾어 原理를 세워야 하는바가 根本目的이다. 그러니 末世에 處하여 있는 信徒는 하날 父母를 찾어야 할바다.
그 父母는 누구신가 하면은 再臨主로 因안 根本父母며 墮落前 復歸父母로서 사탄 대하여 支配할수 있는 創造人 根本父母로서 子女를 찾어 墮落前 本繼代를 成立하는 바이다. 그런데 至今 하날 子女될 信者는 누구나가 그 本體를 잘알지 못한다. 그러나 特別한 敎示로 因한 存在들이 먼츰 合하여 侍奉하여서 出發할바다.
靈이 完全長成한 生命級 者라면 알수 있는 바이다. 이 再臨主를 찾는 것이 現實 信徒들의 큰 義務이다. 찾어드는 世界信徒들을 合하여서 理想的 家庭始作을 地上에서 始作할바이다. 그리하여 家庭 中心한 社會로 國家로 世界로 天宙로서 大家族理想을 完全成事하게 할 義務가 再臨主를 侍奉하는 者들의 生活課業이면서 生涯의 目的이다. 이 時代는 惡 對해서 無慈悲한 時代면서 義와 善 對하여서는 榮光이 되는 時代며 良心的인 人士들이 解放을 받아 原理를 세우면서 出世하여야 할 時代다. 그리하여 하날의 한 模型을 完成하여서 六千年 歷史를 終結지어 安息年代를 보고저 하는 바이면서 永遠性의 始作을 보고저 함이 再臨主를 中心하고 完成하여야 할바가 하나님의 根本 뜻이다.(51. 10. 18 記)
第三 章 歷史的 실두루머리 原理的 解決은 韓國에서 始作
第一 節 歷史的 실두루마리의 原理的 解決은 韓國에서 始作
歷史의 실무더기는 하나를 端緖로 하야 始作하고 돌고도라 지내서 六千年 年限을 두고 도라 왔지만 始作된 끝과 終熄되는 끝은 自由롭게 감기어 나온 것이 아니매 트러지고 웅크러져 始作과 끝을 잡을 수 없는 두루뭉시루된 歷史의 實狀은 누가 탄식치 않으랴. 이 嘆息을 햇치러니 現實과 지내온 歷史와의 알 수 없는 흥크러짐으로 나온 것에 對하여 이 두루뭉수리 된 歷史의 끝을 잡아 終熄点을 찾아 한 自由의 실무더기로 만드려 보려고 所望하여 나온 바가 歷史的 所望城으로 되어 뜻 있게 왔든 聖賢과 偉人烈士들은 이 길이 잠겨진 端緖의 한 끝을 잡아 단겨보나 제 멋대로 웅크러진 실무더기는 自由롭게 나가게 한 뺨의 길이도 融通 못하니 이 끝을 잡고 나타났든 偉人 聖賢들은 絶望과 함께 嘆息의 惡憂의 根據地로 저주하고 나니 이 실무더기는 如前히 廻轉을 繼續하여 變함 없는 하루의 延長을 웅크러지면서 굴러나오고 있다.
이 흥크러지진 歷史的 실두루마리를 골라 펴놓아 自由의 실 두루마리로 하고자함이 歷史的 要求였고 굴러 나가는 未來의 要求에도 된다. 이 실두루머리가 自由端緖로부터 自由 終熄点까지 남길 수 있는 실두루머리를 本來부터의 原理를 가지고 存在하는 실두루머리의 目的이었건만 存在할 수 없는 흥크러짐의 모양이란 全部 全體에 對하여 存在의 實狀이 실두루머리를 슬프게 하는 矛盾의 始作이다. 이 始作은 存在하는 價値性을 破壞하여 찾을 수 없는 隘路의 무더기로서 그 眞狀으로 그 眞狀은 全部가 원한의 根據地로 되어 死亡의 구렁텅이로 通하게 되는 처량한 모습으로 變하여 나왔다. 그러면서 人間들은 찾고 찾아 始作된 端緖와 끝 된 端緖를 찾아 당기어보니 당기면 당길수록 실무더기는 옮으로 되어 한 덩어리 罪의 두루뭉수리로 되어 당기는 者의 멋대로 이 실무더기는 움직이게 되니 끝은 있으나 그 繼續은 그 繼續을 連한 실무더기로 한 갈래 갈래에 連하여 있는 실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이 한두루뭉시리도 보이게 되니 끝을 잡고 있는 者들의 마음대로 끌리어 당기는 두루뭉시리의 놀음 노리가 오날의 歷史의 表現으로 된 現實의 實狀이다.
始作한 첫 끝을 잡으려할 때 唯心의 門은 열리게 되고 나종의 끝을 잡으려 할 때 有物의 門으로 通하게 되니 始作의 門을 나온 歷史의 出發은 굴으기 始作하는 路程을 取하여 꼬부라지고 웅크러진 軌道를 잡아 굴러나와 돌고돌아 두루뭉수리의 길을 잡고 나오고 있으니 뒤를 도라 보아도 흥크런진 실무더기료 앞을 보아도 흥크러진 실무더기니 이끝 저끝
을 헤아릴 수 없는 한무더기를 이루어 나종 끝으로 쥐이게 되는것이 有物의 門으로 寄着点을 잡게 되어 있는 바가 歷史的 실두루머리며 人間世界의 실두루머리인 바다.
처음 잡고 있는 者가 唯心이요 나종 끝을 잡고 있는 者가 有物이니 서로 당기어 이 실두루머리를 自己便으로 가까이 옮겨 놓으려고 하고 있으되 옮기면 옮길수록 自己에게 가져 놓을수록 옮겨지는 自體에 대하야 한끝은 反作用의 原理에 比例되는 力의 作用을 받게 되니 하날 당기면 相對便이 헤기우고 相對便이 헤기우면 이 편도 당기어져 漸漸 疑心하게 웅크러지는 것은 두루뭉시리의 실무더기뿐이다.
이것을 풀려하는 人間에게 있어서는 唯心的 끝의 部分과 有物的 끝의 部分만이 原理線인 모양으로 보게됨에 唯心은 唯心便에서 解決向線을 向하여 나오고보면 有物에 固着되어 당기여 있는 실두루머리를 逢着하고 有物에서 自由向上을 찾어 올라가면 唯心便에서 당기고있는 실두루머리에 逢着하게 됨이니 唯心에서 有物로 通하여야 하는 것이 原理의 끝을 가진 連하여 있는 실두루뭉시리의 路程을 通하여야 만이 되겠고 有物에서 唯心으로 通하여야 하는 것이 原理인데 이 두루뭉수리 된 실무더기를 通하여야 만이 끝에서 끝을 通하는 바인데 이 두루뭉수리의 通하는 길을 찾어보려 요길도 고길같고 고길도 여기 같아 붙잡을 수 없는 形狀을 取한 路程이니 通하는 길을 잡을 수 없으매 이 두루뭉수리의 路程은 除하여 놓고 끝만으로 보여주는 그 自體들 만으로 갖고 처음과 始作으로의 맺고저하니 唯心便만으로 하고 보면 唯物이 달려오고 唯物便으로 하고 보면 唯心이 달려오고 하는 것은 흥크러진 실무더기가 나타날 未知의 路程으로 그 存在를 갖고 있기에 그 取하는 自體들의 始作 끝에는 自然的 膳物로서 보여줌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풀기 爲할려는 것이 人間의 理想인 同時에 創造主의 바라는 바의 所望이며 두길을 그냥 잡고 있어서는 풀 길이 萬無하므로 한 끝만을 固着시켜놓고야 만이 다음 끝을 되풀이한 路程을 反駁하여 풀어 올라가야만이 될바가 至今 실무러기를 풀려고 하는 것이 現時的 課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 끝을 놓아야 하겠는데는 造物主가 계시므로 뿌리되는 唯物論的 根據를 놓을 수 없는바다. 이를 놓으면 中心을 잃어버린 存在物과 같이 居處없는 方向線을 取하여 回轉하다가 破壞를 이루는 것이 原理的 事實이며 葉部인 唯物論的 事實이 놓으여야할 責任이 自然的 公式原理로 되는 바다.
그럼에 두루머리의 現實의 歷史的 潮流는 한 基着点을 보아야 할바가 要求되는 路程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創造主가 있다 할진대 必然的으로 끝을 잡고 잇는 唯物的 固着点은 끊게 되어야 되는바가 原理로 되는바다. 그렇게 하면 이 두루뭉수리는 唯心便으로 옮겨 놓아 創造主인 根本体 앞에 나타나게 될 때 이 실두루뭉수리의 端緖로부터 낱낱이 골라놓아 歷史的 路程에 펴 놓아 唯物的 根據地까지 一年線 路程으로 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卽 歷史路程을 主管하여왔든 主人公이기에 이런 실무더기의 흥크러진 通路를 움직여 나왔기에 이것을 풀수 있는 存在는 基本되는 創造的級에 屬하는 하날 存在가 아니겠는가.
이 目的 課業을 감당하기 爲한 그 存在가 歷史的 中心存在며 原理完成할바도 말할바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存在도 하날적으로도 中心存在요 歷史的 人類에게 對한 中心存在로 되는 바는 事實이다.
인간은 그저 人類의 歷史的 실두루뭉수리를 푸는 그 中心存在를 所望城으로 하여 그의 뒤를 連하여 풀어야 할 第二次的 立場에 세우려 하여서 創造主는 그 中心存在로 因하여 풀수 있으며 뭇 人類에 對하여 이 存在에게 合하여 하나되라고 要求한바도 보내신 存在가 卽 그리스도 예수이었다. 예수는 이 全部의 路程의 目的을 풀수 있든 길을 다 잡지 못하였기에 再臨이라는 名詞를 남기고 가게 되었다.
그러매 歷史的 모든 人類는 예수를 中心하고 설수 있게 되며 다시 人類 앞에 남아진 根本의 路程을 밝혀주어야 할 하날의 責任이 있기에 다시 地上에 나타나 原理의 路程을 찾어 주어야 하겠으니 地球上 남어져 있는 唯物史觀을 通하여 役事하는 사탄의 固着점을 끊어야 할바이니 이것이 끊기어야만이 하날의(創造主)의 뜻대로 이 실두루마리를 풀 수 있겠으니 이것을 取케 하는 것이 終末審判의 劃期線이다. 그리하야 한끝을 끊었으니 하날은 自由로 原理路線을 찾아 展開시킬 수 있겠으며 이 뜻 目的을 두고 보내심의 그 存在가 나타나여야 할 再臨主의 存在이다. 이로 因하여 끝에서 通할 수 있는 웅크러진 실무더기를 펴 놓은 自由路程을 建設하는 目的의 完成을 볼 수 있음으로 墮落이 없었든 그 原理的 世界를 門으로 하여 온 人類가 이로 因하여 웅크러졌든 실무더기를 보지 않든 끝에서 끝을 通할 수 있는 自由路程을 取할 수 있는 原理를 다시 찾어 이룰수 있는 것이므로 復歸라는 名詞로 完成되어 無限히 通할 수 있는 始作点부터 終熄点까지 通하여 거리낌 없는 向
線으로 다시 始作点의 企劃을 보게 될 때 原理的 路線을 完成되므로 永遠히라는 바는 自由原理인 것이다. 이 路線에 선 者는 始作과 끝을 잡은 者로서 처음과 나종을 通할수 있는 要素로서 알파와 오메가적 理想을 完成하여 原理脫線 없으면 永遠 自由向線에서 活動할 수 있는 解放 存在로 하게 하고저함이 人類 對하여서 約束하였든 中心存在로 因하여서 누구가 解決짓지 못하든 웅크러진 실무더기를 헷치어 原理的 路程으로서 建設할려니 歷史的으로 未知였든 端緖的 路程이 보여지어 萬原理와 通할수 있는 共通基点으로 되어야 할바이므로 흥크러진 歷史的 실두루머리를 解決할수 있는 바이다.
그러니 누구나 이 基盤 우에 서서 自由理想을 復得하게 될 때 至今까지 원한의 根據地로 움직여 나오던 廻轉은 變하여서 所望의 廻轉으로 永遠無限世界로 向進할바가 目的으로 되었다. 至今 이와같은 原理世界를 目的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서 있음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至今보면 두 路線은 非原理로 出發한 膳物로서 나타나는 結果的 路線이니 原理的 唯心과 非原理的 唯物이 相隔을 取하여 두루뭉수리인 실두루마리를 中間에 놓고 自己便으로 (右, 左. 上, 下) 당기고 있는 現實的 實狀이니 어찌되어야하는 結論은 各自의 推測으로 맡기이고 同一한 答으로 나타날 바이다. 지금 地球上에 唯物主義가 나타나서 모든 原理的 眞理라고 말하는 바는 한끝만 쥐고 두루뭉수리를 中間에 놓고 한끝의 部分인 엉크러지지 않는 部分을 全部로 되어 있다. 卽 解決해야 할 실두루뭉수리를 모든 基本의 中心으로 하는 物質格 中心地로 잡고 잇다. 그러니 여기에서 連絡되어 있는 唯心的 한 端緖의 立場을 잡지 못하는 末級的 段階에서 論理라는 事實을 摘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主義를 根本的으로 破壞시키어 실두루머리를 通過하여 唯心的 端緖의 起着点을 連하게 하여주어야 할 使命的 潮流時代가 現 潮流的 象徵인바다. 歷史는 始作하였으며 完成의 目的을 向하여 움직이고 있나니 이 右左의 判結을 짓는데가 原理上에 나타난 非原理始作의 完成期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原理世界를 出發을 보아야 할 것이 地球上 한 基点을 中
心하고 나타나여야 할 바가 要求되는 바이다. 여기에 非原理的 時代로부터 原理世界에 드러서게 될 때는 前에 論한 歷史的 起點은 作定하여야 할바이므로 原理와 非原理와는 相對를 지어 한 線을 境界로 하여 對陣하지 않을 수 없는 中心線 起點으로 된다. 이 起點의 立場이야 非原理의 最高部의 末路이며 原理인 始作의 起點인바도 事實이다. 그러므로 世界上에 이 起點地帶도 새 出發의 起點地帶로서 나타나야 할바가 根本으로 되어야 할바는 事實이다. 그것이 卽 歷史的 所望의 터요 希望의 터이었다. 卽 非原理存在인 사탄과 原理存在인 하날과 決戰할 勝敗를 決하는 起點地라는 바는 事實이다. 그러기에 起點地부터 歷史的 새로움의 端緖가 始作되어야 하는 바가 歷史的 要求로 바라든 所望의 始作이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至今이 起點線上을 分立하여 싸우게 하는 中心起點과 그 線을 世界上에 찾어보게 될 때 韓國이라는 나라를 起點으로 하고 三八線이라는 線을 分立으로 하여 歷史的 終止符를 찍고저 하는 일이야 말로 人類의 서러움과 悲哀의 起點이 되는 同時에 幸福과 기쁨의 起點이 되어야 한다는 原理的 結論上을 離脫할 수 없으며 그 起點을 向하여는 하날이 總動員하는 起點임은 事實이다. 그 反面에 惡이 總動員하여 나타나는 起點임은 事實이다. 이 原理的 對峠戰을 바라보는 世界人間들은 不安으로 바라보아야 할 焦點地라는 것은 사실인 同時에 反面에 希望의 焦點地라는 것도 事實로 되어야 하는 바가 事實이매 世界上에 없는 새로운 事實들이 이 起點地 韓國을 中心하고 이루어 진바는 우에서 論한바 없는 事實이다. 그러매 世界平和의 새로운 構造로 된 UN은 韓國에서부터 그 出發을 보는 바이고 反對인 共産衛星國家도 韓國을 對하여 相衝을 보지 않으면 아니될 歷史的 攝理路程의 根本地로 되기에 이러한 現象을 展開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韓國平和는 世界平和의 起點되는 韓國으로서 되어야 하며 韓國戰爭은 世界戰爭으로 나타나는 바가 結論的 目的으로 되는 바이다. 또 이 韓國은 하나님과 사탄과 人을 中心하고 對峠되는 戰爭이며 그리스도의 理想을 出發볼수 있는 解決짓는 根本의 戰爭이매 하날의 總動員하야 그리스도를 中心하고 이루어지어야 할 사탄 根本追放으로 하는 審判目的完成하는 根據地이매 聖經完成하여야만이 하나님이 攝理아여오든 歷史的 새로운 出發은 基臺잡을 수 있는 바이므로 하나
님을 中心한 世界人은 總合하야 하날 直接主管으로 나타나야 할바가 目的이므로 韓國 戰爭中에 歷史上에 보지 못하였든 그리스도의 空中現顯함이(基督新聞 發表 一九五一年 十月 三十一日 水) 神奇한 일로 世界 사람은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이리하여 韓國戰爭은 世界戰爭으로 또 韓國 戰爭은 하나님과 사탄의 戰爭으로 旣必코 勝利할 綿羊的 하나님 便되는 UN機構는 山羊的 共産國家를 敗亡시킨 後에야만이 平和理想을 始作하는바가 原理로 된다. 이것은 사탄이 最後屈服이므로 完成되는 同時에 非原理的 歷史를 終結짓는바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原理的 平和理想을 中心한 新天新地의 新世界는 希望의 世界란 展開를 볼바가 原理的 根據点으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흥크러진 歷史的 실두루마리는 原理 根據点으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흥크러진 歷史的 실두루머리는 終止符를 찍고 始作 끝에서부터 나종 끝으로 通할 수 있는 한 回路的 理想을 完成할 수 있고 理想論을 中心한 善의 世界의 目的을 中心하여 唯心 唯物의 分別없는 一體的 目的을 完成하여 丹和世界를 建設하여야 할바가 하나님이 바라는 바의 目的이며 또 人類가 질머진 課業으로 되어있다. (1951年 11月 18日 아침)
第二 節 韓國의 氣候는 世界文明의 標本될 象徵
넓고 넓은 世界를 두고 氣候가 四時四節을 두고 明瞭하게 公式的으로 表現化 하여 보여지는 氣候는 世界어디서라도 찾어 볼수 없는 果然 讚呼할만한 것은 韓國 氣候인 것이다. 世界를 두고 보면은 이 氣候는 歷史發展上에 偉大한 貢獻을 가지고 지금까지 찾어나오고 있다. 世界를 氣候的으로 區別하여 보면은 熱帶氣候圈內와 溫帶氣候圈內와 寒帶氣候圈內를 보여주고 있다. 이 氣候的 關係는 密接한 關係를 가지고 至今 人類歷史는 움지겨 나온바이다.
지금 韓國이라는 나라를 집어서 氣候的으로 보면은 溫帶圈內에 屬하여 있으면서도 溫帶的 氣候로서만이 보여짐이 아니고 四時를 두고 全世界的 氣候를 全部 表現化하고 있음을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卽 春夏秋冬 四節이 있다. 이 四時는 또다시 十二朔을 가지고 한 公式과 같은 軌道的 氣候로 展開를 가지고 四時軌道를 지내는 바는 事實이다.
韓國의 氣候는 果然 全世界에 氣候의 標本으로 創造받고 있음을 누가 變更할수 없는 한 天理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 氣候的 立場과 創造主와는 어떤 關係로 지였는가 生覺하여보면은 여기에 神奇한 事實들을 發見할수 있을 것이다. 氣候의 中心地는 모든 博物에 대한 한 中心地로서 世界上에 없는 動植物이 集中한 곳으로 自然界의 棲息場을 볼수 있는 事實이다. 이렇듯이 動植物界에 對하여서나 또 人間에 있어서나 全部는 氣候에 對하여 生에 對한 重要關聯을 가지고 있기에 氣候가 自己들의 生의 完全을 保存할 수 있는 理想的 氣候를 要求케 되는 事實이다.
그러면 지금 世界를 보면은 熱帶地域과 寒帶地域을 上 下에 두고 있는 溫帶地域은 熱帶와 寒帶에 對한 中部位에 있음으로 그 地帶에 對比되는 生을 保存하는 體型으로 되어지게 되어있다. 그런고로 氣候의 關係도 世界上에 五色人權을 區別하여 놓은 바면서 또 그 本性分과 性品까지가 全部는 氣候를 中心하고 右左하여 보여지게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그 民族이면 民族 百姓이면 百姓 全部는 淳生地域에 氣候로 因하여 全部는 右左되는 바는 事實이다. 또 壽命問題도 自然的으로 이 氣候的 關係로 右左되는 바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 氣候란 目的이 앞날 人類發展史的으로 보아도 人類理想과는 언제나 合하여 步調를 움직이게 되는 바도 事實이다. 그렇다면 世界的으로 보면은 모든 萬相은 氣候를 中心하고 發達도 右左하는 時代가 온다는 바도 아러야 한다.
그런데 韓國의 氣候는 世界없는 最高理想的位를 가지고 있는바인가 하면 이것은 創造主의 큰 根本恩擇이라는 바는 事實이다. 本來 天地創造는 한 中心을 標準하고 萬相은 지음받은 바는 事實이다. 世界를 創造하시는 創造主도 한 中心地로 하여 各樣으로 벌러 놓은 것이 萬物創造다. 그런고로 그 中心地는 世界上에 무엇으로나 世界的 標本으로 되어야 하는 바는 原理的 事實로 되는 바이니 반드시 氣候的 問題로서나 各方面으로서가 全部가 한 標本的 立場으로 되어지게 되어야 만이 原理的 事實이다. 이 中心地 向하여 最高 하나님의 理想은 움직임을 알수 있는 바의 사실인 바이다. 그렇다면 標本的으로 보여지는 그 地域은 萬宇宙의 全部의 한 標本狀을 보여지는 곳은 創造主를 가진 被造物 世界에 보여지어야만이 事實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世界上에 重大한 關係로서 人類歷史를 右左하는 氣候的 關係와 人間을 生覺하여 볼적에 人間의 理想的 氣候圈內를 自然的 要求할바이니 그 氣候的 目的地는 自然的으로 世界上에 찾아 놓으여야 하는 바가 必然的 要求로 되어진다. 그렇다면은 至今 世界를 보면은 韓國의 氣候는 世界의 第一位를 가지고 있음을 누가 否認못한다. 이 氣候는 一年中心하고 四時를 通하여 全世界 全部의 氣候의 感味를 體得하는 바이다. 이 氣候야말로 누가 찬양치 않으랴. 봄이면 꽃피는 그 自然의 美 여름이면 綠葉이 茂盛한 自然美 가을이면 丹楓의 自然美 겨울이면 莊嚴한 銀世界로 되는 自然美 全部가 人間 理想의 絶境으로 詩的 感想을 傳하여주는 人生 理想의 한 自然境을 보게 되니 그 얼마나 創造的 고마운 事實이랴. 이렇게 創造하신 創造主도 全世界를 보게 될 때에 氣候的 中心地로 된 그 곳 向하여서 讚揚하는 中心地라는 것도 事實이 아니겠는가. 世界에 韓國은 自然的 福을 갖추어 지음받은 地域이라면 創造主가 계시는 以上에는 韓國을 自己가 第一 貴하게 理想地로 할 것은 自然的 原理要求로 되는 바이다. 韓國의 氣候에 對하여 살펴보면은 이렇듯이 創造主 便으로도 重要한 目的地로 되어야 하는 것이 世界的 氣候를 中心하고 볼적에 生覺하여지는 바는 事實이다.
韓國의 氣候의 環境 全部는 創造主의 理想型을 表示한 中心地로서 韓國의 氣候란 自體는 理想世界인 創造主의 本境世界의 全表示的 構造를 터로 하여서 지음받어 지은바를 알수 있다.
卽 하날의 한 構造的 事實形을 表示하여 있는바가 目的으로 되어진다. 그렇기에 天國構造의 한 影像으로서 보여지어야 하는 原理的 構造를 要求케 된다. 天國의 構造를 살펴 보면은 寶座가 있고 十二使徒 中心한 二十四 長老가 있고 四靈物이 있는 바이다. 여기에 韓國 氣候를 中心하고 四靈物 構造야말로 天國의 한 榮光의 터를 象徵시킨 한 表示的 被造物 中心地라는 바를 表示한바이다. 韓國의 四時 卽 春夏秋冬은 四靈物이니 四時되어 그를 中心하고 四方을 보게 되면서 十二個月을 中心하고 二十四節을 즉 하날 全部의 한 影像의 表示로서 全世界를 對케 하는 한 中心構造의 한 標本으로 되어 있다. 이 全部는 하날 中心地를 本으로 하여 世界를 創造하였기에 이런 構造인 바이다. 이런 地上 中心地는이런 公式的 世界의 한 標準으로 表現化되어야 하는 原理的 創造目的이 있는 바이다.
그러니 全世界的으로 四時를 中心하고 十二朔으로 되어 韓國을 中心하는 二十四節이 全部가 한 創造的 原理를 完成하기 爲한 目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기에 한국의 氣候는 世界의 氣候의 中心地로서 앞날 理想世界에 많은 貢獻하여야 하는바도 生覺되는 事實인바다. 고로 至今 世界上 무슨 物件이나가 全部는 春夏秋冬과 같은 氣候的 恩澤을 받고 存在하는 被造物보담 貴한 價値를 가지고있어야 하는 바도 原理로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韓國의 生産物은 世界 어느 國에서 찾어볼수 없는 한 中心格으로 되어야 하는 바가 原理로 되어야 하는 바가 事實이다. 動植物界나 鑛物界나 全部 價値的 最高位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는 原因이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氣候的으로 完全的 恩澤을 받아 存在하는 原因임을 아러야 한다.
앞으로 우리 植物 中에 最高位의 味를 가지는 食物도 韓國의 氣候의 恩澤과 風土에 屬하는 것이라는 바도 事實이다. 또 鑛物로 보아도 第一位를 찾이 할바도 勿論이다. 그리고 特히 앞날 最高文明의 第一貢獻할 수 잇는 地域도 韓國은 한 鑛物의 權位를 보여 줄바이다. 最高熱을 대하는 最高情密器의 製作도 氣候的 最高恩澤 받은 곳에서 産出한느 鑛物만 가지고 안되는 貴重한 力活도 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氣候的 最高 標準을 가진 이런 韓國은 하날 創造主 便으로 至極히 貴한 國라는 것은 勿論이면서 二十世紀 以上 文明과 韓國과는 떠러질수 없는 天然的 恩澤을 받은 地域이니 이 地域은 하날적으로 貴하게 찾고저 하는 反面에 惡 사탄도 韓國을 찾어볼려고 여러 모양으로 對比하여 나타나는 事實을 아러야 한다.
이런 地域을 가진 韓國民族은 어떤 民族이냐하면 世界上에 있는 最才能的 智慧를 自然的으로 가지게 되는 바도 事實이다. 그런고로 韓國의 한 完全舞臺만 잡고 世界舞臺에 나서게 될 때에는 全世界 어느 民族이 따를 수 없는 卓越한 存在로 나타날 바도 天然的 創造 許諾을 업은 곳이니 自然 原理로 되어야 한다.
그런고로 하날의 뜻으로 보면은 韓國民族은 앞으로 한 知慧의 民族으로 世界 어떤 氣候的 地帶에서도 살수 있으면서 世界上에 많은 功獻할바는 하날의 目的으로 하는 國이기 때문에 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이렇게 氣候는 歷史發展 全部에까지 影響되어 人類生活과 發達과 文明과 여러 方面으로 서로 關係를 가지고 있음을 찾어 볼적에 至今 韓國까지 찾어나온 人類 發展 地域과 歷史的 立場을 生覺할려고 할 때 氣候와 文明과는 重大한 關係를 가지고 나오게 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至今 歷史的 發展을 잡은 氣候的 關係的으로 考察하면은 熱帶地帶文明에서 溫帶地帶文明으로서 寒帶地帶文明으로 移動함을 볼수 있다. 하나님은 宇宙 主人으로 계시는데 왜 根本原理世界로 出發 못하고 至今까지 이와같이 移轉하여짐을 알줄안다. 卽 非原理 存在로 因하여 먼츰 始作을 보았기에 다시 찾기 爲하여 하나님은 役事하면서 最高 標準을 向하여 나오는 바는 事實이다. 그러면서 하날 勝利로서 歷史를 對하여 最終点 韓國을 中心하고 두 對峠陳은 나타나는 바이다. 이 目的은 하나님의 理想인 目標를 完成할려니 이런 攝理路程을 向하여 나온바다. 非原理를 中心하고 出發하는 對峠陳으로 하나님은 歷史를 經過하여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蘇生으로 長成으로 完成으로 目的하고 全世界上에서 攝理하게 되었다. 至今까지 文明歷史를 살펴보면은 사탄은 熱帶圈內에서 出發하게 되는 바이다. 그 理由는 原始生活에 便利하니 사람들은 集中하여 出發을 보는 바이다. 그 地帶를 中心하고 사탄은 人을 中心하고 歷史를 對하여 하나님도 그곳 對하여서 빼앗는 工作을 始作하는 바이다. 이러니 氣候的으로 보면은 하나님은 熱帶地域을 中心하고 사탄 對하여 나온 歷史的 路程이 過去 古代文明時代인바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알지 못하고 나오게 되니 古代文明은 사탄 對象으로서 全部가 敗하게 되는바이다.
이런 關係는 古代文明은 주로 熱帶地域을 中心한 地帶라는 바도 아러야 한다. 卽 古代文明으로 보면은 東洋으로는 印度文明을 中心하고 支邦文明 西洋으로는 애급 文明을 中心하고 바빌론 文明 全部는 熱帶圈內에서부터 始作한 文明의 趾蹟을 알수 있다. 이 時代에 하나님은 文明人을 찾으려하나 完全 하날 뜻 成事를 못보아 全滅하고 擇한 百姓을 中心하고 이 地域을 떠나 溫帶地域圈內로 옮겨서 役事를 始作하는 바다. 그러나 사탄 亦是 溫帶地帶으로서 對立을 잡아 反對役事하니 그 歷史的 路程이 至今 二十世紀까지 하나님은 順從하는 民族을 中心하고 原理復歸할려는 歷史的 繼承을 維持하여 나오는 바이다.
그러니 至今 그 報應으로 歷史的 모든 時代도 熱帶地域人들은 한 奴隸的 立場에 處케 되어 나오는 바는 옛날 사탄 對한 사람이라는 것이 原因이다. 그리하여 反復되는 歷史로서 二十世紀까지는 溫帶地帶 文明으로 熱帶地帶와 合하여서 사탄 所有에서 빼앗아 나와 한 長成을 보았다. 그러니 그 反面 사탄은 自己의 뜻을 延長보려고 하나님 對하여서 끝으로 남은 寒帶地帶를 잡고 反對하니 寒帶地帶의 文明의 한 名稱으로 世界에 對立을 보는 바이다.
그러니 사탄은 熱帶로부터 溫帶를 따라 나왔으나 뜻 못보니 寒帶로서 그 經路를 세워 나와KT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完成의 目的을 成事할려니 사탄은 하날 흉내로서 主權을 세워서 나타난 것이 共産國家이다. 이리하여 寒帶文明이라는 偉勢로서 나타나니 結局 사탄은 末端地帶를 잡는 것이 卽 氣候的으로 보면은 中心地帶와 같은 韓國을 中心하는 바이다. 그러니 熱帶文明으로 溫帶文明으로 寒帶文明으로 한 分岐를 定하고 新文明은 氣候的 中心 地帶인 韓國으로서 뜻 目的하고 하나님은 사탄 手中에서 차저 復歸하기 爲하여서 그 歷史目的을 維持하여 온바이다. 그런고로 最後文明은 熱帶地帶 文明이 아니고 溫帶文明도 아니고 寒帶文明도 아닌 完成文明時代가 卽 全世界 氣候的 中心地帶를 中心한 理想文明이라 하는 바로 된다. 卽 하나님의 創造부터 理想文明時代인바다. 그러니 하나님의 理想目的 完成할 存在를 보낼려니 韓國人 中心하고 나타나는 바이다. 그 存在는 卽 全世界的으로 바라는 基督敎理想存在인 再臨主 예수로 約束된 歷史的 所望存在라는 바는 事實이다.
그러니 韓國 豫言書 中에 鄭鑑錄에 豫言한 存在도 이런 目的으로 攝理한 하날의 中心存在로 될 天地創造로부터 하날로 定한 存在라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리하여 全世界 對할수 잇는 中心存在로 되는 바는 事實이다. 이와같이 氣候에 한 中心地帶는 世界上에 한 貴한 目的位置로서 되어 있는 同時에 天地創造로부터 한 貴重한 位置로 豫定되어 있는 곳이 韓國임을 아러야 한다.
氣候는 太陽을 中心하고 그 位置가 第一 貴한 位置에 있어 그 氣候는 第一貴한 氣候的 表示를 보는 同時에 그 地域的 모든 生物이나 無生物이나가 貴한 位置를 차지하는 바는 創造主의 創造的 妙味를 完成目的 氣候地를 向하여 六千年 歷史는 흘러나는 바이다.
그런고로 氣候를 中心한 歷史的 方向을 보면은 最後의 完成 氣候地에 起着点을 잡고 最高文明의 始作을 보아야 하는 바이다. 이런 地域만이 未文明 地域으로 남아 있으니 반드시 文明은 始作할바이다. 이렇게 歷史는 氣候的으로 보아서도 移動하여 發展하여 오는 바를 歷史的 考察로도 알수 있다. 그러니 最後部는 世界에 總合的 氣候의 中心地帶가 文明할 地帶로 되어야 한다는 것도 짐작하는 事實이다. 이런 理想的 氣候로된 地帶이니 果然 創造主의 理想하는 目的地로 되게 할려니 至今까지 韓國의 地域을 두고 歷史的 複雜한 問題가 生起는 原因도 하나님과 사탄 對하는 나라로 되어지기에 서로 韓國 때문에 極東에서는 問題의 中心地로 되어왔다. 그것이 最終에는 世界의 問題를 右左하는 位置를 取하여서 韓國을 中心으로 하여 사탄을 敗케 하는 最終目的을 完成지을것이 하나님의 한 뜻으로 되어있다.
第三 節 韓國은 地理的으로도 世界의 中心地
韓國은 三千里半島로서 極東에 位置하여왔다. 보기에 아담하게 亞細亞 大陸을 連하고 있지만 그 地域的으로는 特殊한 形態를 造成하고 있는 바이다. 亞細亞 大陸을 連하는 무슨 山脈의 支配를 받지 않고 特別히 分立된 構造로서 中心地帶로 하여 北에는 長白山脈으로 亞細亞 大陸을 가로막아 亞細亞大陸과 分界로 하여 東西로 鴨綠江 豆滿江을 두어 갈라놓고 東便은 太白山脈을 中心으로 하여 서쪽으로 보기 좋은 小白山脈을 中心하여 西部平原地帶인 自然의 沃土로 端裝되어 있어 모든 方面으로도 重要位에 處하는 바는 事實이다.
交通的으로 보아도 韓國은 極東의 한 中心地帶로서 力活하는 바는 事實이다. 亞細亞 大陸을 通할려고 할적에 韓國은 한 門戶的 立場으로 되어 있기에 中國이나 日本이나 蘇聯이나가 韓國을 中心하고 對하여 通할수 있는 中心的 立場으로 되어 있음에 自然的 韓國은 政策上으로 보아도 重要的 立場으로 그 中心 役割을 하여야 할 立場도 勿論이면서 交通的 中心으로 되어 있는 바도 事實이다. 極東에 있어서 陸海空路를 通하여 交通의 重要 中心을 가지고 있는 位置로 나타나있다. 그러기에 極東에 있어서는 韓國이 中心位에 있기에 極東에 觀心을 가지고 對하는 國家들은 먼츰 韓國을 對하여 侵入的 態度를 보여짐이 이와같은 交通的 重要位置로 되어 있는 同時에 모든 具備的 貴한 自然이 恩澤받음을 누가 탐내지 않을 수 없으리만침 福된 地域으로 되어 있기에 勿論인바다.
이 땅우의 農産物을 보면은 五穀을 中心한 穀物과 그 價値는 어느 나라에서 찾을 수 없는 吟味인 五穀을 볼 수 있는 바이다. 特히 韓國의 쌀은 果然 他 地帶에서 볼 수 없는 貴한 寶物인바다. 그 外 韓國産物인 農作物은 天然的 氣候를 갖이고 있으며 動物界로 볼적에도 昆蟲界라든가 鳥類界라든가는 世界의 最高位에 價値를 占有하고 있는 바이면서 딴 動物에도 亦是 그 位置를 價値높이 갖이고 있음은 事實이다. 特히 韓國이 産出하는 家畜으로서 牛나 豚나 鷄는 世界에서 産出하는 家畜에 比하여 볼적에 그 吟味는 果然 第一位를 占有하고 바는 事實이다. 이것은 모다 氣候로 因안 恩擇으로 되어지는 바다. 또 無生物界를 살펴보면은 現代 最高文明이 要求하는 貴한 鑛物類를 볼수 있다.
그러면 그 標裝된 埋藏量은 果然 世界사람이 부러워 할만한 高貴한 地下資源을 갖이고 있는 바이며 그 品質에서는 世界 어느 나라 産品에 比할수 없는 價値를 가지고 있음을 누구나 感歎하는 珍貴한 바로 되어 있다. 그것도 理想的 氣候로 因한바다. 이와같이 陸地에서 産出되는 物件의 貴한 價値도 天然的 恩擇이라는 바는 물론이고 그 外 海産物을 찾어 보면은 三千里 半島를 中心하고 西海로는 黃海를 두고 暖流의 煥撈를 보는 同時에 東海에는 寒暖類 合하는 地域을 兼備하여 있기에 찾어 볼수 없는 世界三大漁撈場에 하나로서 되는 地域을 對하고 있는 바이니 世界에 그 魚籍을 찾어볼수 없는 韓國의 立場은 가장 貴한 海의 惠擇을 받고 있음은 果然 世界人이 부러워할 바이다. 그 外 景致와 風景方面을 살펴 보면은 크게 보면은 韓國 自體 한 人이 情感을 다하여 하날 對하여 雙手合掌하여 꿇어 앉어 기도하는 樣模이며 東은 東海로 西는 西海로서 씻고 맑혀주는 듯이 놓여 있으며 大陸서부터 三千里 半島로 한 地盤을 잡고 있는 바다. 果然 世界地圖를 볼적에 第一地形이 貴하게 보이는 것이 韓國이라는 事實이다. 韓國半島를 中心하고 日本은 한 城과 같이 北南으로 가로막어 잇으며 亞細亞大陸은 한 일터로서 約束하여주는 듯한 不變의 保護的 位置樣으로 半島를 안으려 하고 있다. 黃海와 東海는 潮水와도 같고 바다와 같이 地球의 全景致의 한 標本形狀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같은 環境 속에 깊이 잠긴 三千里를 中心한 香氣의 東山을 바라보게 될 때에 自然界의 勇勢로서 보여지는 北에 우뚝솟아 지켜주는 樣으로 그 꼭대기에 天地를 갖인 世界上 稀貴한 高山 白頭山이 있음을 누가 稱呼치 않으랴 이 白頭山을 中心하고 三千里는 기리 뻗어서 널려진 곳을 찾어드니 錦繡江山 名聲 높은 平壤을 中心한 牧丹峯 果然 새예루살램 名聲도 알맞는 하날의 貴한 擇한 땅의 光景을 보게 됨이다. 平壤을 中心으로 하여 東方쪽으로는 景致風景의 王冠인 金剛山이 있는 바이다. 이 金剛山이야말로 世界의 景致의 한 끝으로 나타난바가 金剛山인바이다. 이 金剛山은 韓國의 寶華인 것이며 앞날 韓國의 民族과 世界民族에게 많은 安慰의 中心地로 貢獻할 名勝地라는 바도 事實이다. 또 平壤中心하고 北쪽으로 찾어오면 妙香山을 비롯한 동룡굴이란 地下 金剛 名聲을 갖인 名勝地를 보게 될 때에 과연 奇妙함을 稱讚하는 바는 當然한 일로 나타나는 바이다. 그 外에도 八景名勝地인 名望 높이는 風景地 果然 우리 三千里 半島에 자랑과 寶貨로 丹粧된 創造的 惠擇을 깊이 生覺하면서 創造主의 本意的 目的을 찾어 세우여야 할 責任이 韓國인바다.
이와같이 韓國이란 小半島를 中心하고 全世界에 없는 景致와 名樣 貴한 地下資源과 産物과 貴한 位置와 氣候로도 世界에 없는 三寒四溫으로 四時 通한 明朗한 氣候山水等 全部도 創造主를 目的하고 지었다는 것은 짐작하는 事實이다. 이런 貴한 地理的 氣候을 갖이고 있는 바이니 하나님이 世界를 對할 때 사랑할려고 하는 中心 目的地라는 것도 알게 될 바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韓國을 通하여 攝理 中心地로 하겠기에 韓國이라는 나라는 世界의 義의 王으로 나타난다고 傳한 韓國豫言書인 鄭鑑錄에 豫言케 한바도 하날의 攝理의 한 뜻이 있기에 맞는 바는 事實이다. 그 豫言을 完成할 수 있는 그 存在는 하날로 定한 王이라는 存在인 萬王의 王되는 再臨主 存在를 말하는 바와 합하여 西洋의 文明을 中心한 基督敎와 東洋宗敎 中에 始作된 豫言理想과 合한 뜻을 보아서 世界統一理想을 完成한 하날 攝理하는 目的의 地이니 本來부터 創造主의 바라든 땅으로 되어서 왔다는 바를 表徵하는 事實인바이다. 그러기에 韓國은 地理的 最高 價値地라는 바도 이런 하날적 立場으로 目的하여 있었다는 바를 明白하게 알바이다.
그리하여 再臨 예수를 中心하고 韓國은 뜻의 完成을 보아 果然 世界의 한 中心地로서 世界上에 貴한 文明의 中樞部를 造成하고자 하는 바가 하날의 目的인바다. 그런고로 韓國 全部는 後日의 國際의 理想 東山으로 한 遊筧目的地로 하고저 하는 理想境으로 바라고 하날은 처하여 있음을 아러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創造理想地는 韓國을 標準하였기에 이 韓國은 世界上에 찾어볼수 없는 貴한 創造目的 中心 地帶로 至한바를 아러야 한다.
이 目的 完成하게 할 使命과 責任은 누구에게 있나하면 再臨主가 中心이 되어서 韓國人 協助하여 나아가 世界基督敎를 總合시켜서 世界的 中心地帶를 造成하여야 하는 바가 全人類의 目的이며 또 하날의 目的이면서 하나님의 目的인바이다. 그러니 하날 뜻 反하는 사탄은 韓國 中心하고 反旗를 取하여 서게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至今 韓國人은 하날 對하여서 선 者로서는 至極한 善位에 屬한 者 있는 反面에 사탄 屬한 存在도 至極히 惡한 者로 世界에 類를 보지 못함도 그 眞狀의 發表하는 바도 原理로 된다. 하날이 至極히 사랑하는 者 있는 反面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者가 있는 것도 事實이다. 그러니 韓國은 하날 中心하고 이런 分立을 보니 家庭에서 이런 원수적 分立을 보는 바는 한 眞狀으로 되는 原理인바다. 이런 뜻이니 聖經 全部는 韓國에서 完成해야 끝맺는다. 우리 韓國人은 總動員하여 하날 뜻 成事하여서 世界의 中心地로서 建設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하날에 合하여 기쁨의 復歸 에덴 東山을 地上에 建設할바가 最終的 使命인바다.
그러니 至今 韓國 中心하고 싸우는 目的은 韓國 獨立 위한 目的이다. 韓國 中心하고 最後 發惡을 다하고 있다. 하날 代身한 U.N.은 第一次 第二次 第三次로서 뜻을 찾어 平和를 目的하고 나왔지만 結局은 目的 達成으로 歸結하여지는 바가 原理인바다. 아무리하여서라도 UN과 韓國은 합하여서 韓國 獨立完成하여야 할 바가 하날의 한 뜻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날 中心地이니 人類의 中心地며 人類의 基本 祖國으로되니 하나님은 UN을 動員하여 協力하게 하는 바다. 그리하여야 本 뜻을 繼代할수 있는 바다. UN이 만일 讓步한 되는 사탄 便쪽은 結局 反對로 對立으로 나타나는 바가 原理인바다. 그러니 韓國을 中心하고 完全히 사탄 追放이 하날의 目的으로 되는 바이다. 이리하여야만이 보다 하날 뜻 成事의 第一步로써 한 所望의 始作을 全世界는 보인다. 그리하여야 韓國을 中心하고 全世界의 最高 信仰者는 動員하여 하나님의 뜻 完成에도 協力하여야 하는 바가 今後의 한 目的課業이며 韓國 信仰者는 먼츰 뜻 侍奉의 中心이 되어 世界信仰者들과 合하여 協力 中心使命을 다하여야 하는 바가 現韓國 基督敎인 한 使命인 바다. 또 그 完成함으로 創造的 恩擇을 받은 三千里 半島東山을 우리가 기리고 높이 端裝하여 世界 빛내는 바며 創造主 뜻 完成을 보아 基本 復歸로 始作을 볼바이다.
第四 節 韓國은 諸宗敎의 總結實地
半萬年의 歷史를 가진 韓國民族은 宗敎의 信念心을 많이 가지고 있는 民族이다. 그런고로 韓國民族에게는 그 어느 時代를 勿論하고 그 對하는 곳마다 宗敎的 信念으로 만히 對하여 나오는 民族이니 만침 宗敎構成을 가지지 못한 立場에서라도 信仰을 發揮하여 自己들의 信念目的을 達成할려고 많이 努力한 民族이다. 그러기에 韓國人들은 宗敎觀念이 强한 民族이다.
그러나 儒敎의 精神을 받아 三綱五倫을 完成하기 爲하여 全國家的으로 努力한 全盛時代의 結實인 李朝 歷史를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儒敎는 韓國을 中心하고 그 目的을 最高發揮한 나라라는 바는 事實인 同時에 그의 信念心은 至今까지 熟練한 級에 사람들은 大槪가 全部는 儒敎精神을 習得하여 나오고 있다. 이 儒敎的 精神은 至今까지 그 使命的 節介를 維持하였기에 韓國은 至今까지 儒敎를 中心한 東洋의 한 中心地로서 그 믿음을 높이 가지고 있음으로 韓國을 東洋禮儀之國이라는 歷史的 由來를 가지고 있는 바이다. 이렇듯이 儒敎는 韓國人에게 큰 敎養的 中心으로 偉大한 力活로서 歷史를 지내왔다. 그 儒敎的 思想은 外政下에 있으면서도 그 思想을 세워 나온바는 事實이다. 그리하여 外政 以後에 新文明 文化世界를 바라보아 新生을 하여 出發된 時代를 當하여서도 自己들이 遺傳하여 崇拜하든 孔孟의 思想을 中心한 道를 中心하고 高尙한 道德心을 가지고 나온바다. 그러면서 新時代를 當하여서 韓國의 立場은 壓政을 當하니 自然的 因習思想이 濃厚한 儒敎的 思想은 漸次로 刺戟받아 減少하여 나오는 方向으로 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儒敎的 思想을 가진 人士들은 그 時代에 바라는 바는 다시 國土復歸를 希望하여 나오는 中에 韓國에 대한 豫言書로서 나타나 있는 鄭鑑錄을 硏究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外政을 對하여서 自己들의 態度를 定하고 韓國이 復歸되어 全世界의 中心國으로 된다고 알려주는 鄭鑑錄을 한 中心点으로 하여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韓國民族은 儒敎를 崇拜하는 知識層에 屬하는 者들은 大多數가 이 鄭鑑錄을 中心으로 하여서 國土復歸와 同時에 韓國의 한 理想境을 論하면서 至今까지 나오고 있는 바는 事實이다. 그러니 이 豫言書는 果然 時代的으로 모두가 마저나왔다는 例에는 至今 韓國全民族을 말하면서 그 豫言書를 많이 崇尙도 하고 있다.
이렇게 儒敎의 思想은 鄭鑑錄을 中心하고 基本目的인 儒敎의 道德觀念보담도 鄭鑑錄 支待思想으로 儒敎人들은 立場을 세울수 있는 路線을 取하여 나타난바가 外政을 相對로하여 同學이라는 名稱으로 하여 民族運動을 이르킨 것이 卽 三日運動 己未年 事件인바이다. 이리하여 東學黨은 한 敎派를 세워 宗敎모양으로 理想을 잡아 世界없는 天國理想을 中心하고 天道敎라는 名稱으로 나타나 至今까지 나오고 있다. 그 모든 中心은 韓國을 中心한 豫言書 鄭鑑錄을 中心하고 그 目的完成標準을 定하고 나오고 있다. 儒敎는 韓國의 新形體를 가진 한 敎를 成하여 놓게 되었다. 그런고로 儒敎的 한 結實한 存在를 天道敎는 그 位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韓國人은 信仰을 끝까지 變치 않고 나오고 있으니 新敎理는 天理를 通하여 내게 된다.
또 佛敎를 두고 韓國을 살펴보면 亦是 佛敎도 李朝時代를 中心하고 많은 發達을 하여왔지만 外政下에서도 佛敎는 많은 長成을 보아왔다. 그리하여 佛敎亦是 全盛을 본곳은 韓國이다. 그리하여 佛敎는 韓國에 있어서 特히 한 末來에 대한 極樂思想으로 나오면서 韓國에 對한 豫言的 宣言을 많이 하여 왔다. 그리하여 韓國 豫言書를 記錄한바도 佛敎에서 始作함바도 事實이다. 이렇듯이 韓國 三千里를 中心하고 佛敎로 全盛目的 完成하게 하여 創造主의 神喜와 世界에 對한 豫言을 찾는 그 使命적 責任이 큰바도 事實이다. 이렇게 하나님 東洋에는 基督敎가 없든때도 이런 敎들을 通하여 하나님의 末來의 地上目的과 天國目的을 敎로 세워서 그 路程을 發表한바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한분이니 그 目的은 同書로 나누어 있는대도 終局에는 한 目的 基点上을 向하여야 하는바가 하나님이 계시는 原理的 事實인 바다. 至今이 佛敎도 亦是 그내들이 나가는 方向을 새로하고 있는바는 事實이다. 卽 二十世紀 文明世界를 떠나서는 그 目的 未完成할바로 알고 있다. 언제나 宗敎란 것은 사람을 中心하고 始作하는 바인데 사람 生活境地를 間隔하고는 그 点을 大衆에게 傳할수 없는 바도 사실이다. 이리하여 韓國의 佛敎도 亦是 至今 韓國 豫言書인 鄭鑑錄은 天桃敎人과 儒敎人과 佛敎人이 全部 한 現實에 바라는 한 現實理想境으로 되어 있는 바는 事實이다. 이렇듯이 韓國宗敎 中 儒彿敎는 또 天道敎는 全部가 韓國 豫言書로서 그 目的 標準을 한곳으로 向하여 集中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最終末에는 原理完成을 中心하니 敎들도 統一이 目的이니 이런 古來에 오는 韓國宗敎는 한 基点을 向하는 바로 하나님이 韓國을 中心하여 攝理하고 있다는 證據는 事實이다.
여기에 特히 天道敎는 近三十餘年 歷史를 中心하고 韓國에서 始作한바는 하날의 存在目的完成할 앞날의 터를 닦기 爲하여 그 存在가 나타나기 直前에 始作하게 한 뜻이 있음을 아러야 한다. 地上天國 目的을 바라고 나오는 그 敎는 바로 하나님의 뜻 하는 韓國에 있어서 準備한 敎인바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날 存在를 보기 前 이와같은 한 完成基臺를 잡으여야 하겠으니 이런 敎가 생기는 것은 하날 目的이었는 바이다.
이리하여 韓國을 中心하고는 全宗敎는 한 目的点을 向하여 움지겨 나옴은 끝날 하나님의 目的은 하나이니 그 宗敎目的도 하나님 뜻 돕게하기 爲한바의 目的으로 完成보는 바가 原理인바다.
世界統一云云하는 時 오기전에 宗敎的 統一点을 보지 않으면 世界統一 完成을 보지 못하는 바다. 以外 宗敎는 至今 現文明과 合流化하여 役事하는 基督敎를 살펴보자. 韓國 基督敎는 近 80年 歷史를 두고 世界上 이와같이 急速度로 敎布한 나라는 없는 바다. 이 基督敎는 韓國에서 많은 虐待를 받으면서 至今까지 信條를 維持하여온 歷史를 갖고 있는 바다. 特히 舊敎의 犧牲도 더욱 큰바이었다. 이리하여 하날 對하여 빌수 있는 길을 잡은 韓國人은 精誠다하여서 하날 對하는 信仰生心을 韓國民族은 세워 나왔다. 이 民族은 將來에서 第二 猶太民族이라 하여서 全世界人이 말하는 바도 큰 意義있는 바이다. 모든 面으로 볼 때 한 關聯있는 民族인바는 事實이다. 特히 靈으로 敎示받는 信仰者에게는 韓國은 基督敎를 中心하고 至今 最大 標準國과 合流를 보고 있는 바는 事實이다. 이 韓國 信仰界도 亦是 全世界의 한 結實地로서 그 立場의 位를 높이 잡고 있지 않는가. 神奇한 異蹟도 至今 많이보고 있는 事實로 보아도 果然 世界 없는 位를 갖고 있다. 이 韓國敎界는 二十世紀 現時代를 두고 世界上에서 代表的 苦痛도 信條 爲하여 받아왔다. 外政下의 그 極難에서도 참고 勝利한 崇高한 信仰節介者 어데 딴 곳에 볼수 없는 現代的 最高 殉敎國家이다. 外政을 中心하고 그 苦難과 그 共産主義를 中心하고 當한 悽慘한 虐殺 等 果然 現世界에 類를 볼수 없는 國家인 바다. 外政 紳士參拜問題로 信仰貞操를 犯한 것은 하날적으로 完全하게 蕩減키 爲할려니 그 殉敎的 사람들은 한 祭物로서 代身되어 집을 韓國敎界信仰者는 잊어서는 아니될 바이다. 再建敎會가 나와 그 使命的 役割을 다하고는 다시금 하나님의 基本点 合하여 하나되어야 할 時代는 멀지 않어 바라는 바는 事實이다. 그리하여 複雜한 歷史를 通하여 오면서 善血의 殉靈을 높이 讚揚하여 하날 뜻 完成에 全力 다하여야 할바가 事實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지금 韓國의 信仰界를 살펴보면 特殊한 새일들이 信仰界를 中心하고 많이 보여지고 있다. 지금부터 近二十年을 中心한 韓國基督敎會에 하날便으로서 보냄을 받아 나타났던 最高信仰者들을 異端의 中心者로서 埋藏하였든 그 存在들은 果然 하날 뜻 中에 크나큰 使命存在로 보내심을 받은 存在였다. 그는 멀지 않아 外政惡魔를 對比하여서 한 基臺를 세우려고 하여 보내였든 存在를 價値 없이 보내게 되었다. 至今 그 뜻을 中心하고 새 祭壇이 始作보았으니 그 自體의 偉勢를 至今 왜 잠기고 있는가. 果然 뜻 無知의 人間 對하는 하나님의 攝理는 어찌되어야 하겠는가. 完成할려니 사람 믿지 않음은 昔日이나 至今이나 同一한바이다. 그러나 뜻은 참으로 成事를 보아야 하겠으니 하나님의 使命을 받들어 이 뜻을 記錄하게 되니 어찌 마음으로 嘆息치 않으랴.
韓國은 하나님을 中心하고 最後的 目的完成을 標準하고 바라보고 있기에 그 攝理的 役事로 어데 特別한 信仰存在들을 通하여서 새로운 일들을 發表케한바도 크나큰 原理가 있는바이다. 그것은 모두가 뜻 協力하는 基督敎信仰 路中에 없는 全部 새로운 것을 發表하는 바는 뜻 成事 標準하는 바도 뜻 成事를 標準하여서라는 바는 事實이다.
韓國基督敎는 큰 難事로서 對할지 모르나 特히 내가 바라는 바는 敎示받는 者는 이 發表보고 祈禱로서 解決받으라. 그러면 그 하고 예수 再臨이란 發表에 對하여 그 根本을 알고 對하여야 할바가 現 韓國基督敎의 使命이다. 萬一 否認하고 나면은 全部를 未解決的 世界로 될바다. 그런고로 이 뜻을 알고 날 때 크나큰 歷史的 變更을 韓國을 通하여 攝理하는 바를 알수 있다.
이리하여 모든 原始的 中心을 基督敎가 쥐고 新蘇生出發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바다. 이리하여 韓國에서 뜻 成事할수 있게 하여야 하겠으니 外部的 宗敎들도 한 理想基点으로 바라고 있는 存在는 사람이란 存在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原理的 論理로 보면은 아담으로 와야하는 基督敎再臨主도 韓國人으로 와야한다는 모든 根本을 알게 될 때 世界信仰界 全部도 한 解決의 新( )을 定하는 바가 始作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기에 現世界의 特別한 有志들은 再臨한다는 發表를 할바가 맞지 않고 있는 듯 하나 사람으로 오니 後三十餘間을 中心하고 再臨한다는 發表가 있어야하는바가 原理인 바이다.
그런고로 이 再臨主 存在를 豫言한 外部宗敎의 豫言書로 된 鄭鑑錄의 中心存在란 바가 東西洋 分立하여 攝理하나 한 目的基点向하여 完成할려는 하나님 뜻의 成立는 보는바도 된다. 그러므로 至今까지 나오는 基督敎의 未解決을 解釋하고 新理想世界 出發을 바라는 바는 事實이다. 지금 이와같은 韓國의 基督敎的 使命을 完成하여야만이 全世界를 通하여 뜻 完成의 한 路程을 造成할바다. 그러므로 基督敎 中心하고 韓國의 宗敎는 合하여 한 路程을 造成할바다. 그러므로 基督敎 中心하고 韓國의 宗敎는 合하여 한 目的基点을 向하여 理想을 始作하지 않으면 안될 全韓國民族의 使命인 바도 된다. 그러기에 全宗敎는 自己들이 崇拜하는 하날 對하여 敎示로서 解決받아야 할바가 目的으로 되어있다. 어떤 宗敎信仰者나 最高位에 있는 信仰者로 神의 敎示를 받는 바니 믿지 못할진대 神을 通하여 解決받아 大衆 對하여 基本使命 다 하지 않으면 안될바가 크나큰 나머진 課業으로 된다.
이리하여 韓國으로부터 全世界 없는 한 所望인 同時에 한 기쁨의 消息인바다. 그리하여 原理世界로 찾어 原理로 사는 者는 全部가 天國은 勿論인바다. 原理復歸世界에 사는 民族은 全部가 天國을 自然的으로 나타나는 바다. 그러기에 本原理復歸世界가 卽 理想世界인 바이다. 墮落없었으면 宗敎란 問題없이 그저 뜻대로 生活하면 天國은 自然原理였든 바이다. 그런고로 앞날 理想世界는 宗敎란 名詞가 必要치 않고 그저 生活로 되는 原理復歸世界로 된다. 그 原理로 살면 그저 救援完成이라는 바가 目的으로 된 時代가 理想時代인 바이다. 이 時代를 基督敎의 地上天國時代라 하는 바이다. 이 때에 예수의 最高目的 完成하는 때라는 바는 事實인바다. 그러니 韓國이야 世界中心地가 되는 바가 原理世界를 始作하는 中心地이다. 世界中心地라는 바이다.
웨 타락케 하고 攝理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創造받은 被造物은 어떤 存在이나 勿論하고 創造原理軌道를 갖고 지음 받음이었다. 그러므로 被造物이 있는 곳에 原理基臺를 갖고 있다. 原理없는 곳에 存在하는 創造物이 없다. 創造主는 原理로서 完成 못되는 存在라는 것은 宇宙에 存在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무슨 存在나가 原理基準을 喪失한 곳에 自然히 破壞되는 것이다. 그것은 原理完成世界에 存在할 수 없음으로 無로된다는 것을 豫告하는 바이다. 그러나 原理基準을 지으신 創造主는 秩序的 原理段階를 두어지으심이다. 어떤 被造物이든지 存在하는 完成体로 되기 爲하여는 原理基準完成을 爲하여 나아가는데는 蘇生過程을 通하여 長成過程으로 또 長成過程을 지나서 完成이란 軌道的 過程을 通過하여서 完全 存在物로 되게끔 지은 被造物 原理軌道가 있는 바이다.
이 軌道를 지나 原理基準基臺를 넘어선 存在만이 完成存在物로 하나님은 지으신 바이다. 이 原理完成한 存在들은 사람에게 附與하신 바이다. 그런고로 모든 萬物은 全部 完成位를 넘어선 格으로 사람을 對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사람은 被造物이 갖고 있는 原理軌道를 圓滿히 通過못하여 完成原理基準을 못넘어선바다. 그러기에 사람은 萬物主人公 格位를 傷失한바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는 以上 또 完全한 하나님이 지으신 以上 그 原理를 세워놓은 原理的 本來의 基準도 完全한 것으로 成事를 보아야만이 하나님이 完全하다는 結果를 보는바다. 하나님이 完全하게 지은 原理었든 사람 創造原理基準은 그 位를 못한바니 사람은 原理 完成位에 있는 他萬物 對할수 없는 것으로 되어지었다. 그러니 사람으로 因하여서 萬物도 未完全位에 머문 格에 處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 墮落은 被造物 全體를 墮落의 位에 두게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創造는 未完全創造라는 結果를 보게 된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지은 것을 嘆息한 바이다.(창6/6)
하나님은 完成原理基準을 넘어설수 있는 存在를 對하여서 直接主管하기 爲한바가 創造的 中心目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完成 存在物만을 主管할 수 있는 바이다. 完成치 못하였을 때에는 原理를 두어 그 原理로 主管하게 지었기에 언제든지 하나님은 原理 未完成時에 處하는 存在는 間接的 主管으로 對하는 바다. 그것은 언제나 原理 基準을 無視 못하는 바이므로 이 原理完成하여야만이 하나님이 지은 原理도 完全한 것으로 보아야만이 하나님이 完全하다는 것이 成立을 본다.
萬一 完全 原理로서 세운 存在物이 未完全한 位에 있으면은 未完全한 하나님의 立場이 되어진다. 그러니 하나님은 未完全한 분으로 되는 양이니 完全 完成位를 갖게 지은 宇宙 對하여서 하나님의 主管行事를 못하고 間接的 主管 行事位에 계시는 바이다.
그것은 墮落된 原理는 未完成位니 直接主管 못한다. 本來 하나님은 原理完成格者만을 主管하게끔 基準을 세운바가 創造的 中心意義였기에 언제나 그 基準을 찾어 세우고저 하는바가 攝理的 目的으로 된다. 그런고로 사람의 以上은 무엇인가 하면 創造原理基準을 넘어서 하나님의 直接主管받는 것이다.
萬一 사람이 이 主管權內에 드러가면 하나님은 사람을 마음대로 主管할 수 있는 바이다. 지금 墮落된 사람들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은 原理路程을 못 通過한 過程上에 處하는 格位에 있기에 主管 못하는 바다. 卽 被造物에 附與하여 주었든 原理로서 主管當하여 完成位를 나오는 過程에 處하는 양이므로 하나님은 對할 수 없는바다. 卽 原理結果主管權內이다. 이렇기에 하나님은 사람이 罪를 지어도 主管못한다. 萬一 主管하면 創造原理를 無視하는 格이니 主管 못한다. 그러니 그 基準을 사람에게 對하여 찾어 올라오기를 要求하는 바다.
이런 過程에 돌고 돈 것이 六千年 歷史이다. 하나님이 사람 對하여 信仰을 要求하는 바는 墮落되었으니 原理存在格을 하나님 말삼을 通하여 하나되라는 것은 다시금 創造한것과 같은 墮落前 創造基準을 復歸코저하여서 要求하는 바이다. 卽 再創造 完成位를 잡고저 함이다. 웨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런 路程을 밟게하였는가하면 그도 사랑으로 지으셨든 創造原理基準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墮落行動을 알면서 어찌 墮落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하면
① 完全 原理的 權位를 세우기 爲하여
卽 次圖로 보아 創造原理完成基準線上에 主管하는 것이 本原理인데 原理結果主管權內에 있는 X 墮落点行動을 干涉하면은 本 創造原理를 無視하는 것이 됨으로 主管못하였다. 完全한 하나님이 지은 原理도 完全原理的 權位를 세우여야 하나님적 位身을 세울수 있는바이므로 X 墮落点 行動을 알면서 主管치 못하였다.
하나님 直接主管權內
創造原理完成基準線 完成 (對像圈內)
C 完成基準線 完成(成約)
原
理 創 X B 長成 Y 六 復 G 長成(新約)
結 造 千 歸
果 原 年 原
主 理 A 蘇生 理 F 蘇生(舊約)
管 軌 軌
權 道 道
內 Z
原理基臺 破壞權內
無原理權內
地獄 D E
空中權勢
② 사람을 萬物의 主人格 完成을 爲하여
卽 사람 外 被造物은 創造原理軌道를 全部지나 完成基準点 C点을 넘어서 完成 位에 處하는데 사람도 主人될려면 原理的 面에서 萬物 通過한 創造原理軌道를 더 圓滿히 通過치 않으면 아니될 共同原理軌道를 갖고 있는 바인데 萬物은 完成位를 넘고 있는데 사람만이 完成位를 못넘은 X 墮落点上에서 墮落行動을 하게 되었다.
萬一 하나님이 主管하면은 創造原理基準을 못간 存在이므로 共同原理軌道를 못 通過한 存在格으로 되는 바이니 萬物의 主人格에 나설 수 없게 되는 바이므로 主管못하였다. 萬一 主管한다면 사람이 하나님 主管이 最高의 所望이므로 原理完成 軌道를 남겨두고 하나님의 主管만을 要求하게 됨으로 原理完成格에 사람이 나설 수 없는 바이므로 主管 못한다. 또 사람은 本來부터 사탄 보담 높은 存在位에 處하는 存在이므로 사탄 誘引한다고 하여서 사람다려 사탄을 삼가라 하면은 사람은 벌써 사탄보담 못하다는 格으로 되는 바니 干涉할 수 없었다.
③ 原理 創造主는 한분이라는 立場을 세우기 爲하여
하나님의 被造世界의 主人公이매 被造物 있는 곳에는 創造原理를 갖고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原理와 存在物 계신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原理主人이다. 原理없는 存在物이란 업슨 바면서 있다하여도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는 바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짓지 않은 原理나 짓지 않은 存在行動이나 臺할수도 없는 바이다. 그런데 에덴 東山에 아담 해와의 X 墮落点 行動을 하나님은 알지라도 그런 原理는 自身이 짓지 않은 바이니 있을 수 없는 行動이다. 이 行動을 事實的 存在와 같이 原理 있는 곳 對하는 하나님이 對하여 준다면은 其行動은 벌써 原理的 格에 선 양으로 되는 格을 取하게 되는 바이다. 卽 墮落行動 그 스스로가 原理를 갖고 存在格을 取하여진 양으로 되니 이런 原理없는 世界에 原理的 存在를 지은 것과 같은 立場에 서므로 사탄도 第二 創造主格을 取하는 바이므로 하나님은 墮落行動을 對할 수 없는 바이다. 卽 創造主는 언제나 하나님 한분이라는 原理를 바라서 墮落行動을 干涉치 못하였다.
以上이 墮落시킨 原因인 바다. 墮落世界가 始作하였으니 無原理形을 取하여서 X, C 로 向上할 存在的 人間은 原理 없는 創造前 原理無權內를 向하여 X 墮落点으로부터 Y, D까지 墮落되었다. 그리하여 사탄은 反原理를 始作한 主人으로써 反原理 人間을 取하여 死亡世界 地獄 權內으로 主管을 始作하였다. 本來는 사람이 反原理이면 破壞無로 되어야 할것인데 地獄에 가서 있는 바는 사람은 創造基準이 永遠을 基準하였든 지었든 바이었다. 그런고로 地獄이란 破壞된 無原理世界를 말한다.
사탄 對하여 空中權勢 잡은 者라고 하는 바는 無原理世界權內에 處하는 存在이므로 그렇게 말한다. 지금 사람하나가 全部의 原理를 破함으로 死亡되니 原理完成位에 있는 方法도 破한 듯이 間接的 位에 處하는 格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 墮落함으로 創造世界는 創造하기 前 世界와 같은 價値없는 被造世界로 되었다.
그러면 그 價値를 回復하기 爲한 것이 攝理의 始作인바이다. 그것이 卽 사람을 다시금 創造하여 놓은 格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對하여 찾기 爲한 것이 攝理目的인바다. 사람이 X 墮落点으로 Y, D까지 왔으니 그것은 結果로 보면 하나님이 사람 創造할때에 言으로 創造한 言을 잃어버린것과 같은 反原理 X,Y,Z, 線은 言을 破한 線이니 言을 잃어버린바와 한가지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言찾어 原理찾어서 本言 原理完成人을 보고저하니 하나님은 言 없는 破壞權內인 사람 世界 對하여서 言을 세우기 위한 것이 攝理成事를 爲한 信仰의 目的이며 이 信仰의 結果는 原理完成人을 回復코저하는 目的으로 되어 至今까지 하나님은 사람 對하여 言을 세워서 우리 死亡人生을 對하여 救援코저 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E, F, G, H 復歸軌道線은 잃어버린 創造原理完成基準은 본 完成人 아담 해와를 찾어놓기 爲한바가 最高目的인 바이다. 그런고로 復歸軌道를 보면 六千年間이란 사람하나 찾기 爲한 目的으로 된다. 卽 墮落 侵犯을 받지 않은 아담 해와가 그 子女를 찾기 爲한바다. 이 基臺를 잡으려니 하나님은 墮落하였지만 墮落하지 않은 結果的 目的을 보고저 함이다. 그런고로 지금 神靈한 사람들은 에덴 復歸를 많이 말하는 바는 基本基準原理完成하라는 豫告的 證據이다.
그리하여 完成한 아담 完成한 해와 찾어서 完成한 子女들로 찾기 爲할려니 舊約時代 新約時代 成約時代로서 蘇生, 長成, 完成으로 한 原理基準完成人 아담 해와와 그 子女를 擇하기 爲한바가 攝理歷史이다. 그런고로 지금 아러야 할바는 우리 人間은 完成한 原理的 父母를 못가짐이다. 卽 墮落圈을 지나서 完成父母를 對할수 있는 完成子女格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바다. 이 完成 子女格을 이루기 爲한바가 成書에 言을 中心한 新約信仰의 本意인바다.
지금 예수는 누구신고하니 墮落하지 않은 人間의 아버지가 예수인바이다. 卽 完成 아담격 存在가 예수인바다. 이 完成 아버지格者되는 예수는 어머님을 찾어 人類의 基準根本原理完成을 잡기 爲한 잔치가 어린양잔치라한다. 그리하여 完成原理父母를 못가진 人類가 그 父母를 地上에서 侍하는 時代가 地上天國時代의 完成 成約時代인바다.
至今까지 人間은 完成的 父母를 通하야 하므로 하날이나 땅이나 全部가 再臨을 苦待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父母를 찾는 子女로서 天國生活이 처음으로 始作하여 樂園生活을 끝마치는 바이다.
우리 地上은 完成父母를 侍시고 生活하면 樂園을 通하지 않고 直接天國이란 完全完成復歸世界로서 始作을 보는 바이다. 이 目的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六千年間의 모든 失手를 取消하며 사탄까지 屈服시키지 않으면 아니될 立場에 處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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